장미의 이름
장기성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유명세를 탄 『로미오와 줄리엣』을 책장에서 꺼낸다. 이 희곡작품은 워낙 널리 알려져서일까 다른 책보다 오히려 손길이 적게 가는 편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때 묻은 것은 옛 그대로인데 세월 때문일까, 그땐 보이지 않던 것이 지금은 보이니 참 신기하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이더란 짧은 시가 불현듯 떠오른다.
로미오와 줄리엣,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은 애련한 비극이다. 숙명적인 죽음을 운명적 사랑으로 다루고 있지 않던가. 이런 대사가 작품 속에 나온다. “죽음이 당신의 달콤한 숨결을 빼앗아 갔을망정 그대의 아름다움은 빼앗아 가지 못했군요.” 가냘픈 순정과 애처로운 영혼이 곳곳에 배어들었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이란 외딴섬 곳간 문학을 세계문학 반열에 올려놓는 데 일등공신이란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수지간의 몬테규 가문과 캐플렛 가문에서 태어난 도령과 규수다. 두 집안의 반목과 질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만큼 오래되었다. 줄리엣은 원수 집안의 아들 로미오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보니, ‘몬테규’라는 가문의 이름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줄리엣은 어느 날 로미오에게 “가문의 이름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는 마찬가지지요.”라는 가슴 아린 말을 건넨다. 가문 간엔 원수이지, 사람 간엔 원수는 아니라는 걸 상심하듯 내뱉는다.
줄리엣이 말하고 싶은 건 이름(명칭)이 아니라, 실체(본질)가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을 게다. 장미라는 실체에 대해 어떤 다른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장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애잔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가문이란 명칭의 허세와 허상을 빗대면서 말했으리라. 실제로 장미에게 어떤 다른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장미 자체의 향기는 변함이 없으리니, 무릇 이름이란 그저 한낱 부질없고 하잘것없는 빈 죽데기에 불과했음 직하다.
칸트만큼 존경받는 서양 철학자도 드물 것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게 흘러 들어갔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칸트는 서양 철학의 제왕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현재 러시아에는 ‘칼리닌그라드’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가 칸트 시대의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로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다. 이름 자체의 의미로는 ‘왕의 산’란 뜻이다. 칸트는 바로 여기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말의 안장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이 집안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칸트라는 성을 스펠링으론 ‘Kant’라고 쓰는데, 더할 나위 없는 전형적 독일식 철자법이다. 칸트의 부친인 요한은 자기가 만든 말의 안장에 낙관을 찍을 때 ‘Kant’ 대신에 ‘Cant’라는 영어식 철자법을 상표로 사용했다. 장미 모양의 장식 테두리 속에 ‘Cant’라는 글자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런 상표를 사용함으로써, 말의 안장이 프로이센 공국(독일)이 아닌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만든 제품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칸트의 부친은 줄곧 ‘우리 집안은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독백 삼아 읊조렸고, 아들 칸트에게도 은연중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웬걸, 최근에 학자들이 칸트의 족보가 의심쩍어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니 ‘칸트’라는 성은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칸트바겐’으로 작은 시골마을임이 밝혀졌다. 칸트의 뿌리는 ‘쿠르스족’으로 유럽 중부 해안가의 소수 부족이었다. 현지에서도 천대받는 혈통의 출신이다 보니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족보 조작을 했거나,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기에 기억 왜곡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독일어 철자법에 의거한 Kant 대신에, 영어식 스펠링 Cant를 사용하여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심사로 보여진다. 독일어에는 외래어를 제외하고 C로 시작되는 낱말은 사전에 없다. C로 시작되는 낱말들은 전부 외래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구태어 Kant 대신에 Cant라는 브랜드로 선호했을까. “이름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는 마찬가지지요.”라고 말한 줄리엣의 독백에 대응시켜보면, “Kant는 어떤 다른 이름(Cant)으로 불러도 향기는 마찬가지이지요.”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선 다른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은 방대한 지식이 담긴 현학적인 스토리와 미스터리한 전개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 덕분일까, 삽시간에 세계적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1986년 이 책이 처음 번역돼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에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데 왜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당시에도 많았지만 지금도 여전하다. 그 이유는 소설 속에서 장미와 연관될 만한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궁금증에 화답이라도 하듯 에코가 직접 해명에 나서야만 했다. 말하자면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별쇄본을 내어 독자들에게 이례적으로 해명했다.
에코가 처음 소설을 쓰기시작하면서 구상했던 제목은 「수도원의 범죄사건」이었다. 이 제목은 소설의 전체 내용과 매우 흡족하게 부합될 뿐 아니라, 살인사건을 다루었다. 하지만 이런 제목을 붙일 경우에 독자들의 상상력은 오직 범죄를 다루는 탐정소설로 간주하여 읽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찌감치 집필 중도에 그 제목을 포기했다.
그 대안으로 착상한 제목이 「멜크의 수도사」였다. 여기서 ‘멜크’란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이름이다. 소설 제목에 고유명사를 쓰게 되면 독자들뿐 아니라 출판업자조차도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고 에코는 술회했다. 고유명사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오직 그 명사 한 곳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고 집필을 끝내놓고 나서 ‘장미’라는 낱말이 뜬금없이 그의 귓가를 스쳤고, 이윽고 원고지 맨 앞장에 ‘장미’라는 이름을 붙였더니 소설 전체 내용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어떤 아우라적 광채가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면 할수록 돋보인다는 생뚱맞은 공식이 있지 않던가. 말하자면 책을 읽을 때 작가가 뭘 의도했는지 묻지 말라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쓰는 사람은 작가이지만 해석은 오직 독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일견 고개가 끄덕여진다.
「수도원의 범죄사건」보다는 「멜크의 수도사」가, 「멜크의 수도사」보다는 「장미의 이름」이 어쨌든 에코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과연 그대로 장미일까. 이름이란 한낱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줄리엣의 장미’와 ‘칸트의 장미’ 그리고 ‘에코의 장미’에서 보듯이 말이다.
칸트와 에코는 ‘no’라고 응수했다. 오직 사랑에 흠뻑 빠져 혼쭐을 놓은 줄리엣은 ‘yes’로 답했다. 누구나 함부로 가질 수 없고 아무나 가져서도 안 될 것을 가져버린 순진무구한 줄리엣,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것은 뭘까. 생의 가운데서 찰나일지언정 이런 순간 속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몇 번의 윤회를 거듭해야 찾아올까 말까한 그 순간. 모든 게 자본과 물질로 뒤범벅된 흙탕물 속에서는 보이지 않은 그것, 줄리엣은 찾았고 거기에 잠시 머물렀다. “가문의 이름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명칭)으로 불러도 향기(본질)는 마찬가지지요.”라고 한 말을 누가 감히 폄하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