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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룡의 <징비록>과 더불어 오희문의 <쇄미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3대 기록물로 꼽힌다고 한다. 양반의 신분으로 피난길에 올라, 전란의 기간 동안 직접 겪은 경험들을 일기 형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지닌 의미는 적지 않다고 하겠다. 전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부터 전란이 끝난 1601년까지, 약 10년 간에 걸쳐 기록한 그의 일기는 당대 사람들의 구체저인 삶과 갱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것이다. 일기의 제목이기도 한 <쇄미록>은 <시경>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기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실제 책 내용에는 전란 과정에 가족들과의 헤어짐과 만남은 물론 식량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등이 그려지고 있다. 저자가 전란의 현장을 직접 마주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은 풍문이나 관의 문서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즉 '이 책은 전투가 벌어지는 실제 현장의 생생함은 없지만, 당시 후방의 삶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소상히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양반으로서 개인적인 친분과 다양한 인맥을 통하여, 관리들과 주변의 양반들로부터 양식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당대 민중들의 삶과는 다른 것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피란 중에도 노비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통해 농사를 짓거나 편지를 전하는 등의 생활을 꾸려가고, 때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가는 노비들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척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필사본으로 기록된 <쇄미록>의 전체 분량은 모두 7책으로 1,67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필사본을 한글로 번역한 것도 모두 6권이나 되는데, 이처럼 방대한 저작을 한 권으로 압축하여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양반이라는 신분과 그의 인식이 짙게 반영되어 당대 민중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선을 통해 양반과 노비 그리고 주변 민중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 개인의 기록이지만, 그 내용을 통해 16세기 후반 조선 사회의 삶과 문화를 그려볼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일별했을 때 전란 초반에는 전란의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이 잘 드러나고 있지만, 차츰 자신의 삶과 가족들의 문제 그리고 식량과 지인들과의 관계에 초점이 옮겨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종종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과 힘든 상황을 토로하고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삶이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조선시대 양반들의 일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전란 기간 중이라고는 하나, 양반들의 일상적인 삶의 면모가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저자는 전란이 일어나기 전해(1591)에 외거노비들의 신공을 받기 위해 길을 떠나, 전쟁이 발발했다는 말을 듣고 외지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고 함께 살거나 서로 왕래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간혹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과는 멀리 떨어진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 노비를 부리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모습이 오히려 부각되고 있다. 빈번하게 궁핍한 실정을 표출하기는 하지만, 관청이나 다른 양반들로부터 먹거리와 다양한 물품을 지원을 받는 등 나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란 초기에는 전쟁에 대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그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피난 생활이 길어지면서 간혹 전쟁에 대한 풍문이나 다른 기록을 통해 소개하고 있지만, 대부분 일상을 영위하는 양반들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제사를 지내고, 자식들의 혼사를 치르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근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오희문의 생활을 보면서 조선시대 양반이란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 권력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1년의 기록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각 항목 말미에 '함께 읽는 쇄미록'이란 난을 만들어 오희문의 일기에 나오는 당시의 상황을 소개하는 것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기록의 말미에는 '오희문이 기록한 임진왜란의 실상'과 '오희문의 가문, 그리고 가족 관계' 등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3년의 기록 말미에는 '외가, 처가와도 깊은 관계를 맺다'와 '전란의 또 다른 공포, 전염병'에 관한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마지막 항목에서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의 여정’까지 모두 15개의 항목으로, <쇄미록>을 통해서 확인하거나 유추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조선시대 양반들의 생활상과 양반 문화의 실상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대의 민중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양반들의 위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란 중에 대가족을 이끌기 위한 가장의 처지로서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지켜야한다는 저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피난의 와중에서도 농사를 짓거나 매사냥을 통해 사냥거리를 얻는다든지, 벌통을 놓아서 양봉을 하고 누에를 치는 등의 부업에 신경을 쓰는 모습들이 이채롭게 느껴지기만 했다. 특히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해 노비들이 도망가거나,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태업을 하는 모습에 대한 저자의 반응은 전형적인 양반의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들의 잘못을 징계한다는 이유로 매를 때리거나 가두기도 하고, 때로는 관가에 고발하여 죄를 묻는 등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예라 할 것이다.
전란의 와중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가까운 지인들이 연루되어 잡혀가고 플려나는 상황을 서술하기도 하고, 전쟁 막바지에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운 심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흔히 호랑이에게 물리거나 죽음을 당하는 등의 일을 ‘호환(虎患)’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산중 혹은 산과 가까운 벽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다보니 호랑이가 직접 나타나는 모습을 자주 보았던 것 같다. 특히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5대조 이래로 과거에 급제한 사실이 없음을 서술하면서, 이를 기화로 자신의 자손들이 창성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는 이 기록들을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 정착했던 시기까지 약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남겼다. ‘이후로도 종이도 다 되어 그만 쓰기로 했다. 또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으로 그의 일기는 마무리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일기는 임진왜란이라는 특별한 사건으로 인한 일상이 정상적으로 영위되지 못하는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두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당시의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반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이처럼 방대한 기록을 온전히 전하고자 했던 그의 후손들의 노력도 충분히 인정되어야만 할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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