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정서불안-최인호의 ‘타인의 방’을 읽고(호당 )
누구나 자기의 방을 갖고 있다.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든 갖고 싶어 한다. 자신의 방이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다. 누구의 눈치 볼 것도 없이 혼자 최대한의 자유를 즐길 수 있으며 비밀이 보장되는 공간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방.
방이라는 것은 물론 사면(四面)의 벽과 천장으로 막아져서 이루어지는 한 공간이다. 막혀져있다 해서 그 공간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기 때문이다. 출입문과 창문이 있다. 창문은 가장 안전한 자신의 영역 안에서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방안에 있는 나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외부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출입문은 좀 더 동적이고 적극적인 외부와의 내통 가능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방으로부터 나갈 수도 있고 들어올 수도 있다. 문을 통하여 나를 들어내고 문을 통하여 나를 감춘다. 문에는 잠금 장치가 꼭 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방을 잃어버렸다. 그는 방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조차도 사라져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방을 잃어버리는 일은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무섭고 황당한 일일까?
최인호의 ‘타인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하루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한 남자가 자기의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린다. 물론 그 남자는 보조열쇠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내가 열어줄 것을 기대하고 두드린 것이다. 그런데 문을 열리지 않고 깊이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는 아내의 잠버릇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더 세게 두드린다. 그러나 안에서는 기척도 없고 오히려 시끄러운 소리에 불평을 하며 나온 이웃들은 그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조차 믿지 않은 채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게 된다. 3년 혹은 10년을 살았다고 하면서도 서로가 낯이 선 것은 마찬가지이다. 한 바탕 입씨름을 하고 화가 난 채 자신이 갖고 있는 보조키로 열고 들어오지만 아내는 없고 메모 한 장만 남겨져있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 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갔다고 잘 말씀드리겠어요. 편히 쉬세요. 밥상은 부엌에 차려놨어요. - 당신의 아내’
그러나 그는 그것이 아내의 거짓 메모이고 습관성 외출을 위한 구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구요? 이웃들이 서로 몰라볼 리가 없을 거라구요? 그리고 마누라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거라구요? 그래서 따로 비상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않느냐구요? 그렇게 대답은 하면서도 당신은 지금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당신일 수 있다는 걸 긍정하면서.
아니라면 당신은 지금 삼사십 년 전쯤, 아직 우리가 반딧불이를 보고 시냇물을 건너다니던 낭만적인 시대에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지금 당신의 희망사항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의 공간 설정이 아파트라는 것에서부터 의도가 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우선 아파트는 획일적인 공간이다. 집집마다 공간배치가 다르고 거기 놓인 세간살이가 형편 따라 다른 옛날 식 공간이 아니다. 마당으로 나오면 이웃들과 얼굴 마주하고 자잘한 일상사까지 주고받던 과거의 농촌형 주거형태와는 달리 집집마다 같은 복도에 문을 두고 있으면서 동일한 구조로 되어있는 아파트,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그만인 밀폐의 공간이다. 이웃에 살면서 서로 얼굴 맞댈 일이 없어 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이웃 간의 단절을 가져왔다. 누가 사는 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인의 방’주인공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여기서의 방은 글의 처음에서 말한 소통의 방이 아니라 단절의 방이다.
주거환경의 변화, 아파트, 이것이 우리의 도시화 물결의 가장 큰 변화이며 상징일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녹초가 된 몸으로 돌아와 아내가 문열어주기를 기대했다가 낭패를 보는 주인공은 도시생활에 지친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메모가 거짓인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그는 모처럼 자기만의 자유를 누려보고자 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생활, 판에 박힌 일상의 반복, 누적된 피로와 고독감이 정신을 어지럽힌다. 집안의 가구들이, 물건들이 모두 살아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살아서 한 마디씩 던지는 착란이 생긴다. 결국은 자기 자신도 세간살이들 중에 속하는 어느 한 가지의 물건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화 되고 현대화되고 도시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도시 노동자들 혹은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해버린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피로에 지친 몸으로 퇴근하고 거의 대개의 일들은 기계가 하거나 자동화되어가고 그 틈새에 있다 보니 자기 자신도 거대한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계의 한 개의 부품으로 소모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도시현대인들의 공통적인 감정이다.
마지막 부분이 가슴이 아릿하다.
그는 이미 물건으로 변신해버렸고, 며칠 만에 돌아온 아내에게는 못 보던 물건으로 눈에 띈다.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었으므로 처음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고 키스도 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것은 아내에게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이 되어버리고 아내는 그 물건을 다락방 잡동사니 속에 던져져버린다. 그리고 또 그 거짓 메모를 남기고 외출을 한다.
여기서 그가 바뀐 물건이 남근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성적으로도 무력해져버린 서글픔을 말함과 동시에 현대의 가정생활에서 남성이 아내의 성적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성적만족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성적만족만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참 헛헛하다.
사람이 물건으로 바뀌는 형식의 소설이 ‘타인의 방’만은 아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니 벌레가 되어있는 카프카의 ‘변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변신’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자신이 쓸모없어짐을 인식하면서 물질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자각한다는 점이다. 자각하는 과정은 극도의 공포감을 수반하게 된다. 불안하고 허탈할 것이다. 그 자각에 의해서 고독과 피로는 더 심각하게 인식되고 결국 위기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화, 현대화로 가면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따라서 작가는 그것을 말했을 것이다.
지금 바로 당신도 당신의 바지춤을 확인 해 보시라. 건재한 지. 사실은 바지춤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속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