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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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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교회 그리고 남의 신앙의 글 스크랩 김홍전 목사 소개
김우곤 추천 0 조회 81 18.11.29 2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홍전 목사 소개 



김홍전 박사님은, 박형룡 목사님의 파송으로 최초로 해외로 나가서 WCC의 신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시고, 몸 담고 있던 기관이 WCC를 지지하는 기관에서 사임하시고, 수많은 강연을 통해 WCC의 심각성을 알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바른 교회를 이 시대 앞에 바로 세우고자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교회인 성약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체계를 소화하셔서 당신의 삶과 목회와 교회현실 가운데 구현하신 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어로 설교하실 만큼 능통하셨고, 다방면의 방대한 신학체계가 설교 가운데 녹아있는 분이십니다. 특히 외국의 선교사로부터 작곡학을 배우시고 개혁교회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예배식에 적합한 작곡, 작사를 하셨습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설교집과 찬송곡이 다수이며, 복음과 신앙의 도리와 은혜의 수단, 신령한 생활과 교회, 하나님나라의 주제아래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시고, 풍부한 배경지식을 토대로 성경강해집을 펴내셨습니다.

김홍전 목사님을 존경하고 책을 즐겨읽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더욱 향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의 세계에 더욱 소망을 품고 살아가도록 교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약출판사 http://sybo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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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 김홍전 목사님
유영춘  

 

 

 

2003년 7월 6일, 천지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88년 7개월 20일 동안 생명을 주시어 교회를 위하여 쓰시던 하나님의 종 김홍전 목사님을 주의 영광 가운데로 부르시고 평생 쓰시던 그의 육체는 부활의 날까지 쉬도록 하셨습니다.


7월 10일(현지는 7월 9일) 정오 캐나다 토론토 시내에 있는 장례소(R.S. KANE FUNERAL HOME)에서 깊은 잠에 들어가신 김홍전 목사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은 평생을 돕는 배필로서 함께 걸어오신 김가일 사모님과 자녀들, 손자 손녀들, 친척,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친지들, 그리고 한국에서 오신 김명순 목사님과 정병길 목사님, 독립개신교회(IRC) 회원 등 70여 명이 모여서 성약교회 김명순 목사님의 집례로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장례식을 마친 후 3km쯤 떨어진 토론토 시내의 공원 묘역(MOUNT PLEASANT CEMETERY)에 도착하여 김명순 목사님의 인도로 성경 낭독, 찬송, 기도의 순서를 가진 후에 평생 쓰시던 김홍전 목사님의 육신을 안장하였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홍전 목사님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늘 가득히 목사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제는 이 땅에서 목사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목사님께서 생전에 베풀어 주신 사랑과 가르쳐 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은 생애 전반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평상시는 물론 특별한 상황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신절을 지키셨습니다. 목사님의 사랑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는 목사님의 위엄 앞에 너무 어려워서 감히 근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따뜻한 사랑이 가득한 분이셨습니다. 그릇된 것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단호하시며 항상 위엄과 높은 격조를 잃지 않으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을 따듯한 사랑으로 편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깊으셨습니다.


일상생활 전반에서 사모님을 사랑하시는 모습은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병상에 누우신 2년 반 동안에도 두 분의 사랑은 우러러볼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작은 따님과 필자는 그 모습을 “GREAT LOVE”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 자녀들이 목사님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반사되어 나타났습니다. 자녀들이 목사님을 아버지로, 목사님으로, 스승으로 모시면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와 자식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사랑을 보았습니다. 특히 병상에 누우신 목사님을 자녀들이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극진히 모시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을 크게 사랑하셨습니다. 1991년 11월 서울의 어느 신자가 토론토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의 침실을 사흘이나 내주시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는 거실에서 지내신 일이 있습니다. 1998년 10월 어느 날 밤에도 서울에서 온 손님들에게 침실을 내주시고 목사님 내외분께서는 작은 따님 댁으로 가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겸손하게 오직 성신을 의지하며 평생을 주께 드렸습니다.


목사님의 해박한 지식은 우리 범인(凡人)에게는 경이로움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만년에 시력이 안 좋으셨지만 늘 독서를 하였습니다. 돋보기도 아닌 고배율 확대경(loupe)으로 독서하시는 모습을 보고 “목사님께서도 독서를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내 지식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인데 내가 어찌 배우지 않겠는가?”라고 하시며 병상에 누우시기 전까지 고배율 확대경으로 독서를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겸손하게 평생 동안 쉬지 않고 배우셨습니다. 그 지식을 평생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고 이제 유산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아상(我相)을 버리고 오직 성신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걸어오신 일생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 있어 그 준비를 위한 공부를 몇몇이 하고 있을 때 목사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즉시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후 캐나다로 찾아뵈었을 때 그 일에 관하여 다시 여쭙고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제 말 신사 참배 반대의 일로 모두 잡혀가고 혼자 남아 기도하고 있을 때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어요.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오직 성신을 의지하고 아상을 버려야 하므로 평생 아상을 버리는 싸움을 하면서 살았어요. 그러한 사람의 전기를 쓰겠다는 것입니까? 무릇 전기란 잘한 일은 쓰고 잘못한 일은 감추려는 속성이 있는데 사람을 높여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목사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한국 근대사의 어려운 시기마다 앞에 놓인 분기점(crisis)에서 주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일제 시대의 신사 참배 강요, 한국 전란, 대한민국 초기 정부와 정치계, 민국일보와 군사 정권, 장로교회 분열 등의 역사의 분기점에서 목사님은 주께서 지시하는 길을 분별하여 걸어갔습니다. 역사의 기로마다 목사님 앞에 놓인 상황은 범인들에게처럼 그냥 지나가는 역사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 역사의 방향, 교회의 진로가 결정되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개인의 길이었으나 그 걸음은 독립개신교회의 길이 되었습니다.


1997년 독립개신교회의 정병길 목사님과 김헌수 목사님의 임직을 위한 한국 방문은 생명을 다 드리는 여행이었습니다. 청력, 시력, 소화력의 장애와 연로하심을 불구하고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어려운 여행을 하셨고, 결국 여행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아무리 어렵고 곤란한 상황이 앞에 놓여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주를 의지하여 극복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찾아 가셨습니다. 평생을 함께 걸어오신 김가일 사모님과 따님께서 “목사님은 가난, 질병, 고난 등 갖가지 어려움을 겪을 때 한번도 그 사실에 대하여 불평이나 어려움을 토로하신 적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오래전 “목사님께서는 교육, 정치, 언론, 예술 분야에서 일하실 기회가 많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올렸더니 “제가 다른 분야에는 재주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긴 소명과 사명은 확신하여 목사의 직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홍전 목사님은 비범한 점이 참으로 많은 분이었습니다. 피아노, 성악, 작곡에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젊었을 때는 소설을 쓰고, 민국일보 신문사 사장으로서 사설과 논설문을 쓰고 지도하였으며, 시를 지어 찬송하는 시인이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정치를 돕고, 한국 전란 때에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외교가였습니다. 대전대학(한남대학교의 전신) 설립 주무와 초대 학장 서리를 역임하셨으며, 학문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대학자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갈 길을 모르고 혼란에 빠졌을 때 6백여 회에 걸친 세미나와 집회를 주도한 웅변가였습니다. 컴퓨터 같은 기억력으로 저장되어 있는 해박한 지식을 때에 따라 쓰셨습니다. 아무리 큰일 앞에서도 당당한 대인이었으며 비록 작은 일도 필요한 경우 간과하지 않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주도면밀한 분이었습니다. 여행할 때는 풍류를 즐기며 풍부한 유머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낭만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범하여 뛰어난 점이 있으면 위인으로 높이 평가하여 자랑하고 추종하기를 좋아합니다. 위인은 신념과 성취욕을 이루고 추종자들은 그와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려는 때문입니다. 사람이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길지라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으면 그 탁월성이나 위대한 점은 사람의 것이 되고 사람의 욕심을 채워 주는 데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김홍전 목사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뛰어난 모든 것들을 당신의 것으로 생각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주께 드려 쓰임을 받았습니다. 김홍전 목사님께 주어진 비범하고 탁월한 모든 것들은 주께서 교회를 위하여, 그의 종으로 쓰시기 위하여 내리신 은사였습니다. 깊고 따뜻한 사랑의 능력을 주시어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깊게 해명할 수 있도록 많은 은사를 주시고 지식을 쌓도록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큰 선물로 그의 종을 이 시대에 주셨다가 거두어 가셨습니다. 생명의 주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 역사의 가도에서 주류의 신앙을 전하고 받도록 하기 위하여 주의 종 김홍전 목사님을 쓰시고 귀한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배울 수 있도록 많은 저서를 남기셨고, 훌륭한 찬송가를 주셨고, 예배 모범을 갖도록 하였으며, 배교의 시대에도 교회로 서 갈 수 있도록 독립개신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 유산은 받는 자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풍부한 유산을 상속받은 자답게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도 주께 쓰임을 받는 종이 되어 우리의 세대에 맡기시는 역사의 소명과 사명을 다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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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교수가 본 김홍전 박사님.

 

 

김홍전 목사님의 책을 접하면서 의문스러웠던건.. 이토록 훌륭하신 분이 왜이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주의 목사님이신 박영선 목사님께서 설교자의 열심에서 김홍전 목사님을 표현하시기를.....

 

김홍전 박사. 이름은 그렇게 안 났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10 대 학자를 뽑으라면 이분이 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분입니다. 바울 이후로 어거스틴, 칼빈 이렇게 꼽아 나가다보면 김홍전 박사가 낄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우습지만,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신학자들을 다 제치고 이 분이 낄 정도로 신학 세계가 방대하고 웅장한 분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대열에 끼는 분일 것입니다. 라고 극찬할 정도의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가에 비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서철원 교수님이 김홍전 목사님을 소개한 문장이 있어서 이곳에 적어봅니다.^^ 이 글은 교회론에 대한 것으로서, '본 강의록은 서 철원 교수님의 허락 아래 학생들의 편의와 효과적인 학습을 위하여 강의 녹음 테이프를 풀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라는 머리말로 시작하는 글입니다.

 

김홍전 박사 얼마나 신학공부를 잘했는가? 그리고 신학박사다. 그런데 목사가 아니다. 장로도 안되고 목사도 아니다. 김홍전 박사처럼 그렇게 훌륭한 신학을 가진 사람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예로는, 내가 대학교 때 좀 들어 봤는데 자기 집에서 가르쳤다. 그분도 좀 보통사람은 아니어서 그런 학을 가진 분이 신학교 와서 가르칠 욕심은 않고 집에서 몇 명 모아놓고 가르치고 계셨다. 그 재미보고, 그것도 신학박사가... 그래도 목사 안했다. 그 좋은 분을 활용해야 되는데 못하고 있으니 참 아쉬운 것이다. 참으로 나는 목사 안하고 철학교수 되는 것이 오랜 꿈이었는데 그게 안되고 결국 의지가 약해서 목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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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설교의 필요성 (김홍전 박사에 대하여 )

박영선

 

 

 

김홍전 박사. 이름은 그렇게 안 났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10 대 학자를 뽑으라면 이분이 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분입니다. 바울 이후로 어거스틴, 칼빈 이렇게 꼽아 나가다보면 김홍전 박사가 낄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우습지만,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신학자들을 다 제치고 이 분이 낄 정도로 신학 세계가 방대하고 웅장한 분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대열에 끼는 분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대단한 석학이십니다. 성경에 대한 안목이 보통 넓고 호방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도 안 유명합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글을 쓰실 때 의고체(擬古體)를 사용하셔서 읽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분은 서울역 앞 후암동에 성약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옛날 총신에서 신약학을 가르치시던 최낙재 교수님이 이분에게서 사사하셨습니다.

 

저는 김홍전 박사의 책들, 특히 구약에 관한 책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뛰어난 언어학 이해, 해박한 역사 지식, 일관된 신학적 해석, 이런 면에서 이분을 따라올 학자가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설교를 배우고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이분의 책을 권합니다.

 

이분의 설교는 흔히 말하는 설교가 아니고, 한 학기 강의를 요약한 것 같은 학문적 응축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라기보다는 구약신학, 아니 성경신학, 이렇게 말해야 할 분위기입니다. 이분은 설교를 통해서 신구약 성경신학을 아주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설교의 한 부분만으로도 한 학기 분량의 강의가 될 것입니다.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신구약 신학을 압축 요약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의를 풀어냅니다.

 

우리는 이분의 설교 자체를 평할 실력이 되질 않고, 또 평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그냥 받아들여서 배워야 합니다. 다만 설교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를 평가 하면 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에 설교자가 가끔 이런 설교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 경우에 그렇습니다만, 설교를 하다보면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성도들의 현실이나 수준에 맞지 않는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을 풀어놓는 것이 설교로서 가치가 있을까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신학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삼분설과 이분설, 세례냐 침례냐, 이런 것들이 성도들에게 과연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도의 현실이니 '지금 여기' 를 찔러주는 설교가 아니더라도 필요에 따라 어려운 설교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는 꼭 설교한 내용만이 전달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의 열심, 인격같은 것도 쓰임을 받습니다. 더더욱 '오늘 설교는 되게 어렵네' 이것도 설교의 효과입니다. 어려운 설교가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센 거구나.' 이것도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대부분의 일반 성도들은 성경의 사상을 자기 손에서 갖고 놀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습니다. '여느 철학, 이념과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에 일침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러 내용이 어려운 설교를 해서 잘난 척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대목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을 논하고, 인간을 논하고, 역사를 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실력껏 논하십시오. 그러나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시사문제를 다루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를테면 의사들의 신우회에 가서 괜히 모르는 의학용어 쓰고 그러지 마십시오. 거기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에게 '나도 무식한 사람이 아니오' 이것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어려운 설교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어려운 문단(passage)에 걸릴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논해야 할 때가 특별히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만이 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것의 탁월함과 광활함을 최대한 풀어내야 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오늘은 그냥 머나먼 지평선을 보고 왔어' 갖고 돌아가게 할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습니다. 그것도 설교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너무 단순화하여, 도식화하여 생각합니다. 선 몇 개를 그어놓고 "자, 이대로 따라오면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이런 약도로만 알고 있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의 삶의 자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간단 명료한 구조의 설교도 필요하지만, 그냥 드넓은 땅, 한없는 하늘, 저 깊은 바다, 이것을 보여주는 설교가 되는 때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넓으시며 기묘하신, 감히 범접 못할 무한하심이 전달되면 그 앞에 항복하는 이들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김홍전 박사의 설교가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역사나 사상을 논할 실력이 안 되면 괜스레 어려운 대목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잘못 잘난 척을 하면 훨씬 피해가 중세교회가 스콜라 철학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묶었다가 해를 본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펼쳐 보이시고 인도하사 보게 하시는 모든 것들의 충실한 증인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십시오. 말 장난만 하는 게 아니고, 감격만을 토로하는 게 아니고, 어떤 때는 광활한 평원을 걷게 하는 일도 해주어야 합니다. 저 깊은 바다 속을 여행하는 일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상하심과 따뜻하심을 만나는 때도 있고, 그분의 추상같은 엄위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여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지존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설교의 기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김홍전 박사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이 참 복입니다. 워낙 앞선 시대의 분이고 사상성으로 무장한 분이라 말씀을 어렵게 해서 그렇지 설교의 내용은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 박영선, <설교자의 열심>, 규장문화사 (1999),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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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전 박사님과 관련된 일화

 

 

 

박사학위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존 브라이트 밑에서 사해사본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셨다. 박사학위 과정 중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존 브라이트 박사가 김홍전 박사님에게 더 배울 것이 없으니 논문만 써 내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학위 후에 자신의 사비를 들여 구약학회 회원으로 가입시켰다고 한다.

 

또 이스라엘 정부에서 박사님을 장학생으로 모셔갔는데, 그 조건이 사해문서에 관한 논문 한 편만 남겨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홍전 박사님은 유학 가기 이전에 자신의 사상이 다 정리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나라 제1호 여권 소유자이기도 하며 음악 박사학위와 철학의 박사 학위 코스를 다 마치셨다. 다만 학위는 필요치 않아 안 받으셨다고 한다.

 

박사님은 1950년대 초 한국 교계의 신학사상 노선의 혼란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개혁주의 신앙에 관한 강설을 통해 바른 신학 노선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차이로 교단이 분립할 당시 에큐메니컬 운동의 정체에 대한 문헌과 정보를 국외에서 입수해 자유주의 경향의 WCC 노선을 바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김홍전 박사님에 대해

 

 

실제로 알려진 건 많지 않습니다. 박사학위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존 브라이트 밑에서 사해사본 연구-다니엘서를 연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정확하지 않습니다-로 박사학위를 하셨습니다. 박사학위 과정 중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존 브라이트 박사가 김홍전 박사님에게 더 배울 것이 없으니 논문만 써 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위 후에 자신의 사비를 들여 구약학회 회원으로 가입시켰다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 정부에서 그 분을 장학생으로 모셔갔는데 그 조건이 사본에 관한 논문 한 편만 남겨달라는 것이었답니다.. 실제로 김홍전 박사님은 유학 가기 이전에 자신의 사상이 다 정리가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나라 제1호 여권 소유자이기도 하시며 음악 박사학위와 문학, 철학의 박사 학위 코스를 다 마치셨습니다. 다만 학위는 필요치 않아 안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그 분의 강해 특징은 박영선 목사님의 지적처럼 설교 한 편에 신구약 성경신학이 다 정리되어있지요. 실제로 책으로 나올 때는 주제별로 모아지다 보니 아무래도 조직신학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또 성경신학 자체가 녹아져 조직신학적으로 정리되어 나와야 하니까 어쩌면 그것이 더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의 특징을 조직신학이 두드러진다 성경신학이 두드러진다 뭐 이런 말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는 것도 같습니다.. )

 

여하튼 그 분의 강설의 틀은 하나님 나라이며 그 주제 아래 모든 것이 다 정리되어 녹아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선생을 한국에 허락하심은 참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직접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시니 제가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는 캐나다의 병원에 계시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신 상태입니다.(교회에 대하여 제2권 서문에 보시면 약간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김박사님을 만나고 오신 독립개혁장로교회 목사님께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 총신에서 신약을 가르치셨던 최낙재 목사님이 이 분에게 사사하셨으며 현재 한국에는 개혁교회의 이상을 좇아 '독립개혁장로교회' 교단이 있고 김홍전 박사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소화해 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고 김박사님이 우상시 되는 것은 아니구요- 현재 성약 교회에서 김홍전 박사님의 설교를 들었던 교인들의 활동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번역가인 김기찬 선생이나 김지찬 교수님도 성약 교회 교인이셨었고 서철원 교수님도 성약 교회 교인이셨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 같은 경우는 자신의 '설교자의 열심'이라는 책에서 김홍전 박사님을 바울 이후 어거스틴, 루터, 칼빈 이렇게 손에 꼽다 보면 김홍전 박사님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거라고 하면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힐만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근데 안 유명합니다.. 뭐 그렇기에 그런 강설들에 전념하실 수

있었겠지만요) 개인적으로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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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전 목사님에 대하여!

 

 

목사님은 평생에 자신의 이름이 나는 것을 경계하셨던 분이셔서 그런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 분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이렇게 목사님을 소개하는 것도 살아계셨더면 별로 좋게 생각지 않으셨을 것 같아 망설여지지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이렇게 올린다. (끝에는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인용을 실었다.)

 

고(故) 허암(虛菴) 김홍전(金弘全) 목사 약력

(성약 출판 소식 제42호에 실린 내용임)

 

1. 생애

1914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지사리에서 김영배(金永培) 선생과 이숙정(李淑正)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

1939년 3월 28일 김가일 여사와 혼인

2003년 7월 6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안식에 들어감

 

2. 학력

1932년 3월 서울 경신학교 졸업

1950년 9월 - 1951년 5월 미국 델라웨어 주 소재 Faith 신학교에서 공부

1951년 6월 - 10월 미국 미시간 주 소재 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작곡학 연구, Symphony in D minor로 명예 음악 박사 학위 취득

1954년 9월 - 1955년 6월 미국 필라델피아 주 소재 Dropsie 대학에서 공부

(Ph. D. Candidate)

1955년 6월 - 11월 이스라엘 정부 및 The Jewish Agency 초청으로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과 중동의 문화, 사회, 인류학과 언어 등을 연구

1955년 11월 - 1956년 5월 미국 버지니아 주 소재 Union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 취득

(학위 논문: Four visions in the book of Daniel)

1956년 6월 - 1957년 5월 위의 학교에서 사해 축서(死海軸書)를 연구하여 신학 박사 학위 취득 (학위 논문: The Messiah Idea in the Dead Sea Scrolls)

 

 

3. 경력

1934년 4월 - 9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음악 개인 수업을 받음

1935년 10월 - 1937년 8월 평양에서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 박사에게 작곡학과 피아노를 배움

1935년 - 1937년 평양에서 기독교 월간지 『겨자씨』의 논설위원

1937년 9월 - 1938년 3월 군산 멜볼딘 여학교 음악 강사

1938년 4월 - 11월 일본 도쿄에서 음악 연구

1939년 4월 - 1940년 10월 평양에서 다시 말스베리 박사에게 작곡학을 배움

1940년 11월 - 1944년 3월 전주에서 음악 개인 교수 및 영생보육학원 음악 강사

1944년 4월 - 1945년 8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체의 직(職)을 갖지 못하고 심한 환난 중에 지냄

1945년 8월 - 11월 전라북도 관현악단 조직, 작곡·편곡·지휘, 9월과 11월에 두 차례 발표회 가짐

1945년 11월 - 1948년 8월 전라북도 미군정청 군정지사의 수석 고문관 및 보좌관

1949년 3월 -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편집 표준성경주석의 번역 위원(『이사야서 주석』번역)

1949년 12월 - 1950년 초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지역회에 참석, 부의장에 피선. 귀국 길에 필리핀에 들러 연합신문사 명예 이사 자격으로 당시 대통령 퀴리노 씨와 태평양 동맹 건에 대해 면담

1950년 7월 - 9월 피난 도중 국제기독교협의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제2차 국제기독교협의회 총회에 참석하여 전쟁 가운데 있는 한국의 사정에 대해 수차례 강연

1950년 9월 - 1951년 11월 미국 여러 곳에서 조국의 사정에 대해 강연 또는 라디오와 TV 방송

1951년 11월 -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극동기독교협의회에 참석, 임시 의장·헌장 기초 위원장·부의장 역임 (ICCC의 근본주의적 성향과 정치적 색채 때문에 이후 거리를 둠)

1952년 4월 - 1954년 8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출판부장 겸 월간 『복된 말씀』주간

1957년 9월 - 1960년 5월 대전 기독학관(현 한남대학) 학장 고문 겸 이사회 고문 (남장로교가 WCC에 가입하자 사임)

1960년 8월 - 1962년 9월 민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 민국일보사 해산으로 그 직위를 떠남

기 타 광동대학 재단 이사장, 극동방송 이사장, 외무부 외교자문위원회 위원 역임

 

4. 목회 사역

1963년 성경 공부 시작

1964년 1월 5일 성약교회 시작

1964년 6월 - 9월 일본 도쿄, 교토(京都), 홋카이도(北海道) 등지에서 설교와 신학 강의. 강설의 일부가 도쿄에서 일본어로 출판됨 (『복음이란 무엇인가』, 1966년)

1967년 5월 - 1970년 10월 도쿄 기독교대학 교수로 선교 사역 (성약교회와 겸임하여 6회 방문하여 사역함)

1968년 4월 일본에서 영도(榮都) 교회 시작

1974년 11월 8일 캐나다로 이주, 후에 토론토 지역 교회 시작

1978년 11월 - 1998년 1월 열 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독립개신교회를 돌보았고 세 명의 목사(김명순, 정병길, 김헌수)의 임직 절차를 주관함

 

5. 저술

『창세기와 누가복음』,『사도행전』,『신약 개론』, 전주: 복된말씀사, 1953.

『복음이란 무엇인가』, 도쿄: 생명의 말씀사, 1966.

성약출판사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찬송』,『하나님의 백성』(전3권),『사사기 소고』(전3권),『이스라엘 열왕의 역사』(전4권),『예수님의 행적』(전10권), 『교회에 대하여』(전4권)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총 63권이 출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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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신앙을 전하는 '성약 출판사'(www.sybook.org) 

 

 

역사적 개혁 신학(The Historic Reformed Theology and Faith)에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말씀의 봉사자(A Minister of the Word)인 나는 역사적 개혁 신학과 그 신앙이 우리를 얼마나 성경에 충실한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가를 늘 느끼며 안도하곤 하는데, 이것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분들의 일이 되기를 간절히 빈다.

 

이런 목적을 갖고 역사적 개혁 신학을 후대 교회에 전수하기 위하여 애쓰시는 한 출판사의 웹싸이트를 소개할까 한다. 그 곳은 다름 아니라 몇 년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 생을 다하신 김홍전 박사(명예 음악 박사, 신학 석사, 신학 박사)님의 책을 주로 펴내는 '성약출판사'이다. 성약출판사는 주로 김홍전 박사님의 녹음된 설교들을 풀어서 책으로 내고 있는데, 요즘 들어서는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서들도 펴내고 있다. 성약출판사는 역사적으로 주류의 신앙을 도도하게 이어온 개혁 신학과 개혁 신앙을 확실히 세우고 후대 교회에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책을 펴내고 있는 출판사로 김홍전 박사님의 가르침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성약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특히 그 출판사는 이미 예수님을 믿던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이 배교의 시대에 우리의 갈 길이 어디인지를 밝게 제시하고 있다.

 

"성약출판사는 독립개신교회(The Independent Reformed Church)에 속한 서울 성약교회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입니다. 성약교회는 독립개신교회 헌장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탐구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힘써 보존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서 널리 이 세대와 후세에 전하고자 1984년 12월 1일에 출판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독립개신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주류의 신앙과 그 신학을 우리들의 시대에 받은 자로서 또한 이것을 다음 시대에 이어줄 자로서의 교회이어야 할 것을 명심하고 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라고 그 성약출판사 웹싸이트의 출판사 소개란에는 잘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성약출판사의 웹싸이트를 널리 소개한다. 이 출판사의 웹싸이트는 만들어진 지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아서 많은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성경을 바르게 읽고 믿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자료들이 담겨져 있다. 이 싸이트는 도서 목록, 저자 소개, 성약 출판사[소개], 소식지, 교회 소식, 자료실로 구분되어 있는데, 독자들은 그곳에서 소식지의 여러 글과 자료실의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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