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까지마(中島) 3월 학부모 총회가 끝나고 학부모 상담 주간이 시작되었다. 매년 하는 상담이라 올해도 아이들에게 상담 신청 용지를 나누어 주고 희망자만 제출하도록 했다. 맞벌이 가정이 많은 동네라 상담 신청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학기 초라 담임 얼굴 한번 보려는지,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린다는 이야길 하려는지, 공부에 관심 없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싶은지 몇 건의 상담 신청 용지가 들어왔다. 신청한 학생의 이름과 찾아오실 학부모님의 성함, 날짜, 시간 등이 적힌 신청 용지를 작은 사무용 집게로 집어 책상 구석에 다른 서류들과 함께 쌓아 놓았다. 아이들이 좀 쑤시는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쉬는 시간을 쪼개 컴퓨터로 잡무를 보고 있는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선생님 손잡고 흔드는 녀석, 일 못 보게 컴퓨터 화면을 가리는 녀석, 뒤에서 안마해주는 기특한 녀석, 칠판에 못생긴 그림 그리면서 선생님이라고 놀리는 녀석들 사이로 몇몇 녀석들은 책상 한 구석에 쌓여진 서류들을 구경한다. 선생님은 수업만 하는 줄 알았는데 뭐를 잔뜩 쌓아놓고 회사원처럼 처리를 하고 있으니 나름 신기해서 이게 뭔가 구경하나보다. 종이를 들춰보다가 한 아이가 상담 용지 뭉치를 찾고는 우리 엄마 상담 오기로 했다며 전혀 자랑할 일이 아닌 일로 괜히 으쓱해하며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곤 또 누가 오나 종이를 뒤적였다. "우리 엄마 원정희, 세인이 엄마 김영숙, 동영이 엄마 이윤희, 승진이 엄마 심윤진..." 그거 조심히 놔두라고 말하는 내 얘기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신청 용지의 친구들과 엄마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넘기던 현준이는 다음 장을 펼치며 경호 엄마... 어? 소리를 낸다. 그러고는 옆에 놀고 있던 경호에게 "경호야, 너네 엄마는 왜 나까지마야?" 한다.
경호는 다문화 가정에 산다.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나까지마란 성을 가진 일본인이다. 사실 경호의 누나도 재작년에 내가 맡은 반 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일본인인 것은 알고 있었고 학교 일 때문에 몇 번 오셨을 때 얼굴을 뵌 적도 있었다. 한국말도 곧 잘 하시는 편이고 아이에게도 관심이 많으셔서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은 편이었고 경호도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라 남들과는 다른 가정 사정이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정도면 아이들에게도 친숙한 면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니까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기보다는 신기해하는 정도일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경호는 얼굴이 붉어지며 당황했다. 친구의 말에 선뜻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경호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는 아이들에게 수업시간 됐는데 아직도 수업 준비 안하고 뭐하냐며 크게 한마디 했다. 아이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놀다가 놀라서 벌떼처럼 움직이다가 이내 수업 준비를 하곤 차분하게 앉았다. 경호도 다른 아이들처럼 차분히 앉아서 짝꿍하고 조용히 소소한 잡담을 하는 것을 보니 그새 별 신경 안 쓰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 경호 누나가 생각났다. 경호 누나가 방학을 앞두고 방학 때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간다며 자랑을 하는 데 옆에 있던 아이들이 일본 가냐며 부러워했다. 그러고는 친척이 일본인이면 너도 일본어 잘하겠다며 일본어 한번 해보라며 부추겼다. 교실에 재미있는 일 없는지 항상 눈에 불을 키고 다니는 다른 아이들이 너도 나도 순식간에 경호 누나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도 경호 누나가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가고 한번 들어보고 싶기도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경호처럼 얼굴이 붉어지며 못한다고 이야기 하곤 휙 그 자리를 피해버렸었다. 그때는 그냥 친구들의 관심이 쑥스럽구나 싶어 말았는데 오늘 경호도 그러는 것이었다.
경호도 그렇고 경호 누나도 그렇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그들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두렵기까진 안 하더라도 분명 불편해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필시 이 아이들이 긴 세월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 세월 속에서 이 아이들의 인생에 그런 두려움, 또는 불편함을 갖게 한 시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대상은 친구였을 수도 있고 선생님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과 조금 다른 면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불편한 시선, 불편한 말, 불편한 기운을 주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시선을 삶 가운데 종종 느끼며 살아왔고 남들과 다른 것을 자랑하며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아이들 속에 섞여 있고 싶었을 것이다. 특별해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찾아보게 되었는데 나까지마(中島)란 성은 문자 그대로 풀면 강이나 못 가운데 있는 섬이라고 한다. 푸른 강물 사이로 멋진 고목과 잡초를 품고 떠있는 그런 섬. 한번 느긋하게 여유나 부려보고 싶은 그런 섬이 떠오른다. 하지만 경호와 경호 누나는 남들에 의해 그런 섬으로 보내졌는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살아오면서 남들의 말, 행동들, 나와 다르게 여기는 그 시선들이 그런 외로운 섬으로 그들을 보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 아이들에게는 그 섬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슬픈 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들을 외로운 섬으로 보낼만한 이유를 감추고 살아가면서 굳건한 육지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뿌리 내리고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경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리를 중시한다. 그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것을 좋아한다. 중간만 해. 너무 튀지마.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흔한 말들은 우리 사회의 이러한 일면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조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조화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속하고 있지만 뭔가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갖게 된다. 그 시선들이 모이면 그 시선들을 받는 어느 누군가는 경호처럼 외딴 섬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그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는 외딴 섬에 버려지기 싫어 자신이 가진 다름을 감추거나, 버리거나, 포기하게 되고 그 속에 녹아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리에 속한 사람들 역시 자신이 뭔가 다른 것을 가질까봐 두려워하며 무리 속에서 변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무리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뉴스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다.
[ 바나나는 왜 유독 멸종 위험에 쉽게 처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 세계의 바나나가 유전적 다양성이 없는 한 바나나의 복제품들이기 때문이다. 캐번디시라는 이 품종은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품종의 9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바나나가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세계식량농업기구는 20년 이내에 캐번디시가 사라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1845년 아일랜드 감자기근도 단일 감자 품종만 재배했다가 한 질병에 걸리자 모든 감자가 죽어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
우리 사회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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