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句麗世家下
許 穆
長壽王立하여 遣使如晉하여 獻赭白馬하니 晉封王爲樂浪郡公高句麗王하다 王立十二年에 大有年하여 大享群臣하다
장수왕이 즉위하여 사신을 진나라로 보내 자백마를 바치니, 진나라가 왕을 봉하여 낙랑군공 고구려 왕으로 삼았다. 왕이 즉위한 지 12년에 큰 풍년이 들어 뭇 신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 자백마(赭白馬): 붉고 흰 색이 섞인 말.
燕王馮弘이 患魏數侵燕으로 燕國日削하여 遣使來附라 王이 遣兵數萬하여 迎燕王弘에 至遼東에 王ㅣ 勞之曰
연왕 풍홍이, 위나라가 연나라를 자주 침략하여 연나라가 날로 위축되는 것을 근심하여 사신을 보내와 래부할 뜻을 보였다. 왕이 군사 수만 명을 보내 연왕 풍홍을 맞이할 때, 요동에 이르러 왕이 풍홍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龍城馮君이 爰適野次하니 士馬勞苦라하니 弘慙怒하여 稱制讓之라 王이 處之平郭이라가 尋徙之北豐이라
“용성의 풍군이 이렇게 들판으로 나와 머무르니, 군사와 말이 힘들겠습니다.”라 하니, 풍홍이 수치스럽게 여겨 화를 내며 황제로서 꾸짖었다. 왕이 풍홍을 평곽에 거처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북풍으로 옮겼다.
* 용성(龍城): 연나라의 전왕 모용황(慕容皝)이 도읍으로 정했던 곳이다. 《국역 동사강목 제2상 임인년 11월》
弘이 其心에 素慢侮句麗하여 其所爲ㅣ 一如在國時하여 無讓於主라 國王怒하여 悉收其侍人從者하고 取其太子仁하여 爲質이라 弘怨之하여 私遣使如宋하여 求迎이라 宋ㅣ 發兵迎之한데 王이 遣將殺弘하고 其支屬十餘人을 皆殺之하다
풍홍은 자기 마음에 본래부터 고구려를 업신여겼으므로 자기 나라에 있을 때와 똑같이 행동하여 주인 나라의 왕에게 양보하는 것이 없었다. 왕이 노하여 모시는 사람과 종자를 모두 거두어 가고, 그 태자 풍인(馮仁)을 데려다 볼모로 삼았다. 풍홍이 이를 원망하여 사적으로 사신을 송나라로 보내 자기를 맞이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송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그를 맞이하자 왕이 장수를 보내 풍홍을 죽이고 그의 지속 10여 인을 모두 죽였다.
王自將伐百濟하여 殺其王餘慶하다 王立七十九年에 薨하고 太孫羅雲立하니 是爲文咨王이라 魏ㅣ 聞王薨하고 素委貌深衣로 哭於東郊라 諡曰 康이라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백제 왕 여경을 죽였다. 왕이 즉위한 지 79년 만에 崩御하고, 태손 나운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문자왕이다. 위나라가 왕이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흰색 위모관(委貌冠)과 심의(深衣) 차림으로 동쪽 교외에서 곡하였다. 시호는 강이라고 하였다.
* 여경(餘慶): 백제 제20대 개로왕(蓋鹵王)의 이름은 경사(慶司)인데 중국의 ≪송서(宋書)≫•≪위서(魏書)≫에는 여경이라 적고 있음.
* 문자왕(文咨王): 고구려의 제21대 왕(재위 491∼519). 名 라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497년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하였다. 백제,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扶餘降하다
王薨하고 太子安藏王興安立하다
薨하고 弟安原王寶延立하다
薨하고 太子陽原王平成立하다
薨하고 太子平原王陽成立하다 移都長安城하다
부여가 항복하였다.
왕이 훙하고, 태자 안장왕 흥안이 즉위하였다.
훙하고, 동생 안원왕 보연이 즉위하였다.
훙하고, 태자 양원왕 평성이 즉위하였다.
훙하고, 태자 평원왕 양성이 즉위하였다.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 흥안(興安): 안장왕(安藏王). 고구려 제22대 왕(재위 519∼531).
* 보연(寶延): 고구려의 제23대 왕(재위 : 531~545년). 이름은 보연(寶延). 안장왕의 동생. 양서(梁書)에는 아들로 되어 있다. 안장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즉위, 위왕(魏王)으로부터 고구려 왕에 책봉되어 의관(衣冠)을 받고 위나라ㆍ양(梁)나라 등에 조공하여 수교(修交)했다. 540년 백제가 침공하여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5천의 군사로 이를 격퇴하고 대외적으로는 남쪽의 양(梁)과 북쪽의 동위(東魏)와 친하게 지냈다.
* 평성(平成): 23대 안원왕(安原王)의 태자. 24대 양원왕(陽原王)의 휘(諱)이다. 양강왕(陽崗王)이라고도 한다.
* 양성(陽成): 고구려 제25대(재위:559~590) 왕.
隋開皇九年(589年)에 滅陳하니 王懼하여 治兵爲拒守計라 隋璽書責之나 王已薨이라 太子元立하니 封元爲遼東郡王하고 賜車服이라 是爲嬰陽王이라 王이 連靺鞨兵萬餘하여 攻遼大敗之하니 隋主怒하여 削王爵하고 發水陸兵三十萬하여 伐句麗라가 不利還師라 王亦上表謝하다
수나라가 개황 9년에 진(陳)나라를 멸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해서 수나라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킬 계책을 세웠다. 수나라가 조서를 보내 꾸짖었으나 왕은 이미 훙한 뒤였다. 태자 원이 즉위하니, 원을 봉하여 요동군왕으로 삼고 수레와 의복을 내려 주었다. 이 사람이 영양왕이다. 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과 연합하여 요동을 공격해서 크게 무찔렀다. 수주가 노하여 왕의 작위를 삭탈하고,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군사를 돌렸다. 왕도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 영양왕(嬰陽王): 고구려 제26대(재위:590~618) 왕. 일명 평양왕(平陽王)이라 하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준수하고 제세안민(濟世이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565년(평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평원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 수주(隋主): 수나라의 왕을 말한다. 《국역 동사강목》 〈범례 명호〉에 “중국의 정통이 없는 이는 모두 ‘모주(某主)’라고 일컬었다.” 하였는데, 미수 역시 이것을 따른 듯하다.
命太學博士李文眞하여 修國史라 隋召王入朝나 不從하다 新羅ㅣ 患句麗連年攻伐하여 遣使乞師於隋라 大業七年(611年)에 隋主ㅣ 自將伐句麗하니 衆百十三萬이나 號二百萬이라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수하게 하였다. 수나라가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신라가 해마다 거듭되는 고구려의 공격을 근심하여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대업 7년에 수주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니, 군사가 113만이었으나 200만이라고 내세워 일컬었다.
* 이문진(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의 태학박사(太學博士). 600년(영양왕 11) 왕명을 받아 국사(國史)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국초(國初)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당시 1백 권으로 편찬한 국사 《유기(留記)》를 수정ㆍ요약해서 5권으로 줄이는 일이었다. 이 요약된 국사를 《신집(新集)》이라고 한다.
八年(612年)에 大軍至遼上하니 麗兵이 阻水拒守라 以浮梁渡兵하여 大戰于東岸克之하고 圍遼東城이나 攻之不下라 將軍來䕶兒ㅣ 帥江淮兵浮海하여 入自浿水遇麗兵大破之하고 直至平壤이나 爲伏兵所擊破라 大軍遂潰하여 護兒ㅣ 僅免走還이라
8년(612)에 대군이 요수(遼水) 가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가 요수를 막아 대항하여 지켰다. 부교(浮橋)로 군사를 건네 동쪽 언덕에서 대판 싸워 고구려를 이기고, 요동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장군 내호아가 강회(江淮)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패수를 통해 들어가 고구려 병사를 만나 크게 무찌르고 곧장 평양에 이르렀으나 복병에게 격파되었다. 대군이 마침내 무너졌으며, 내호아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달아나 돌아갔다.
王ㅣ 遣乙支文德하여 僞降覘其軍한데 士卒皆飢色이라 文德이 每戰每北하여 將軍宇文述이 一日七戰七克이나 軍士飢疲하고 城堅守不得拔이라 還至滻水하여 軍半渡에 麗兵이 擊其後하여 大破之하니 及至遼東에 餘衆二千七百이라
왕이 을지문덕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여 적군의 동정을 엿보게 하니 사졸이 모두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을지문덕이 싸울 때마다 패하므로 장군 우문술이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을 이겼으나 군사들은 굶주리고 피로하였으며 성은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 없었다. 군사를 돌려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고구려 병사가 그 뒤를 쳐서 크게 무찌르니, 급기야 요동에 이르렀을 때에는 남은 군사가 2700명이었다.
隋主ㅣ 還慙無功하여 九年(613年)에 復伐句麗라 四月에 隋主ㅣ 渡遼督諸軍하여 攻遼東이라 麗兵拒하니 戰二十餘日不克한데 會楊玄感叛하여 迺引軍還이라
수주가 돌아가서는 전공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9년(613)에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4월에 수주가 요수를 건너 여러 군대를 독려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대항하여 싸우니, 20여 일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 양현감(楊玄感): 중국 수(隋)나라의 반신(叛臣). 권신 양소(楊素)의 아들로 예부상서에 올랐으나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침공 때 리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패하여 자살하였다.
十年(614年)에 復議伐句麗하여 復徵天下兵이라 三月에 至臨渝하여 禡軒轅하고 斬叛者하여 釁鼓라 時天下已亂하여 召兵多不至하고 麗王亦遣使謝하니 迺罷兵이라 徵王入朝나 不從하다
10년(614)에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고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였다. 3월에 임유에 이르러 헌원에 마재(禡祭)를 지내고, 모반한 자를 참수하여 그 피를 북에 발랐다. 당시에 천하가 이미 혼란해져서 소집한 군사들이 대부분 이르지 않았고, 고구려 왕이 또한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파하였다.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 마헌원(禡軒轅): 헌원은 중국 고대의 제왕인 황제(黃帝)의 이름으로 염제(炎帝)와 판천(阪泉)에서 싸워 이기고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에서 싸워 이겨서 천자가 되었다. 마제는 출병할 때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전쟁이 황제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승(戰勝)을 기원하여 황제에게 마제를 지내는 것이다.
唐武德元年(618年)에 王薨하고 弟建武立하니 是爲榮留王이라 王遣使入貢于唐이라 帝ㅣ 以亡隋戰士多陷於句麗하여 隋虜獲麗人을 追括遣歸하고 令句麗隋戰士在國者悉還하니 還者萬餘人이라
당나라 무덕 1년에 왕이 훙하고, 동생 건무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영류왕이다. 왕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공하였다. 황제가 망한 수나라의 전사들이 많이 고구려에 잡혀 고생할 것이라 여겨 수나라가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을 찾아 모아 돌려보내고, 고구려로 하여금 본국에 있는 수나라의 전사를 모두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송환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 영류왕(榮留王): 고구려 27대 왕(재위: 618~642). 이름은 건무(建武)ㆍ건성(建成). 영양왕(嬰陽王)의 이복 동생. 618년 수(隨)나라 양제(惕帝)가 피살되고 당(唐)나라가 서자, 다음 해인 619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꾀하였다. 622년 당나라 고조(高祖)는 살수대첩(薩水大捷) 때의 고구려 포로들을 돌려 보낼 터이니 고구려에 있는 중국 포로들도 석방해 달라는 청을 받고 이를 허락하여 서로 포로들을 교환했다. 624년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역서(曆書)를 구했고, 당 고조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淑安)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왕을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 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으로 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가서 노자(老子)의 도교(道敎)를 강론케 하여 왕 및 백성들이 청강했다. 625년 왕은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서 불교와 도교의 원리를 연구하게 하였다. 629년에는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낭비성(娘臂城) 공격이 있었고, 631년 동북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해에 이르고 장성(長城 :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했고 638년 신라 북변의 칠중성(七重城 : 적성(積城))을 침공하다가 패퇴하였다. 640년 왕은 세자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조공케 하고 자제들을 파견하여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독재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그의 손에 살해되었다.
貞觀五年(631年)에 唐이 遣使葬亡隋戰士하다
句麗築長城이라 自扶餘東南至海上히 千餘里라 十六年而成하다
十六年(642年)에 泉蓋蘇文弑王하고 立其從弟臧하니 是爲寶藏王이라 帝ㅣ 以蓋蘇文弑其君專國政으로 欲發契丹․靺鞨兵伐之라가 用長孫無忌計하여 乃止라
정관 5년에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죽은 수나라의 전사들을 장례하였다.
고구려가 장성을 쌓았다. 부여 동남쪽에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인데, 16년 만에 완공하였다.
16년(642)에 천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왕의 종제 장(臧)을 세우니, 이 사람이 보장왕(寶藏王)이다. 황제가, 천개소문이 군왕을 시해하고 국정을 독점한다 하여 거란(契丹)과 말갈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하려다가 장손무기의 계책을 써서 마침내 중지하였다.
* 천개소문(泉蓋蘇文): 淵蓋蘇文. 고구려의 장군ㆍ정치가. 일명 개금(蓋金)이다. 이는 중국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연(淵)이었으므로 이를 피하고자 고친 이름이다. 일본측 기록에는 "이리가스미"라고 있으니 이것이 원명에 가까운 것 같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동부(東部 : 흑은 서부(西部)라고도 함)의 대가(大加 : 부족(部族)의 장(長)) 및 대대로(大對盧 : 중앙 정부의 수상)가 되었다. 628년(영류왕11) 왕명으로 장성(長城)을 쌓을 때, 남녀를 막론하고 동원되어 고통이 심하였다. 성품이 호방하여 안하무인이어서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임금과 밀의한 것을 알고 642년(보장왕 1) 영류왕 이하 반대파 중신들 100여 명을 죽여 버리고 보장왕(寶藏王 : 영류왕의 조카)을 추대한 후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독재를 하였다. 백제와 함께 신라를 쳐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았으며, 643년(보장왕 2) 당(唐)나라의 숙달(熟達) 등을 초청, 도교(道敎)를 퍼뜨리고, 평양에 용언성(龍堰城)을 쌓았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니 신라의 요청으로 당나라는 고구려ㆍ신라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을 보내왔으나 그는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당나라 사신을 구금까지 하므로 당 태종은 이에 격분, 친히 장양(張亮)ㆍ이세적(李世勣)을 거느리고 644년(보장왕 3) 내침하여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과했으나 당은 듣지 않고 수차 쳐들어왔다가 모두 실패했다. 그의 사후 맏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 남건(男建)ㆍ남산(男產)과의 세력 싸움으로 남생이 당나라로 도망쳐 구원을 요청, 당나라는 이세적(李世勣)으로 하여금 668년(보장왕 27) 고구려를 쳐 드디어 멸망케 하였다.
* 보장왕(寶藏王): 고구려 제28대 최후의 왕(재위 : 642~668). 휘는 장(藏), 또는 보장(寶藏).
* 장손무기(長孫無忌): 중국 당 태종(唐太宗)의 처남. 태종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일등공신으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이부 상서(吏部尙書)•태자 태사(太子太師)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음. 고종(高宗)이 무씨(武氏)를 후비로 삼으려고 할 때 여러번 반대했기 때문에, 무후(武后)가 이에 원한을 품어 모반죄로 귀양보냄.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저서로는 ≪당률소의(唐律疏議)≫가 있음.
明年에 新羅ㅣ 以百濟․句麗共伐其國으로 乞救於唐이라 賜璽書令戢兵이나 蓋蘇文不奉詔라 貢白金却之하고 帝ㅣ 自將伐句麗라 布告天下하고 詔新羅․百濟․奚․契丹하여 共擊之라
이듬해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자기 나라를 공격한다고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전쟁을 중지하게 하였으나 천개소문이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천개소문이 공물로 바치는 백금(白金)을 물리치고, 황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려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천하에 포고하고,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 조서를 내려 함께 치도록 하였다.
十九年(645年)四月에 大軍이 皆集玄菟新城이라 李世勣은 拔蓋牟城하고 張亮은 拔卑沙하고 帝는 渡遼拔遼東城이라 降白巖城爲巖州하고 進攻安市城이라 北部耨薩延壽․惠眞이 連靺鞨兵十五萬하여 救安市城이나 大戰克之하여 延壽․惠眞降하니 收靺鞨兵하여 皆坑之라
19년(645) 4월에 대군이 모두 현도의 신성에 집결하였다. 이세적은 개모성을 함락하고, 장량은 비사를 함락하였으며, 황제는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함락하였다. 백암성을 항복 받아 암주로 삼고, 진격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북부 누살 연수와 혜진이 말갈 군사 15만과 연합하여 안시성을 구원하였으나 대대적으로 싸워 이겨서 연수와 혜진이 항복하고, 말갈의 군사를 거두어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다.
* 북부누살연수·혜진(北部耨薩延壽·惠眞): 《국역 동사강목》 제3하 을사년 5월 조에는 ‘북부 누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누살 고혜진(高惠眞)’으로 되어 있다.
安市城力戰에 日六七合하며 六十餘日이나 終不下라 築土山하여 臨城迫之나 麗兵出戰하여 奪據土山이라 帝ㅣ 督諸將하여 攻之三日이나 不能克이라 帝以遼左早寒草枯하여 士馬難久留라하여 詔班師하고 耀兵城下而歸라 城主ㅣ 從城上拜하니 帝ㅣ 賜縑百匹이라 還軍渡遼에 暴風雪하여 士卒多凍死라
안시성이 힘껏 싸우는 통에 매일 6, 7번을 교전(交戰)하면서 60여 일을 싸웠으나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토산(土山)을 쌓아 안시성에 바짝 붙여 다가갔으나 고구려 군사가 나와 싸워서 토산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3일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지고 초목이 말라 군사와 말이 오래 주둔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 조서를 내려 회군(回軍)을 명하고, 성 아래에서 병력을 과시한 다음 돌아갔다. 성주가 성 위에서 배례를 행하니, 황제가 비단 100필을 하사하였다. 군사를 돌려 요수를 건널 때에 폭풍이 불고 폭설이 내려 사졸이 많이 얼어 죽었다.
* 반사(班師):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돌아옴.
日無光三日하고 東明王塑像이 泣血三日이라 王及蓋蘇文이 遣使謝하고 獻二美女로되 不受하고 復議伐句麗라 明年에 遣牛進達․李世勣하여 伐句麗라 世勣이 破南蘇하고 進達이 拔石城이라 又明年에 遣薛萬徹하여 伐句麗라
해가 3일간 빛이 없고, 동명왕의 소상이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왕과 천개소문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미녀 두 명을 바쳤으나 받지 않고,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였다. 이듬해에 우진달(牛進達)과 이세적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이세적이 남소를 무찌르고 우진달이 석성을 함락하였다. 또 이듬해에 설만철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형상(形象ㆍ形像).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는 불상(佛像)이 찰흙으로 많이 만들어졌으며, 지금(只今)은 주로 조각(彫刻ㆍ雕刻), 주물(鑄物)의 원형(原型)으로 사용(使用)된다.
永徽六年(655年)에 遣程名振․蘇定方하여 伐句麗라 乾封元年(666年)에 遣李世勣․龐同善․契苾何力하여 伐句麗하고 又命劉仁願하여 會新羅王하여 伐句麗라 賜羅王大將軍旌節이라
영휘 6년에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건봉 1년에 이세적, 방동선, 계필하력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고, 또 유인원에게 명하여 신라 왕과 만나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신라 왕에게 대장군의 기와 부절(符節)을 하사하였다.
摠章元年(668年)에 薛仁貴ㅣ 爲前鋒하여 連戰連勝하여 遂拔扶餘하니 川中四十餘城皆降이라 時彗星이 見於畢․昴하니 許敬宗曰 句麗滅亡之兆也라하다
총장 1년에 설인귀가 전봉이 되어 연전연승하여 마침내 부여를 함락하니, 부여천(扶餘川) 중의 40여 개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혜성(彗星)이 필수(畢宿)와 묘수(昴宿)에 나타났는데, 허경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멸망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 필묘(畢․昴): 필수(畢宿)와 묘수(昴宿)니, 둘 다 28수(宿) 가운데 하나로, 백호(白虎)의 7수 가운데 필수는 제5수이고 묘수는 중성(中星)이다. 《사기》 권4 〈주본기(周本紀)〉에 “9년에 무왕이 필성에 제사를 올렸다.”라고 하였는데, 《사기색은(史記索隱)》에 “필성은 전쟁을 주관하는 별이므로 출병하면서 필성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하였다.
蓋蘇文死하고 而其子男生이 代其父하여 爲莫離支라 其弟男建逐之하니 男生이 奔國內城하여 遣其子入唐하여 爲向導世勣이라 拔大行城하고 與新羅合兵하여 伐破鴨綠栅하고 圍平壤月餘라 王臧降하고 句麗亡이라 自朱蒙氏至臧히 二十八世七百五年이라
천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다. 동생 남건이 그를 축출하자, 남생이 국내성으로 달아나 자기 아들을 당나라로 들여보내 이세적의 향도가 되게 하였다. 대행성을 함락시키고,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압록책을 쳐서 무찌르고, 평양을 한 달 남짓 포위하였다. 왕 장이 항복하고, 고구려가 망하였다. 주몽씨로부터 장에 이르기까지 28세이고 705년이다.
分句麗五部百七十六城하여 爲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이라 置安東都護府於平壤하고 留薛仁貴하여 爲都護以鎭之라 世勣이 以臧及諸王子․大對盧와 虜獲二十餘萬人으로 歸하다
고구려의 5부(部) 176성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만들었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설인귀를 남겨 도호로 삼아서 진압하게 하였다. 이세적이 장(臧) 및 여러 왕자와 대대로와 포로로 잡은 20여만 명을 데리고 돌아갔다.
* 세적(世勣):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다. 당 고종 영휘(永徽) 연간에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인 ‘세(世)’를 휘하여 이름을 ‘적(勣)’으로 고쳤다. 《舊唐書 卷67 李勣列傳》
二年(669年)에 移三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及山南․京西諸州하다 有圖讖曰 不及九百하여 當有八十大將하여 滅之라한데 高氏有國이 將八百年이요 勣(李世勣)年八十이라
儀鳳元年(676年)에 封臧爲朝鮮王이라 臧이 至遼東謀叛하여 召還徙邛州而死라 句麗之地는 沒於新羅라
2년(669)에 3만 8300가호를 강회(江淮) 남쪽 및 산남(山南)과 경서(京西) 여러 주에 이주시켰다. 도참(圖讖)에 이르기를, “구백에 못 미쳐 팔십 대장이 있어 멸할 것이다.〔不及九百 當有八十大將滅之〕”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나라를 소유한 지 거의 800년이 되었고, 이적(李勣)의 나이가 80세였다. 의봉(儀鳳) 1년에 장을 봉하여 조선 왕으로 삼았다. 장이 요동에 이르러 모반하자 소환하여 공주(邛州)에 유배하였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고구려의 땅은 신라에 흡수되었다.
贊曰 周禮에 幽州한데 其山鎭曰 醫巫閭요 其下에 遼東玄菟라 句麗朱蒙氏ㅣ 邑於卒本扶餘하니 在玄菟之域이라 雄健桀驁하여 撫有諸部諸傍國하며 弱者兼之하고 亂者滅之라 拓地千餘里하여 傳三十君七百餘年하니 可謂盛矣라
찬왈 《주례(周禮)》에 유주(幽州)가 있는데, 유주의 진산(鎭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의무려 아래에 요동과 현도가 있다. 고구려의 주몽씨가 졸본부여에 도읍을 정하니, 이곳은 현도의 영역이다. 주몽은 웅건(雄建)하고 걸출하여 여러 부락과 여러 이웃 나라를 무마하였으며, 약한 나라는 겸병하고 어지러운 나라는 멸망시켰다. 땅을 1000여 리가량 넓혀 30명의 군왕에 700여 년을 전하였으니, 성대하다고 이를 만하다.
其俗은 雜肅愼․鮮卑․靺鞨하며 引弓強戰하니 以攻伐興하고 以攻伐亡이라 然이나 其壤界ㅣ 接於禹貢冀州中國之地하여 而實箕子之國이니 其民質實하여 有大國之遺風이러라
풍속은 숙신ㆍ선비ㆍ말갈의 풍속이 섞였으며,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전쟁에 강하였으니, 정벌로 나라를 일으키고 정벌로 나라가 망하였다. 그러나 국경이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나오는 중국 땅 기주(冀州)에 접해 있어 사실상 기자(箕子)의 나라인 셈이니, 백성이 질박하고 실질적이며 대국의 유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