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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1일
어제 동태찌개와 돌김이 맛이 있어서 저녁을 잘 먹고 10시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났는데 늦게까지 컴퓨터를 한 아들은 언제쯤 들어가서 잤을까. 아침 9시가 되어 청국장으로 아내와 식사를 하는 중에 딸이 나와서 자리를 했고 아들은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 슬그머니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나 엄마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는 아들이 야속하기만 하고 그런가하면 그런 아들에 대하여 대응을 못하는 나도 문제가 많은 무능력한 사람이다. 대화가 전혀 안 되니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모르겠고 금방이라도 폭력이 나올 것만 같은 불안한 시간을 날마다 보내고 있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이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돌아가는 과정이라더니 젊은 날부터 50대가 된 지금까지 색깔만 다를 뿐 삶의 어려움은 항상 함께 하고 있다. 10시30분에 아내와 안산에 올랐다가 대화를 하는 중에 아들에 대한 의견이 달라 따로 산행을 했는데 평소에 생각이 다르기는 했어도 산에서까지 충돌이라니 안타까운 우리의 시간이다. 12시30분에 내려와 점심을 하고 신설동 1층 새로운 세입자가 인테리어를 한다기에 나가서 만나보니 계약자 남편과는 다르게 예의가 깍듯하고 능력이 있어 보이는 의류디자이너 여성이다. 오후에 요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내다가 저녁에는 남영동으로 가서 미성회관 탕수육을 먹으며 일요일 저녁을 보냈다.
2일 6시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아침을 맞이했는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리고 컴컴하다. 새로 시작하는 2월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졸업식 등 어수선한 시간으로 금방 지나버리는 짧은 달이다. 1달 정도의 긴 방학을 마치고 오늘 개학하는 딸은 더 크고 생각도 깊어진 뒷모습이라 대견스러워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겨울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고집불통 아들과는 분명 대조적인 모습이다. 1월 말이 토요일이고 어제가 일요일이어서 오늘이 공과금 납부 마지막 일이라 아내 통장에 3백만 원을 입금을 했더니 그래도 1백만 원이 부족하다며 딸에게 빌린다고 한다. 내가 오후에 처리해 준다고 기다리게 하고 체육관으로 나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들은 아직도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정릉을 거쳐 학원에 오후 2시에 들어갔더니 학생들이 개학을 하여 수업이 어수선한 마당에 수학선생까지 운동을 하다가 다쳤다고 결석을 통보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강사들은 유독 아프거나 다치는 사람이 많아 어느 학원에서나 운영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난감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형한테 전화가 왔는데 직장 내시경을 받아보니 종양이 있어 목요일에 수술을 한다고 하여 놀랐는데 10분 정도로 용종을 제거하는 정도라고 하여 안도했다. 성인이라면 흔하게 있는 것이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암으로 변해갈 수 있다니 나도 시간을 내어 검진을 받아 보아야 할 것 같다. 8시에 집에 와서 보내는데 컴퓨터 하다가 텔레비전을 보는 아들은 저녁 시간 내내 한마디 말도 없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다.
3일 6시에 일어나 오늘은 신설동 2층에 보낼 내용증명을 작성했다. 옥상 물탱크가 얼어 급수대의 물이 나오지 않았다면서 임대료를 줄이겠다고 떼를 쓰며 2개월 이상 미납하고 있다. 기온이 낮아 일시적으로 그런 것이고 화장실 쪽 물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영업에는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3층이나 2층 세입자들은 자존심도 없는지 남의 건물 사용하면서 어차피 줄 임대료에 대하여 구차하게 변명을 하며 별 문제를 다 들고 나온다. 딸이 학교에 간 뒤에도 아들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아 혼자 식사를 했는데 함께 앉아 본 시간도 오래되어 가물가물 할 정도다.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으려고 집에 들어오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아들은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간다. 옆에서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내도 별다른 반응이나 대책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나와 함께 부모로서 자격이 미달되는 사람이다. 아내는 자기만의 생각이나 입장이 있겠지만 내 눈에는 자식교육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엄격하지 않아 나로서는 늘 불만이 많다. 같은 상황도 관점이나 생각하는 입장이 달라 대립이 생기는 것이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판단이나 교육이 옳다고 보고 있으니 뭐라고 지적을 할 수도 없다. 비가 오면 좋다는 사람과 싫다는 사람이 있고 8시에 일어나는 사람에게 부지런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으르다고 꾸짖는 사람도 있다. 다만 생각의 정도나 깊이가 같고 바라보는 방향이 같다면 살아가는데 훨씬 부드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학원에 도착하여 바로 요양원으로 가서 어머니 옆에 앉아 평소 좋아하시는 노래 6곡을 불러드렸더니 옛날 생각이 난다며 좋아하신다. 다시 돌아온 학원에서는 건물주의 통보가 임박했는지 장원장이 바쁘게 서성대고 있고 저녁에 집에 와서는 지난 번에 이어 또 주문한 과메기가 구룡포에서 도착하여 아내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일찍 잠이 들었다가 새벽 1시가 되자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린다고 아내는 일어나 거실에 나가고 시간이 더 지난 새벽 2시에 아들이 왔다. 잠자는 시간이 부족하여 학교에 가면 졸다가 하루를 망칠 것이 뻔한데 이것이 무슨 효과적인 방법인지 건강이나 내일의 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학교 학생을 새벽 2시에 보내는 학원장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4일 어제 학원에 간 아들이 새벽 2시에 들어와 깨었다가 다시 자려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TV를 보다 간신히 잠이 들었고 딸이 학교에 가는 8시에 일어나 다시 거실에 나왔다. 늦게 들어온 아들은 당연히 잠을 자는데 이런 식으로 하다가 학교에 가면 결코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밤과 낮이 바뀌는 생활이 될 것이다. 오전에 안산을 올라 상쾌한 마음으로 정상을 돌며 산악회 운동장에서 기구운동을 하고 12시 30분에 집으로 왔더니 동사무소에 영어를 배우러 간 아내는 소식이 없고 아들도 기척이 없어 닭국물로 혼자 식사를 했다. 1시에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도착한 요양원에 오늘은 실습을 나온 간병인들이 많아 가는 곳마다 북적거린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시간을 보내며 노래를 불렀는데 어머니와 옆에 있는 간병인이 잘한다고 계속하여 칭찬을 보낸다. 오후에 학원으로 가서 고등부 강의를 열심히 하고 저녁에 우리 집에 영식이가 온다고 하여 아내에게 동태찌개와 과메기를 준비하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영식이의 일정이 생겨 만남이 미루어졌고 수업을 마치고 온 내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는데 아들이 불쑥 나오더니 사정을 볼 것도 없이 과메기를 먹고 또 들어갔다. 그나마 오랜만에 식탁에 함께 앉아 본 시간이었는데 배가 고파서 아무 생각없이 나왔는지 아니면 잠결에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5일 새벽 3시에 화장실을 가려고 거실에 나오니 전화가 있는 민경이 방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잠도 안 자고 집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보나마나 여자 친구가 아닐가 짐작이 된다. 상대를 불문하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전화를 하다니 이런 정신으로 생활을 어찌 할 것인지 한심스럽고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들로 인하여 잠을 설치고 7시에 거실에 나와 신문을 보고 컴퓨터를 하며 보내다가 8시에 식사를 했다. 아내가 닭국물에 닭다리를 많이 넣어서 아침부터 부담이라고 했더니 이제는 국물만 그대로 놓았다. 쪽파라도 좀 썰어 넣으면 보기도 좋고 맛도 더 난다고 했더니 그제야 재료를 새로 준비한다. 대화는 말 자체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유추해서 행동하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시 한편을 수업해도 눈에 보이는 글자만 읽는 밋밋한 과정보다 숨어 있는 상징과 함축적인 내용이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매사에 사람이 섬세하고 부드러우면 좋고 음식도 같은 값이면 보기가 좋고 먹음직스런 것을 원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같은 맥주라도 맑은 유리컵에 먹는 것하고 노란 컵에 소변같은 느낌으로 마시는 것 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평소처럼 오전에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나의 키가 170이고 체중은 항상 변함없는 64킬로인데 키에 비례하여 알맞은 체중이라고 해도 67킬로는 되어야 좋을 듯하다.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왔는데 아내는 논술학원에 갔고 아들은 이제 일어났는지 부스럭거리며 거실에 나온다. 학원에 2시에 왔다가 5시경까지 수업을 하고 오늘이 목요일이라 용종을 제거한다는 형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다음 주 목요일로 연기가 되었다고 한다. 밤에 집으로 들어오니 엊그제 새벽까지 전화를 한 아들로 인하여 아내가 민경이 방에 있던 전화를 안방에 가져다 두었다. 현재 우리 집은 아들과의 큰 전쟁이고 거실에 있는 컴퓨터나 TV도 곧 안방으로 옮긴다는데 갈등이 쌓여가는 이 싸움이 끝나고 우리도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6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밥이 완전히 익지 않은 채 8시에 식사를 했다. 서두르다 보니 생긴 일이고 조금만 일찍 일어나 여유를 가지면 정성이 담긴 식사가 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쉽지 않은가 보다. 사랑의 기본 조건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희생이 아닌가 하는데 아내와는 15년을 넘게 살았지만 습관이나 사고방식이 같지 않아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할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개방적이며 단순해 보이는 아내와 내성적이고 꼼꼼하고 보수적인 내 성격과는 색깔이 다르지만 양쪽 누구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앞으로 살아온 만큼 15년의 세월이 더 흐르면 조금이나마 중화되는 삶의 모습으로 변해갈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오전에 TV를 시청하는데 유명한 개그맨 최양락, 이봉원, 김정렬 등이 40대 후반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국민들이 알아주는 인기인들이라 화려한 삶을 영위할 것 같은데 그들에게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있어 현재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어려운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재기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 역시 열심히 살아가리라 다짐을 했다. 체육관으로 걸어가서 운동을 하고 편리한 문명의 덕분으로 동사무소에서 대학교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입시와 관련된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특강 강사로 출강을 해볼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장원장은 소송을 하는 건물주에게 기한을 연기하려고 애쓰지만 2억 원의 보증금 중에서 임대료 미납이 9천만 원이고 남은 금액이 1억이라 소송기한 6개월을 감안하면 건물주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어수선한 마당에도 장원장은 고등부 수강료를 입금했고 수학선생은 다음 주부터 일주일간 수술을 받는다고 통보해 와서 대책을 세우며 일정을 마쳤다. 저녁에 정식이가 학원을 방문했고 함께 목동으로 이동하여 우현이를 만나 낙지전골로 식사를 했다. 이쯤에서 집으로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기어이 화곡동까지 옮겨가 형준이를 만나 새벽이 되어 집에 들어온 절제를 못한 오늘의 시간이다.
7일 새벽에 택시로 집에 들어왔고 아침에는 된장찌개로 식사를 했다. 나도 그렇지만 심야영화를 보고 온 아내와 아들도 새벽에 왔고 결국 어제부터 집은 딸이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것보다도 평소에 대화도 안하는 아들이 무슨 생각이 들어서 엄마와 영화를 함께 보고 왔는지 의아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오전을 누워서 보내다가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점심으로 떡국을 먹고 오후 2시에 집을 나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어제 음식을 먹었던 목동으로 갔다. 우현이가 어제 낙지 연포탕을 샀는데 싱싱하고 맛이 있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승용차를 식당에 두었기 때문에 가지러 간 것이다. 목동에서 내부순환 도로를 달려 요양원에 들어서니 4시가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반기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시간을 보내면서 어머니의 등과 팔 다리를 주물러 드리니 시원하다 하시고 형수께서 식사 전에 들어와 자리를 교대하고 나왔다. 학원에 도착하여 수술을 한다는 수학선생을 대신하여 국어로 보충을 하고 집으로 와서는 아내가 끓인 된장찌개로 저녁식사를 했다. 어제 잠도 못 자고 속이 텅빈 마당에 따뜻한 찌개를 먹으니 시원하고 좋긴 했는데 대화가 없이 혼자 먹는 밥이라 남의 집에 있는 것처럼 서먹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8일 일요일 새벽에 컴퓨터를 하며 아침을 보내고 9시가 되어 아침식사를 했다. 영식이가 오전에 구의동 아차산에 오른다고 동행을 요구했지만 조용히 혼자 산행하는 것이 좋아서 응하지 않았다가 혼자 북한산 백운대까지 6시간 산행을 하려고 10시에 집에서부터 단단히 다짐하고 길을 나섰다. 일요일 포근한 아침에 집을 출발하여 홍제역 부근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구입하고 유진상가를 지나 벽산아파트 뒤를 통과하여 올랐다. 여기가 초입인데도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아 속도를 내지 못하여 2시간 30분이나 지나 사모바위 정상에 이르렀고 잠깐 쉬다가 다시 1시간을 걸어 가파른 절벽 철 난간을 붙들고 대남문을 넘어 대성문에 도착했다. 백운대 정상을 목표로 나왔는데 4시간 가까이 걷다보니 배가 고프고 지루하여 보국문에서 오른쪽 칼바위 능선으로 방향을 틀어 컵라면과 떡으로 점심을 먹었다. 다시 1시간을 걸어서 정릉 청수장으로 내려와 시내버스를 타고 유진상가까지 도달한 오늘 5시간의 보람있는 산행이었다. 걸어서 무악재 방향으로 오면서 동네에 있는 일품향 중국집으로 들어가 짬뽕을 사먹고 나른한 몸으로 집에 들어오니 방에는 아들과 딸이 있고 거실은 조용하다. 밤 8시경에 논술을 마친 아내가 삼겹살을 사 와서 오늘도 말 없이 저녁을 먹고 또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9일 단잠을 자고 있는데 밖이 시끄러워 들어보니 아들이 지금 학원에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새벽에 와서 걱정을 했는데 오늘도 2시가 되어 왔으니 어찌 하겠다는 것인지 잠을 제대로 못자면 건강도 해치지만 하루 일정이 망가져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가르치는 수학선생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 없는 사람같은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앞으로 학원을 계속 다니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자다가 깬 아내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책을 읽고 나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몇 시간을 보내다 아침을 맞이했다. 2학년 마무리를 하며 봄 방학을 앞둔 아들은 예상했던 대로 오늘 아침 늦잠으로 식사도 못하고 눈을 부비며 현관문을 나간다. 나는 어제 산에 다녀왔기 때문에 오늘은 체육관으로 가서 기구운동을 마치고 차를 몰고 학원에 들렀다가 요양원에 가서는 노래를 부르며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학원으로 다시 들어오니 카운터에서 업무를 총괄하며 사무를 보는 사무장이 아침에 갑자기 뇌 부위에 이상이 생겨 입원을 했다고 한다. 날마다 업무에 신경을 쓰고 거기에 스트레스가 발생하여 병이 났는데 살다보면 누구나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길 수 있다. 9시에 집에 들어오니 식탁에 앉아 있는 아들이 멀뚱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 오늘도 내가 먼저 인사를 할 처지가 되었다.
10일 새벽 1시에 아내가 텔레비전을 켜는 바람에 잠을 깨어 뒤척이면서 새벽 4시까지 보내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에 아들의 학교가는 소리에 거실로 나왔다. 8시에 아침식사를 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우중충하게 흐리고 안개가 잔뜩 끼어 마음조차 우울하고 어두워져 식사를 마치고 바로 체육관에 나갔다. 땀을 흘리고 샤워까지 마치니 한결 몸이 가벼웠고 오늘 신설동 1층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는 날이라 서둘러 차를 몰고 가서 인사를 나누고 공과금 등을 안내하였다. 곧바로 요양원에 가서는 어머님께서 평소에 자주 부르셨던 백마강, 고향무정, 나그네 설움 등 옛날 노래 6곡을 어제처럼 구성지게 불렀는데 오늘은 더 잘했는지 노래자랑에 나가라는 말씀까지 하신다. 요양원에서 학원으로 가는 중간 고려대 근처에서 점심을 사 먹고 저녁수업을 하러 강의실에 들어서니 오늘이 고등학교 졸업식이라 다른 날에 비하여 결석생들이 많다. 일부 출석한 학생들에게 축하의 의미로 김밥과 튀김을 사 주고 수업을 종료하니 8시가 지났다. 집으로 9시에 돌아와 된장찌개로 저녁식사를 하는데 거실은 여전히 냉냉했고 10시경 들어가 잠을 자다가 중간에 눈을 떠 보니 아내는 거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11일 새벽에 일어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견본을 보려고 했는데 컴퓨터 실력이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얼마 전 동사무소에서 받은 성적표도 그렇지만 일선 고등학교 특강교사나 공무원학원에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 8시에 밥도 못 먹고 슬그머니 학교에 가는 아들과 잠 때문에 식사를 늦게 준비하여 아들을 굶긴 아내에게 동시에 화가 났다. 욱한 마음에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아침부터 따라 마셨더니 취하기도 하지만 젊은 날 철저하고 독립성과 정신력이 대단했던 내가 왜 이런 꼴로 변해 가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사도 거르고 안방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아무도 없어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운동을 마쳤다. 곧바로 신설동으로 나가서 새로 들어온 1층 세입자와 계약서를 마무리하고 중도금으로 900만원 먼저 받고 나머지 잔금은 이번 달 하순에 처리하기로 합의를 했다. 점심을 사 먹고 학원에 들어와 경기학원에 장원장과 동업 차원에서 많은 자금을 투자한 유하영 선생을 만나 운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많은 유선생이 장원장과 친분을 내세워 많은 금액을 학원에 투자하고 이득금을 비율로 가져가는데 요즘은 실질적인 이득이 없고 학원도 존폐의 위기에 있으니 안절부절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저녁에 유선생과 밖으로 나와 학원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했고 택시비도 하고 과일을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가라고 용돈을 주어 보내드렸다.
12일 어제 늦게 들어왔고 오늘 아침에는 고등어 김치찜으로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맛이 있는데 이런 경우 요리하는 실력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김치가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전에 잠깐 자고 체육관에 가려다가 학원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갔더니 강사료를 받지 못하고 얼마 전에 그만 둔 선생이 학원 통장에 압류를 걸어서 자금 회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화가 나서 당사자 선생에게 전화하여 목소리를 높였고 그것도 모자라 전화를 내동댕이치듯 던지고 종암동 극동아파트 그의 집까지 쫓아가 옥신각신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나도 깐깐하고 독하여 선생의 집까지 쳐들어간 것인데 돌아온 나를 보고 장원장은 놀라서 말도 못하고 서 있다. 동생 정환이가 운영하는 학원통장과 카드기를 이용하려고 통화를 하여 우리 수강료가 정환이네 쪽으로 입금되면 다시 경기학원 통장으로 이체해 주는 방식을 이야기 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고 또한 번거로운 일이라 미안했는데 동생이 흔쾌히 부탁을 들어 주어 고마웠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어제 정지된 학원통장이 다시 작동이 된다고 하여 없던 일이 되었고 오전에 찾아간 선생에게 오늘 중으로 해결해 놓으라고 윽박을 질렀더니 그 사이에 풀었는가 싶다. 오후에 강의를 마치고 생각하니 작년에는 많이 힘들었는데 그나마 요즘은 강의도 하고 내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오늘 기온이 영상 10도를 오르더니 오후에 빗방울이 떨어져 겨울의 끝지점으로 시간은 흐르고 저녁에 삼각지로 가서 영식이와 대구탕 등으로 식사를 하고 늦게 들어왔다. 밖에서와는 달리 집에만 오면 차갑고 썰렁하여 아들 방에 들어가 내 삶을 원망하며 한참을 울다가 나왔다. 나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들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고 30분 후에 나오니 아내가 잠자는 아들을 방해했다 구박을 하여 나도 불만을 표출하였다. 아내는 술 조금 마시고 일찍 들어오라는 일상적인 대화를 했을 것인데 나는 나대로 그것조차 서운하고 화가 날 지경이었다.
13일 잠도 안 자고 새벽에 그대로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려서 택시를 타고 일단 성북동 학원 근처로 가자고 해놓고 잠이 들었다. 기사가 깨워 눈을 뜨니 새벽 4시30분이 되었고 다니는 사람이나 차량도 없는 싸늘한 2월의 거리에 내려섰다. 24시 해장국 집에서 식사를 하고 5시가 지나서 사우나에 들어갔는데 술에 취하고 비에 젖고 눈이 부은 내 모습을 카운터 주인이 한참을 바라본다. 사우나에서 억지로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 11시에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비가 내려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된장찌개를 사 먹었다. 어제부터 술 마시고 다투고 잠 못자고 하루를 보내는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최악의 날인데 이 와중에 어제 학원에 둔 자동차까지 펑크가 나서 정신없이 수리를 했다.
14일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도 컨디션이 나쁘다. 어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비를 맞고 다녔으니 당연한 현상이고 이제는 몸살이 날 것 같은 느낌이다. 신문을 보고 밥을 조금 먹고 아침을 보내다가 일단 체육관으로 나갔는데 오늘 같은 주말에는 한산하고 여유가 있어 좋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는 마트에 들러 라면을 몇 개 사 가지고 들어와 점심으로 해결하고 오후에 어머니를 뵈러 출발했다. 집을 나오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들에게 1달 전에 압수한 핸드폰과 매월 지불하는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 15,000원까지 함께 주었다. 아들에 대하여 내가 강요하고 강제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제는 자신이 판단하여 바른 길을 가야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을 나왔는데 내 삶이 불안정해서든 또는 성격에 모순이 많든 아들을 많이 이해 못하는 내가 아버지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요양원에 갔다가 학원에 들어가니 장원장과 차량기사 간에 갈등이 생겨 그것도 내가 중재하여 해결했는데 수모를 당하는 장원장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오늘이 발렌타이 데이라고 거리의 가게마다 초콜릿이 쌓여 있어도 나로서는 감각이나 관심도 없었는데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는 중에 딸이 초콜릿을 가져왔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이 던지다시피 놓고만 가기에 누구의 심부름으로 가져온 것인가 아니면 누구에게 주라는 것인가 어리둥절 착각을 했다.
15일 새벽에 일어났지만 식구들은 계속 잠만 자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밥을 만들고 김치를 찜으로 해서 식사를 먼저했다. 김치를 양념이 없게 물에다 약간 행궈서 물을 조금 붓고 참기름을 하여 밥에 찌면 맛이 일품인데 어릴 적에 가마솥에 김치를 넣고 찜을 해 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아침식사를 마쳤는데도 아내는 일어날 줄을 몰라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젖히자 그제야 몸을 일으킨다. 오늘 영식이와 그의 아들 혁준이랑 스키장에 함께 가기로 했는데 서로가 시간이 어정쩡하여 다음으로 미루었다. 약속한 것은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요즘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것 같으니 반성의 시간도 필요하다. 영식이는 덕소 부근에 있는 산에 간다고 전화가 오고 나는 산에 가는 것도 체육관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차를 몰고 학원으로 나갔다. 지인이 참고서를 부탁하여 일부 준비를 했고 우선 요양원부터 방문하여 어머니를 뵈었는데 잠을 깊게 주무시고 계신다. 아들이 왔다고 속삭이니 금방 깨어나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기에 나도 얼굴을 부비며 편히 더 주무시라는 말을 남기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요양원을 나섰다. 시내에서 지인에게 참고서를 전하고 7시에 집으로 돌아와 논술을 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저녁에는 김치고추장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아침과 저녁에 직접 음식을 내가 했는데 입맛에 부족하지 않아 마음이 흡족한 저녁이었고 강의를 다하면 다음으로 요리사나 해 볼까.
16일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월요일, 아침마다 열심히 그리고 최선으로 살자는 다짐을 많이 하는데 그러나 생활이 시작되면 새벽의 마음가짐이 흐트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신문을 보고 식사를 하려다가 밥부터 반찬까지 성의가 전혀 없어 그냥 숟가락을 놓고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가 10시에 체육관으로 나갔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기구운동을 하는 중에 머리 뒷골 부근의 힘줄이 끊어질 듯 통증이 생겨 숨을 고르고 하던 운동을 멈추었다. 오후에는 장원장과 약속이 되어 학원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떡국으로 함께 점심을 사 먹고 들어오니 10여일 만에 수술을 마친 고등수학 선생이 얼굴이 부은 상태로 학원에 나왔다. 장원장은 강사료 미납으로 소송을 한 선생들을 만나 일을 잘 해결했다며 서류를 보여 주는데 그만 둔 선생들이 강사료 50%만 요구한 것으로 결국 시간을 끌어 장원장이 이득을 본 셈이다. 오후에 대치동 마원장이 차용액과 이자를 입금해 왔고 저녁에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지만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 추기경의 마지막은 국민 모두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오늘은 애도를 하는 밤의 분위기가 되고 있다.
17일 어제보다 더 추워 오늘은 서울이 영하 9도까지 내려갔다. 새벽에 TV를 켜니 선종한 추기경 조문행렬이 밤새 계속이고 새벽까지도 추모객들이 명동성당 입구까지 길게 줄을 서 있다. 독재와도 맞서고 양심의 자리를 지킨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기에 일백 분의 일이라도 그의 삶의 방식을 따라 갔으면 좋겠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요즘 컨디션도 기분도 좋지 않아 집에서는 아예 대화를 중단하고 있는 상태인데 오늘은 아내가 아침식사를 권하고 된장찌개를 먹는 중에는 학교에 다녀온다는 아들의 목소리가 몇 개월 만에 들려 새삼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니 아내도 벌써 학원으로 갔고 나도 서둘러 체육관으로 나갔다. 운동을 마치고 학원에 가서 장원장과 금전 문제로 대화를 했는데 큰 소리도 내지 못하는 장원장이 목회자의 길을 버리고 어쩌다가 사업에 뛰어들어 파산으로 가는지 오늘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요양원에 갔다가 어머니를 뵙고 학원에 다시 들어가면서 신설동에 가 보니 1층은 의류 디자인실이라고 아담하고 예쁘게 시설을 해 놓았다. 점심을 사 먹고 고등부 수업을 마친 저녁에 기온이 내려가 더욱 추워졌고 그나마 따뜻한 곳이라고 집에 들어왔는데 거실은 더 추웠다. 마침 저녁 식사를 하던 딸은 들어오는 나를 보고 인사라고 젓가락만 들어보이는데 딸한테는 그것이 말보다 더 쉬운 인사법일 것이다.
18일 어제 깊은 잠을 잤다. 새벽까지 단잠을 자고 5시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6시에 잠깐 또 잤다가 8시에 미역국으로 혼자 식사를 했다. 아침 TV에 일본에서 활동한다는 가수 김연자가 ‘수은등‘이라는 자신의 노래를 열창하는데 창법과 동작이 마치 현장에서 직접 공연을 보는 것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10시에 체육관에 가려다가 안산에 올랐는데 겨울의 끝이라 해도 날씨는 쌀쌀하고 계곡은 눈과 얼음이 그대로다. 정상을 넘어 기구운동을 하고 12시에 집으로 내려와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오늘 변호사 개업을 하는 조원룡에게 난 화분을 보내려고 남대문 시장으로 나갔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남대문시장 2층 도매상으로 올라가 호접란 종류를 주문하여 강남 서초동으로 배달을 시켰다. 영식이의 중학교 동창 경상도 친구지만 부산에서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공부하여 서울대 법대를 들어가 마흔이 넘어 사법시험에 합격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학원으로 들어가 오후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서초동 사무실 개업식에 갔더니 나이든 변호사 개업이라 그런지 화분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기가 죽을 정도였다. 이런 개업식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는데 우리나라
유명 인사들이 모두 보내온 것 같았고 실질적으로 사람보다 꽃이 더 많았다. 아름다운 인생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친구가 부러웠고 앞으로 유능한 변호사가 되라고 이야기하고 사무실을 나와 함께 온 사람들과 자리를 하다가 집에 왔다.
19일 눈을 뜨니 새벽 6시가 되었다. 새벽 신문에 온통 김수환 추기경 추모의 글이다. 8시에 아들은 오늘 2학년 종업식이라고 나가고 학교에 안 가는 딸은 늦잠을 자더니 아침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중에 일어나 거실에 나왔다. 딸에게 아침을 권하면서 아빠가 들어오면 멀뚱하게 있지 말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라고 가르치며 점심에 먹으라고 방에 두었던 라면 2개를 주었다. 지하철로 학원으로 일찍 나갔다가 요양원에 가서 뵌 어머니의 모습이 이제는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야위어 팔과 다리가 한 손 안에 잡혔고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분명 멀지 않았는데 오늘도 평소처럼 노래만 불러드리고 시간을 보내다가 고려대 근처에서 자주 먹던 닭곰탕 점심을 사 먹고 학원으로 들어갔다. 날이 잔뜩 흐리고 강의시간이 남아 경기학원 근처 일전에 방문한 학원에 갔더니 학원장이 자신의 학원을 인수해 가라고 다시 제의를 한다. 위치도 좋고 마음도 있었지만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사업은 함부로 덤비는 것이 아니라서 나로서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부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엊그제 식사를 했던 유하영 투자자가 고등부를 자신이 운영해보겠다고 하며 그러면서 나의 강사료는 반드시 책임진다고 한다. 투자자로서 답답하니 여러 방안을 강구하는 것인데 학원은 기존의 빚이 많아 이 상황에서 누가 운영한다고 단숨에 더 나아질 수는 없다. 학원을 나와 장안동 정식이 사무실에 갔다가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친구와는 대화를 하는 것만도 즐거워 만날 때마다 고통이나 고민은 남의 일이 된다.
20일 늦게 일어나 9시경 혼자 식사를 했다. 밤에 눈이 내려 거실에서 보는 안산은 온통 순백색으로 아름답기도 하다. 입춘이 지났고 10여일 후면 3월이 오는데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다니 아무튼 올 해 마지막 겨울눈이 아닐까 싶다. 식사를 마치고 오전에 안산에 올랐더니 눈이 쌓였고 거기에 바람까지 불어 매서운 겨울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오늘 요양원에 방문한다는 영식이와의 약속을 나의 일정으로 다음으로 미루었고 부산 배사업 투자금을 요구하여 광선형이 보내온 3천만 원을 먼저 송금해 주었다. 추기경 영결식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되고 방송 3사가 생중계를 하면서 성당 안팎과 명동 일대는 조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TV를 보는 우리들도 슬픔의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추기경의 가르침을 누구나 기억해야 할 것인데 돌아서면 탐욕과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실천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학원에 오후 2시에 도착하여 고등부 수업을 하고 여러 업무를 보며 일정을 마쳤다. 임대료 때문에 신설동 3층에 들렸더니 갈 때마다 임차인은 신뢰가 안 가는 소리만 하는데 오늘도 금방 임대료를 해결할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다.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친 대로 인간적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저녁에 집으로 왔더니 아내는 모임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왔다고 하고 늦은 밤에는 사과를 많이 먹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21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거실에 나오니 아내가 책을 읽고 있더니 7시경 다시 들어가 깊은 잠을 잔다. 어쩌다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에 나온 것이지 아내는 부지런한 그리고 잠이 적은 사람이 아니다. 신문과 TV를 보며 8시를 보내고 결국 늦게 일어난 아내 때문에 9시가 되어도 식사를 못하고 있는 아침이다. 새벽에 밥솥 전기라도 미리 연결하고 들어가 잤더라면 좋았는데 늦은 시간에 허겁지겁 준비하려니 국이나 반찬이 당연히 성의가 없어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은 운동도 포기하고 11시 지나 BMW센터에 가서 차를 정비했는데 컴퓨터까지 가지고 와서 정밀진단을 해 준다.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가면서 여동생에게 오늘 원석이와 유진이를 요양원으로 데리고 오라고 전화를 했다. 조카들이 각각 졸업식을 했고 이제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들어가서 식사라도 사 주고 싶었다.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뵙고 조카들과 밖으로 나와 돼지갈비를 사 주었고 더 나은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을 하라고 일렀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늘은 대치동으로 영어를 배우러 간다고 지하철로 이동중이다. 왕복 2시간씩 다녀야 하는 거리를 대학이나 논술 수업도 아닌 중학교 수준의 영어강의를 듣겠다고 간다니 이해가 되지 않아 생각없이 보낸 아내가 또 원망스러웠다. 누구 말을 듣기만 하면 겨우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스페인어를 배운다 토익을 배운다 이번에는 강남으로 가서 영어를 배운다고 하니 효과도 없을 뿐더러 그 동안 전례를 보면 아마 1개월도 다니지 못 할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무도 없고 아들 교육에 대하여 생각하니 사람마다 입장이나 방법이 달라 누구라도 어쩔 수가 없다. 늦은 시간에 정식이가 우리 동네로 왔고 나는 아들에 대하여 푸념을 하며 술을 마시다 보니 시간이 오래 되었다.
22일 눈을 뜨니 아침 9시가 지났다. 찜질방에서 잠을 자는 정식이한테 전화가 와서 오늘 함께 청주에 가기로 어제 약속을 했으니 출발하자고 한다. 어제 과음도 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고 잠도 못자서 정신이 없다. 미안하지만 혼자 다녀오라고 하고 나는 11시에 집을 나서 북한산에 오르려고 차를 몰고 구파발 근처 삼천사로 가서 대왕동암문 방향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물론 이 코스는 처음이지만 길이 있는 곳으로 1시간 10분을 걸으니 성곽능선이고 20분을 더 오르니 의상봉 정상이다. 북한산의 북서쪽 끝이라 남쪽 방향 대각선 멀리로 사모바위가 보이고 북쪽으로 돌아 확 트인 경관을 보며 점심으로 가져온 컵라면을 먹었다. 2시30분에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오는데 가파르고 낙엽이 쌓여 딛는 곳마다 미끄러워 힘들었고 삼천사 아래 주차장에 4시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오니 아들은 학원에 갔는지 흔적이 없고 아내만 혼자 TV를 보고 있는데 나도 그렇지만 아내도 삶이 답답하고 힘들 것이다. 저녁에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 마음이 흡족했지만 함께 식탁에 앉은 아내나 딸이나 누구도 말이 없어 흥미가 없는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각자 방으로 들어가 버려 오늘도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았는데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이다. 9시 뉴스를 보면서 일찍 잠이 들었다가 한 밤중에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뜨니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왔고 시간을 보니 새벽 1시다.
23일 6시에 신문을 보고 나니 날이 밝았고 출근하는 차량행렬이 무악재 고개에서 하나 둘 시야에 들어오는 아침이다. 오늘도 낮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오른다니 이제는 정말로 봄이오려나 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시래기 된장국으로 마쳤다. 몸 컨디션이 좋지 않고 기분이 우울할 때는 운동부터 해야 될 것 같아서 9시에 체육관에 도착하여 걷기와 기구운동을 열심히 하고 샤워를 마치니 역시 좋다. 월요일이라 할 일이 많아 우선 학원으로 가서 여러 서류정리를 하다 보니 망자가 된 김성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그와의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고 1시가 지나서는 점심으로 콩나물 라면을 먹고 들어왔다. 고등 선생들한테 수강생들 점검하고 결석생은 전화 상담하라고 했더니 강사료 미납으로 의욕이 없는지 모두 대답이 없어 미안한 마음에 나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뇌에 문제가 있어 수술을 하고 보름 이상 입원을 했다가 돌아온 카운터 사무장을 만나 위로를 보내고 저녁에는 보람이 있도록 강의를 열심히 하고 마쳤다. 마지막까지 사정하여 법원에 소송하는 것을 연기해 준 신설동 3층에서는 임대료를 오늘도 해결하지 않아 내일은 지체하지 않고 법원으로 달려가 서류부터 접수할 일이다. 저녁에 집에 오니 컴퓨터를 하는 아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식사를 하면서는 아내나 딸 모두 말이 없어 적적한 시간이 계속 되었다. 가족이라고 집에서 함께 하는 저녁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없는 우리같은 가정이 또 있을까, 성격이나 운명이라고 여기고 살기에는 너무 무의미한 삶이다.
24일 잠을 잘 자니 몸이 가뿐하다. 아침 서울 기온이 10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니 오늘은 포근한 봄으로 가는 시간임이 분명하다. 8시에 아내와 식사를 했고 아들과 딸은 9시가 지나 10시가 되어도 잠을 자고 있다. 젊은 시절에 내가 꿈꾸고 계획했던 가정과 삶이 이것이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현재는 내 삶이 조각으로 떨어져 남아 있는 느낌이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학원으로 가서는 장원장과 금전문제로 길 건너 여러 은행을 쏘다닌 피곤한 시간을 보냈는데 통장에 입금된 돈이 이체가 되지 않는다니 강사료 문제도 얽혀 있어 동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를 몰고 요양원에 갔더니 오늘도 실습 간병인들은 정성으로 일을 하고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요양원을 나와 2월 3일에 접수한 서류가 미비하다고 법원에서 보정권고가 나온 터라 북부법원 법률구조공단에 들어가 상담을 하고 다시 신설동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사 먹었다. 학원으로 가려는데 3층 세입자가 소송이 임박함을 알았는지 우선 100만원을 주고 이번 주까지 나머지를 해결한다고 사정하여 또 어쩔 수 없이 서류를 보류했다. 일찍 집에 와서 머리가 아파 저녁을 먹고 누웠는데 방으로 들어온 딸이 오늘 받아온 현금 100만원을 보고 놀라고 직접 돈을 세어 보며 이렇게 큰 돈은 처음 만져본다며 호기심에 차 있다.
25일 겨울을 보내고 봄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2월의 마지막 주일이다. 아내와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고향 친구 동선이한테 점심을 먹자고 문자가 와 있다. 인색한 동창인데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하고 바로 학원으로 갔더니 친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함께 나와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니던 회사에서 3일 후인 2월 말에 명퇴를 한다는 것이다. 딸 둘과 아들 그리고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초조함으로 나를 찾아온 이유가 쉽게 이해되었다. 나는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각별히 건강에 힘쓰라고 당부하면서 다시 좋은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점심 후 요양원에 함께 갔더니 어머니께서는 어린 시절의 친구를 반갑게 맞이했고 요양원을 나서면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간 친구는 한참을 기도하듯이 서 있다. 친구와 헤어지고 학원으로 들어가 강의를 마친 뒤에 근처에 있는 SLS학원 원장을 만나 경기학원 상황과 SLS학원 인수문제를 다시 이야기하고 나왔다. 대화를 마치고 10시에 집에 들어왔는데 아들과 마찬가지로 딸도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어 내가 먼저 인사를 할 처지가 되었다.
26일 새벽에 일어나면 나는 언제나 오늘 무슨 운동을 할까부터 판단하고 다음에는 오늘 처리할 일이 무엇인가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병이 생겨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아 고통스런 상황에서 삶을 정리하는 내용이었다. 절망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꿈을 깨기는 했지만 기억이 선명하고 언젠가는 다가올 수 있는 미래의 사실이라 오늘의 삶을 다시 돌아볼 수가 있었다. 아내와 미역국으로 식사를 하는데 수업이 오후 3시부터라며 오전에 영화 ‘워낭소리‘를 함께 보러 가자고 한다. 갑작스런 요청에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으로 미루고 11시에 현관을 나섰다. 저녁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집을 나서도 거실에 있는 아내나 아들 딸 누구하나 다녀오라는 인사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각자의 자리만 지키고 있다. 내가 여기에 사는 사람으로 가장이고 아버지인가 다시 생각해 보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마원장과 금전문제로 오해가 생겨 오늘은 대치동에 갔는데 염려와 달리 그는 열심히 강의를 하며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중간에 점심을 함께 했다. 오후에 성북동 학원으로 이동하여 장원장과 미팅을 하며 학원이나 앞으로의 상황에 조언을 했는데 자존심과 고집으로 일관하여 아무런 결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오후에 강의를 마치고 고등부 선생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차후 학원의 상황에 대처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10시에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아침부터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처음에 버스를 잘못 타고 가다가 내렸는데 다시 갈아탄 버스에서는 정거장을 지나쳐 오늘은 정신이 없는 날이 되었다.
27일 새벽에 신문을 보고 7시가 되어 잠깐 잠을 잤다. 아침식사를 하려는데 밥이 딱딱하여 먹지 않고 누룽지를 만들어 대신 먹었다. 2월말 우리집 공과금을 확인하니 보험에서 빌린 상환액까지 이번 달에는 900만원이 필요하다. 은행상환액 250만원, 기존 은행이자 200만원 생활비300만원 내가 사용한 카드와 핸드폰비 80만원까지다. 평상시는 500만원 정도의 지출인데 이번에는 은행상환액 때문에 특별히 많았고 다행히 신설동 1,2,3층에서 임대료가 나오고 강사료가 생기어 무난하게 넘어설 수 있다. 작년을 생각하면 요즘은 나은 편이고 앞으로는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했다. 학원에 가서 장원장을 만나 임대료 적체로 이대로 가면 강제집행이 뻔하니 규모가 적은 곳으로 학원을 옮기자고 했더니 3월에도 계속 하겠다며 어제처럼 또 고집을 부린다. 수강생들이 80명이나 되니 규모를 줄여서 다시 시작하면 금전적인 압박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생길 수 있다고 강조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요양원에 갔더니 정성껏 어머니를 돌봐 온 간병인이 오늘까지가 실습 마지막이라면서 정이 든 어머니의 상황을 염려하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학원으로 돌아오는 중에 고려대 근처에서 닭곰탕을 사 먹고 영식이와 동선이 전화가 와서 통화도 했다. 신설동 3층에서는 며칠 전에 이어 오늘 130만원 미납임대료를 또 입금해 왔고 남은 보증금은 수일 내에 처리한다고 전한다. 오후 3시30분 학원에 들어와 자리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니 오가는 차량 행렬은 끊임이 없고 봄이 오려는지 거리는 따사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저녁에 학원을 출발하여 남영동으로 가서 영식이와 저녁을 먹고 현재와 미래의 삶을 계획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와 함께 하면 언제나 힘이 나고 자신감이 생겨 좋은데 나에게 희망을 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28일 조금 늦게 일어나 거실에 나왔고 창 밖을 통하여 본 하늘은 쾌청하여 한 점 구름도 없이 작년 2월 말에 눈이 펑펑 내렸다는 기록과는 반대의 날씨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보는 안산도 아름다워 산등성이에서는 금방이라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다. TV를 보면서 방에 누워 있으려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과일을 준비하여 서둘러 안산에 올랐다. 정상을 거쳐 산악회 운동장에 내려와 기구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집에는 1시에 들어왔다. 누룽지를 만들어 혼자 점심을 먹는 중에 아내는 논술교실에 가고 아들과 딸은 방과 거실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북동 종로스쿨 원장이 전화를 해서 오후 3시에 보자고 하기에 시간을 맞추어 원장실에 들어가니 10년 동안 학원을 운영했는데 지금은 구역질이 날만큼 역겹다며 우선 여행이라도 다녀온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이익이 생기면 좋은 곳이고 적자가 생기면 역겨운 공간이 될 터인데 시간이 지나보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원을 운영했던 현재가 보람있는 시간으로 남을 것이고 여행을 한다고 해도 일주일이 지나면 그것도 지루하고 다른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충고와 조언을 했다. 경기학원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하면서 여러가지 정리를 해보니 무슨 일이든 힘들지 않은 일이 없고 다만 내가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여 최선으로 노력하는 것이 어디서든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집에 일찍 들어와 아무런 말도 없이 가족 4명이 삼겹살로 저녁식사를 하고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부족한 것이 많은 나로 인하여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 따뜻함이 없이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3월이 도래하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나도 다시 일어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