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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波紋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바다의 삶
김지란 시인 시집《가막만 여자》해설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2020년은 집콕의 시간으로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팬데믹 현상으로 공통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자신이 살아온 축적된 시간의 문장들을 모아 발설하려 하는 시인이 있다. 자신의 과거든 현재든 가감 없이 삶을 드러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시인이기에 시를 통해 가능하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시간을 감추기에 급급하여 비밀 아닌 비밀을 갖고 살아가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지란 시인이 모든 것을 발가벗겨가며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메타적 관념을 통해 발설하고자 하는 범주의 사건들을 독자와 공감하는 기회로 삼아 그 여지를 갖자는 배려이다. 사실, 주체로 다가온 대상이자 사물(현상)을 인간적인 욕망으로 전환하고 싶은 본능으로 억제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소한 욕망은 매우 긍정적이면서 바람직한 것이고 때로는 시의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매력이거나 매혹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시의 상상력을 통해 발현하는 시인만의 성장의 시간으로 온존해 있어 그렇다. 시인만의 비밀한 시간 안에서 발화된 시편들은 그 시대를 살아온 연대기이거나 사실에 근거한 성장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 한 편 한 편은 시인의 삶이면서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추억 속 향수로 재현한다. 시를 빌미로 우리가 잊어버린 시간을 생생한 날것으로 되돌려놓는다. 김지란 시인은 성장기 체험을 통해 축적한 시간을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시간에 대한 인간적 안타까움마저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듯 시를 통해 현재화하고 있다. 시의 대상은 사물로 집약된다. 더욱이 단순한 시선으로 편협하지 않고 누구나의 것으로 대상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욕망이 투사된 사물에서 시가 존재의 사실성이면서 시적 이미지는 문장 속에서 거듭한 심연深淵을 극복하여 기의로 외연을 확장한다.
김지란 시인의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바다는 가막만으로 밀려왔다 밀려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침적된 뻘이 풍부한 가막만灣은 전라남도 여수반도를 바라보며 고돌산 반도와 돌산도를 기점으로 개도까지 이어진다. 현재도 꼬막 양식장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우연하게도 ‘가막만’의 유래는 시인이 태어난 고향 앞바다에 떠 있는 ‘까막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까막섬을 기점으로 물 때마다 드러나는 뻘과 바다는 시인에게 유년기의 전부였다. 마음 한켠에 먹먹한 슬픔처럼 드리운 아버지와 엄마가 살아온 혼신의 바다이기도 한 그곳은 소중한 추억의 장소로 실재한다. 불혹不惑을 넘은 나이가 된 현실에서 되돌아보면, 시인이 바라본 시간 속 사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 사유의 결과물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사물의 본질에서 건져 올린 시의 내면은 인간의 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때, 찰나를 망라한 오랜 시간의 축적물이란 것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런 까닭에 김지란 시에서 보여주는 시적 세계의 진폭은 시의 품격으로 봐야 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남다른 열정으로 문학에 진력하고 있기에 그렇다. 오래 품은 온정은 쉽게 식지 않듯 가슴으로 잉태하고 가슴으로 분만한 시간의 결과임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몰입하는 시의詩意속에서 해찰하지 않은 열정은 단정하다 못해 진정하다. 시인만의 사고 작용으로 진전시킨 시적 세계가 그렇다고 특별하거나 남다른 비의를 담은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시간으로 치부해버린 현대인들이 잊기 쉬운 과거의 시간을 소환하고 생존보다 엄중한 가치를 소중한 사색의 시간으로 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지란 시인의 시 속에서 눈여겨볼 것은 시적 대상으로 천착한 사물에 대한 인식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인간과 관계 맺는 사물의 차원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고 성장 과정에서 기여한 등가 관계가 아직도 실효적 가치로 유효함을 말해준다. 낯익은 과거의 시간을 통해 찾아낸 삶의 가치와 의미의 위중함을 실리보다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적 근원으로 구체화한 성장기 ‘바다’ 이미지는 사실성을 담보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만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무의미한 일상에서 불모성으로 점철된 현대인들에게 상실감을 회복하는 기회의 시간을 제공한다. 오래도록 가슴속에 봉인된 것들을 통해 몽근한 감상을 더할 뿐만이 아니라 심미적 심상으로 몽클한 공감을 불러온다. 그런 빌미나 기미도 알고 보면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다.
선원 월급 주는 날
지폐를 헤아려 가다
생선 비늘이 말라붙은 만 원짜리 한 장
돈을 세는 내 손가락을 붙잡고 만다
돈에다 빨간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멸치 두 상자’
긴박한 생이 화석처럼 멈춰 있다
꼬박 달포를 바다로 나간다는 멸치잡이 어선,
아버지의 품삯으로 건네 온 비릿한 것들
경매도 부쳐지지 못한 채
어머니의 발품 행상으로 살림 밑천이 되었던 멸치
구깃구깃한 만 원짜리 한 장
누군가의 충혈된 눈동자를 거쳐
어부의 딸을 용케 알아보았는지
검게 탄 아버지의 얼굴로 찾아왔다
먹먹한 수평선을 건너오는 아버지의 바다
지폐 한 장에 몸을 싣고 위태로운 파도를 넘고 있다
-<품삯> 전문
사람은 과거를 먹고 산다. 그것은 아무리 잊으래야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과거는 남에게 치부처럼 숨기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면에서 그렇지 않았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시인은 여수에서도 외진 화양면의 파도 소리만 드나드는 한적한 어촌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에 있는 삼성이란 대기업에 취직하였고 남들처럼 보란 듯이 시집가 그곳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다시 여수로 돌아와 산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 때문이다. 그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자신을 성장시켜준 바다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가슴에 품고 산다. 그의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하는 일도 다르지 않아 고기 잡는 회사에서 근무한다. 그날도 평소처럼 선원들 월급 주는 날이라 은행에서 지폐를 찾아왔을 것이고 필요한 만큼 돈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런 중에 시인은 생선 비늘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한 장의 지폐를 발견한다. “돈에다 빨간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멸치 두 상자’/ 긴박한 생이 화석처럼 멈춰 있다”라며 시인은 교환가치에 익숙한 물신적 사고에서 순정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김지란 시인의 시적 세계의 바탕이 어디인가를 가장 명증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시다. 누군가에게는 하찮거나 비릿해서 지저분한 지폐 한 장이 시인에게는 과거의 소중한 시간을 소환해준다. 그 시간은 시인의 과거로 데자뷔 된다. 지폐는 물신적 상업주의가 낳은 폐해이자 인간성을 훼손하는 이기의 수단이다. 여기서 시인은 화폐의 가치보다 더한 사람의 숨결을 맡는다. 그 속에 얽힌 보이지 않는 사람의 절박함까지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삶 속 과거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달포를 나가야만 돌아오는 아버지의 바다와 그 아버지를 꼬박 기다렸다가 월급 대신 받아온 멸치 상자를 머리에 이고 행상으로 팔러 다닌 어머니의 시간까지 흑백 필름 속에서처럼 생생히 인화해낸다. 생선 냄새가 물씬 밴 지폐 속 ‘멸치 두상자’를 눌러쓴 누군가의 흔적은 시인에게는 가장 절절한 시적 대상인 동시에 교감으로 다가온 문장인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본성이자 인간애의 한 의지와 관통한다. 가슴속에 아직도 꿈처럼 떠 있는 ‘섬’은 질기도록 그리운 가족이었다. 그런 서정이 투사된 풍경 안으로 들어가 보자. 풍경을 자극한 이미지는 물리적 사실 속 현상들을 통해 시적 상상력의 주요 매개체가 된다. 매캐한 아궁이 속 연기나는 ‘부엌’과 ‘순비기나무’ 향기도 그렇거니와 ‘해우’는 시인의 추억에서 사실성을 부여하면서 시적 자아를 추동한다. 시를 통해 시인만이 간직한 시절을 상상하며 공감해보자. “부엌에 쪼그려 앉아 김을 굽는다 짠물 뒤집어쓴 순비기나무 향이 번진다 가막만 바다에 살던 멸치잡이 아버지// 엄마는 참기름을 솔가지에 묻혀 해우*에 바르셨다 질긴 가난에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앞에서 해풍을 닮은 눈물을 김 위에 뿌리셨다// 눈물 젖은 날 김 살살 흔들어 거칠었던 아버지의 바다를 달래고 소금꽃 핀 채로 부풀어 오른 슬픔 이쑤시개 하나로 잠재우곤 하셨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잠재우지 못한 나는” 섬에 지금도 갇혀있다. 스스로 갇힌 것이다.
다 하지 못한 숙제가 모래성처럼 쌓일 때마다 가슴속에 앉혔던 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만조滿朝에 잠기곤 했다 물속에서, 영원에 영원을 더해서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섬> 부분
“하루에도 몇 번씩 만조滿朝에 잠기곤 했다”는 섬은 실재한 섬은 아니다. 그 섬은 시인의 가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로 변주한다. 그 섬을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속 눈빛에는 가난에서 비롯된 가족의 아픔이 진하게 서려 있다. 그것은 암담했던 시절 살아내기 위해 거친 바다를 마다치 않고 나서야 했던 아버지와 그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무섭게 밀려드는 바다를 견뎌야만 했던 어머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멸치잡이 배를 따라 달포 지나 들어온 아버지를 위해 아껴 놓은 해우(김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를 굽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어린 시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릿하게 비친 어머니의 눈물을 본 것이다. 그것을 굳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은 가족애란 것을 다 안다. 아버지의 바다가 시인의 가슴으로 차올라 만조를 이룰 때마다 순비기나무 향이 은은하게 뒤덮인 고향 집과 어머니가 그리워질 봄이다. 소싯적 아이들에게 바다는 즐거움의 대상이다. 더욱이 아버지의 손길로 배에 올라 작은 섬으로 떠나는 시간은 더할 나위가 없다. 섬 어딘가에 작은 밭을 일궈 놓은 밭에서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를 따주시던 아버지와의 추억은 시인의 뇌리에 소중하게 각인되어 있다.
젊은 아버지 올망졸망 아이 셋 데리고
바다로만 통하는 길을 따라
목선木船 위에서 파도를 헤아린다
낡은 배는 세상 끝으로 미끄러지고
노래 부르며 도착한 아버지만의 바다 망끝
졸졸 아버지를 따라가다 만나는
허기를 보듬어준 햇살과 갯바람을 품은
초록 잎 사이 설익은 얼굴
가난한 아버지를 닮았다
기억의 그물을 잡아당긴다
저녁놀이 걸린 망끝에서
붉게 영글어가는 삼남매가 달려나온다
-<토마토> 전문
이 시를 일별해 보면 과거와 현재의 인식을 시인의 의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동화 같은 한때를 아름다운 사실적 풍경으로 가감 없이 보여준다. 시적 자아를 현상하면서 어디에도 사물에 대한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사실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토는 과일이나 채소로 분류되지 않고 애매하게도 과채류로 분류한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탐욕과 관계되어 있다. 그렇게 된 과정을 말하다 보면 복잡하다. 이야기가 틈으로 빠져나간 듯 하지만, 어쨌든 유년 시절 시인에게 토마토는 맛보기 어려운 과일로 인식한 게 맞을 것이다. 귀한 토마토를 따주셨던 아버지에 대한 어릴적 추억을 상상 이상의 즐거움으로 담아낸 시작詩作이다. 저런 풍경이라면 보는 사람도 즐거워 콧노래가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전반부 7연까지는 시인의 순수한 눈으로 본 기억을 담아냈다면 8연부터는 시인의 의식을 현재의 감각으로 피력하고 있다. 그런 사실적 정서를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내듯 ‘헤아린다’와 ‘닮았다’ 그리고 ‘잡아당긴다’는 강박은 기어이 ‘달려나온다’를 추동하여 시적 상상력을 구체화하여 하나의 풍경을 시적으로 호환한다. “저녁놀이 걸린 망끝에서/ 붉게 영글어가는 삼남매가 달려나온다”라고 갈음 하지만, 시인은 그 시절의 복원을 갈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은 안다. 그렇기에 순수해서 아름답던 시절의 회상과 이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은 더한 것이다. 그런 것마저 인간적인 삶의 소환을 지목하는 서정시의 근원에 다가가려는 것이기에 하등 거리낄 것이 없다. 거울에 담긴 세상의 풍경은 시시각각 다를 것이다. 거울은 세상의 크고 작은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 보이거나 보는 것은 다 담는다. 인간의 욕망과는 먼 물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말하려는 거울은 그냥 거울이 아니다. 바닷가 마을에 도로가 뚫리고 정류장까지 만들어졌다. 가파르게 굽이진 도로에 세워진 <정류장 거울>이란 시를 통해 바닷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종종 찾아간 고향의 변화된 풍경이지만, 단조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본래처럼 오롯하게 실재해야 할 “토박이 네 가구만 사는 발통기미/ 가막만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정류장에는/ 오가는 사람은 없고/ 축 개통이라 새긴 버스만 지나갑니다”라며 산문 투의 문장은 단조로움을 더해준다. 그렇지만, 시인은 무의미한 시간으로 소모하지 않았다. 시는 감각을 통해 예민하게 기인하고 발화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시인의 감각은 바닷가 사람들의 잊힌 삶을 떠올린다. 그래도 한때는 그 마을도 아이들이 올망졸망 크면서 북적거리던 마을이었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아이들마저 성장해 다 떠나고 없는 마을에 큰 길이 나고 정류장이 세워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거동이 불편해 버스도 이용하기 어려운 할머니들이 모여 소일거리나 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다행이다 싶은 그 정류장 거울 속에 “짠내 가득 현수막에는 사스레피 꽃향기 둘러앉고/ 홍합 비린내에 갯바람도 쉬어 가는데/ 햇살에 널린 토란대 고추 청각/ 낮 손님들 졸린 눈 게슴츠레 낮잠에 흘러가는 오후”만 있다. 개통 기념으로 걸어둔 거울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갯마을의 아련한 추억들을 주저리주저리 들춰보여주고 있다. 들릴락 말락 엷어지는 할머니들의 노랫가락이 ‘가막만 바다’의 밀물에 밀려와 흐릿해지면 그나마도 거울은 기억할 수 없다. 지나온 시간을 잊지 않도록 지연시켜주는 바닷가 정류장을 소중한 순간으로 시인은 환기시켜준다. 영원한 것은 없어도 기억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것은 있다. 바닷가의 사스레피 꽃 향기와 비릿한 갯내속 홍합 그리고 함께한 시간을 놓지 못하도록 짠내 묻어오는 그리움은 사람에게서 온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시간의 속도에 비례해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삶의 무의미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삶의 현실에서 아무리 힘들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이기에 엄마에 대한 온정에서 비롯한 자식으로서의 애정이다. 그런 면에서 <본적本籍>이란 시도 일반적인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수 있지만, 시인의 엄마가 살아온 곡절한 삶의 서사라면 더 궁금하다. 떠밀리다시피 한 시인의 엄마의 출가 과정과 이후 단절된 시간을 짧은 시로 다 말할 수는 없다.
밤바다 파도소리에 실려 오는
친정엄마 묵은 레퍼토리
소싯적 겁나 잘 나갔는디
이 바닷가 꼴창으로 시집올지 누가 알았겄냐
조선팔도 화양면 골짜기 발통기미
마을은 거대한 발통이다
한 코 한 코 그물 사이로
젊음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꼼짝없이 갇혀버린 엄마의 생
친정엄마 또 다른 레퍼토리
무주구천동 빠가사리
바닷가 문절이 만나 힘 못 쓰고 팍 죽어부렀구만
기막힌 짠물 수없이 들이켤 때마다
구천동 그리워 찾았다는
마을 끝 외딴 노랑바구*에
그리운 고향 대신
집 떠난 아들 딸 이름 셋
엄마의 본적으로 새기고 있다
*마을 앞 바위 이름.
-<본적本籍> 전문
살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우리네 엄마들은 흥얼거리듯 노랫가락으로 풀어내며 살았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도 그렇게라도 해야만 살 수 있기에 부르고 또 불렀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리랑’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사람의 삶이 켜켜이 쌓여 질박한 노랫가락으로 전해진 아리랑은 사람마다의 묵음으로 부르고 가슴으로 삭여야 했다. 그런 엄마의 아리랑 곡조를 시인은 성장하면서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밤바다 파도소리에 실려 오는/ 친정엄마 묵은 레퍼토리// 소싯적 겁나 잘 나갔는디/ 이 바닷가 꼴창으로 시집올지 누가 알았겄냐”와 “친정엄마 또 다른 레퍼토리/ 무주구천동 빠가사리/ 바닷가 문절이 만나 힘 못 쓰고 팍 죽어부렀구만”이라는 시행을 따라 읽다 보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밴 신세 타령조의 노랫가락임을 알 수 있다. 엄마의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듣고 자란 시인은 이제야 엄마를 대신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져보면 전라북도 오지에 있는 무주 구천동에서 여수 화양면 바닷가까지 옛날 길로 오간다면 오백 리는 거뜬히 될 거리다. 그렇게 먼 곳에서 살던 엄마가 어떻게 인연이 되어 여수 오지인 화양 바닷가로 시집을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모질기도 하지만 보통의 인연이라면 그 또한 맺어지기가 쉽지 않은 인연일 것이다. 무주구천동과 여수 화양면은 거리상으로도 교통편이 좋지 않은 시절이라서 한번 가족과 헤어지면 재회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만큼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사는 것도 녹록지 않았음을 앞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엄마가 시집온 이후 엄마의 친정 쪽과 오가는 것이 여의치 않았을 것은 뻔하다. 그리운 가족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한 환경에서 버텨나갈 수 있던 것은 한을 담은 노랫가락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힘들 때마다 “구천동 그리워 찾았다는/ 마을 끝 외딴 노랑바구에/ 그리운 고향 대신/ 집 떠난 아들 딸 이름 셋/ 엄마의 본적으로 새기고 있다”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심도 아름답거니와 그런 시인을 우리는 멀리할 수 없다. 세월은 사람을 무디게 하거나 여리게 한다. 술잔 앞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만큼 아버지가 갖는 품이 컸다는 방증이다. <잎새주>를 마시면서 각이진 분별력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그 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것이 시다. 시는 특별하게 시만의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 다른 빌미를 들고 나온다. 술잔과 아버지의 쓰린 속이 동질감으로 전율한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여러 생을 짊어진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걸어 나온다 비릿한 멸치 냄새 견디기 위해 들이붓던 진한 알코올 내음 훅, 코끝을 스친다 아버지 나이가 된 딸년 이파리에 푹 빠졌다 이제야 아버지의 쓰린 가슴을 만난다”라는 시적 진술은 고달픈 삶을 무디게 하기 위해 마신 아버지의 술병을 떠올린다. 비워지는 술병 속 쓰린 슬픔을 마신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시에서처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버지의 여름>은 언제일까.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게 싫다면서 “홍합 줄 엮느라 손은 더 바쁜데/ 한 줄에 이백 원짜리/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칠어진 손등의 힘줄이 굵어 붉다. 그래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입술>이란 시에서는 ‘입술’에다 색깔을 바른다는 시인이다. 바르다 보니 자신의 입술에 바른 것은 예쁜 립스틱이 아닌 어머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거울 속에 비친 “입술 위에 꽃 피어 마음 수척해지는 날// 사랑을 놓치고 피어난 동백꽃잎 짓이겨 바른다// 빙빙 돌아도 꽃잎 틈으로도 새어 나올 수 없던 목소리// 가슴 너덜너덜해진 핏빛 립스틱 엄마를 바른다// 세상 앞에 호기롭게 오래 품은 말들이 사방으로 흐드러진다// 한 번도 나인 적 없던 내가// 엄마의 가슴으로 파고들던 때처럼// 홀린 듯 파도소리 묻은 꽃을 바른다”는 시인도 이제 아들 셋을 키운다는 엄마다. 시간을 먹어야 생각이 깊어지듯 사람은 운명 같은 세월 위에서 반복적인 삶을 답습하듯 살아간다. 시간의 변화를 지연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엄마의 입술도 한때는 충만한 여성성으로 매력 가득하게 아름다웠을 것이다. 수척해진 자신의 입술을 보며 비로소 “가슴 너덜너덜해진” 엄마의 입술을 떠올린다. 실상을 통해 관념 속에만 존재한 엄마의 실체를 확인한다. 세상사를 담담히 수용하는 시인의 행동은 거울 속의 형상과 합일하는 언어 행위이자 인간의 윤리의식으로 결부된다. 가치의 중심에 가족이 있다면 연결 고리는 단연코 혈연이다. 무수하게 뜬 하늘의 별자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시인은 두 아이에게 말해주고 있다.
지금껏 사람들 눈 속에서 빛나도록
정성 들인 저희 엄마
아픈 허리에서 태어난
쌍둥이 별자리란 것을 알고 있을까
수시로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혹시나 해서 돌아보면
차가운 시선에 고개 돌리고 마는
철없는 별들
속 시커멓게 타들어간
코앞의 엄마가 검은 별이란 것을
죽어도 알 수 없을 거야
-<쌍둥이 별자리> 부분
“고개를 들어 까만 밤하늘에서/ 오늘 밤 새로 생긴 별자리를 찾는다”는 계절은 여름밤쯤이 아닐까 상상하며 하늘의 ‘쌍둥이 별자리’를 찾아본다. 가장 어린 별의 모습은 어떤 형상 일까도 궁금하다. 시인은 아기별의 형상을 ‘쌍둥이 아들’을 떠올리며 바라보고 있다. 존재의 안팎으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닌 존재의 실체는 우주적인 인연까지 거듭해 깊어진다. 생성하고 탄생하여 실존까지 이르는 동안 모태적인 사랑의 헌신이 있었다며, “고놈들 예쁘게도 생겼다/ 밤하늘 높다란 게 무섭지도 않나/ 하기사 혼자라면 몰라도/ 마주 보는 둘 같은 하나/ 저 밤 별 중에서 빛날 수 있었던 것/ 누군가의 고즈넉한 사랑인 것을” 다시 한번 혼잣말처럼 들려준다. 어차피 쏟은 사랑을 생색내려 한 것은 아니다. “정성들인 저희 엄마/ 아픈 허리에서 태어난/ 쌍둥이 별자리란 것을 알고 있을까” 라며 묻고 있지만, 아픔마저 느낄 겨를이 없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쌍둥이 별자리를 보며 생명 생성의 내밀한 가슴속 이야기는 거기까지 만이다. 혹시나 해서 바라본다는 아이들은 “속 시커멓게 타들어간/ 코앞의 엄마가 검은 별이란 것을/ 죽어도 알 수 없을 거야”라며 단정하면서도 엄마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아이들이 태어나기까지 고통의 시간은 <해삼과 대나무>라는 시를 통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아버지는 멸치 배에서 내린 이후/ 줄줄이 딸린 식솔들 위해/ 기다란 대나무 간짓대에 갈고리를 매달아/ 불배에서 해삼을 잡았다/ 물때가 되면 양철 대야 갓을 쓴 전등 불빛/ 바다에 비춰 손끝의 감각으로 건져 올렸다”는 아버지는 딸의 안전한 분만을 위한 노고를 아끼지 않았음을 전하고 있다. 위태위태한 딸의 “쌍둥이 가진 후 수차례 출혈/ 유산의 기미가 보이고/ 아침마다 늙은 아버지가 잡아오는/ 한 양푼 해삼은/ 뱃속의 쌍둥이를 지켜주었다”라고 아버지의 사랑을 토로한다. 매일 먹어야 하는 해삼의 식감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렇게 감내한 시간으로 당당하게 두 아이가 태어났음을 “결정적인 순간 세상에 어퍼컷을 날리는/ 대나무 줄기에 마디 하나 또 늘었다”며 생명에 대한 존재 의미를 새기고 있다. 시적 자아의 투시는 시공을 초월하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나도 깊은 잠 자고 나면
살면서 흔들린 것들 가라앉아
고요한 수심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앙금에 뿌리를 내리고
꽃움을 틔우고 싶은
어느 여름날,
천년을 휘돌아온 나비가 적막을 쓰다듬는다
-<지극한 잠> 부분
시인의 눈에 포착된 대상은 집요한 시적 세계로 흡입된다. 굳이 불교적인 사유로 연관 짓지 않아도 연꽃은 불가의 꽃으로 부처의 경배를 위한 꽃임은 논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함안의 아라홍련이 칠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 태동한 생명의 신비를 보여준 순간 세상 사람들은 연기적 사유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신비로운 그런 사실을 시인은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며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는 침묵이 최고의 언어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자오선이 바뀌듯 연꽃의 씨앗이라는 존재는 칠백 년의 ‘지극한 잠’에 들어서도 생명성을 잃지 않는다는 실체를 본 것이다. 신비감마저 감도는 함안의 연못 속 수련 앞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고택 속의 별채까지 되밟아간다. 무언가 짚힐 법한 세월의 묵음 속에서 찾아낸 비밀은 씨앗 속에 온존한 사랑의 비장함이다. 그렇게 질긴 생명의 근원에는 애틋하여 절명할 수 없는 사랑이 있었음을 간파한다. 절대적인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환생한 아라홍련은 그냥 핀 꽃이 아니라 사랑의 화신이다. 투시적인 상상력도 재미있지만, 과거로의 시간 속 상상의 나래도 시인의 몫이다. 행동태를 나타내는 ‘앉는다’나 ‘본다’를 통해 구체화되는 확신은 환상일지 몰라도 시인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받는다. “그 앙금에 뿌리를 내리고/ 꽃움을 틔우고 싶은/ 어느 여름날”의 환상을 단숨에 깨뜨리는 전화벨이 울린다면 칠백 년의 ‘지극한 잠’에 들려는 시인의 공도 허사가 된다. 만사가 귀찮아도 숨어들 고택의 별채나 연못도 없다.
언제쯤 불티가 사그라질까
나를 지키는 목소리만, 목소리만
더 참지 못하는 순간
소리를 연못 속에 던져버리자
물고기가 소리 파도를 타네
금방 금붕어 말투를 따라 하게 될 거야
안쓰러워하지는 마
너에게 사랑해 이모티콘을 거품 방울에 담아 보낼게
검지가 뻐끔뻐끔
어디서 목소리 한 방울 툭, 툭,
떨어지는데
*콜 포비아 : 음성통화를 두려워하는 증세.
-<콜 포비아> 전문
<콜 포비아>라는 말도 생소할뿐더러 잡다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며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과 단절하고 산다는 것도 불가능한 현실이니 말이다.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방안을 맴돌다 시인을 바라보며 뽀끔거리는 금붕어를 본다. 저들도 말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공기방울만 수면 위로 떠올라 소리 없이 사라진다. 무성음도 가능한 수족관 속 배 볼록한 금붕어는 조용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행복하겠단 생각까지가 시인의 생각이고 나머지는 금붕어만 알고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받을까말까 하며 고민하는 그 답마저 금붕어한테 물어봐야 한다. 말의 생성은 금붕어의 호흡으로 생긴 수포까지다. 발화된 물방울이 수면 위로 치솟아 오른다면 그것은 발성된 소리여서 ‘콜 포비아’ 증후군을 갖는 사람에겐 고통이다. 금붕어는 스마트폰 속에서도 물방울로 숨을 쉰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성통화가 두렵다는 ‘콜 포비아’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반면, 시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말로 인해 세상이 얽히고설켜 있다. 직업적인 체험으로만 가능한 김지란 시인의 시 <불가사리>다. 동남아 젊은 청년들이 스무 살을 갓 넘기고 어부가 되려 한국을 찾아온다. 한국에서 기피하는 직업군이 어부다. 푸른 바다에서 일하는 낭만보다 더 험난한 항해와 바닷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지로 뛰어들 기회를 잡기 위해 찾아온 “흑백사진 속 간절한 눈빛/ 가난의 기억이 몸에 박힌 듯/ 하나같이 표정들이 굳어있”는 열악한 나라에서 온 청년들을 만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한 눈빛의 표정에 냉정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명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베트남 몽골 선원들”에게 “어느 곳에서나 훨훨 유영하며 반짝거리라고/ STAR 이력서라 명패 하나 붙여주었다”는 시인은 “언어의 파도를 넘지 못한 그들/ 생면부지 타국적의 누이가 되어”주길 주저하지 않는다.
처자식 기대를 한껏 등에 업고
부푼 맘으로 찾아온 타국
할퀴고 베인 상처의 언어를 손아귀에
휘감아 쥐고 그물을 끌어올린다
컴컴하고 거친 물살로 튀어 올라
날것의 언어 하나 그물을 뚫고 나왔다
내 이름은 래반뚜언입니다
-<래반뚜언> 부분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누이가 된 시인에게 ‘래반뚜언’이란 이름을 가진 베트남 청년이 있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험지인 바다는 사투의 현장이다. 안강망 어선을 타고 조업을 떠난 베트남 청년 래반뚜언을 부른 바다는 더 거칠다. 부모의 온정을 담아 미래까지 복달음 하라며 지어준 이름, 한겨울 칼날보다 더 아프게 찔러오는 칼바람과 맞서며 “쿠로시오 물길 위에서/ 보름 밤낮을 바다와 벌이는 사투”는 죽음과 맞바꾼 시간이다. 그렇게 잡아온 고기들이 매일 경매로 팔려나가는 시 속에서 말한 <창문시장>은 시인만이 아는 곳에 있다. 긴박緊迫한 하루 종일 시장을 지켜보는 시인은 시적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상상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간섭하지 않는 시장을 갖는 상상 말이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꿈은 이루어지고 만다. 시장은 일출에 맞춰 열리고 일몰이면 폐장한다. 햇살에 비친 사무실 창문에 어른거리는 풍경은 죄다 시인이 사고팔 수 있는 세목이 된다. 자본 투입 없이 무한한 상품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은 세상천지에 한 곳뿐으로 시인만이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제 시장 안을 둘러볼 시간이다. “국동항/ 건너편 빌딩 창문 위에 열리는 시장/ 햇빛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좌판이 펼쳐진다/ 구름 선주가 위판한 물고기들/ 바다와 하늘 반반씩 닮았다/ 마실 나온 갈매기 부부/ 경매를 놓칠까 날개짓이 재빠르다/ 싱싱한 물고기 물고 수평선 구름집으로 날아간다/ 갯바람, 가격 흥정에 만족스러웠는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아는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왁자지껄한 장꾼들 풍경/ 이젠 파장의 시간/ 지친 태양이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허공에서 거둬들인 돈주머니가 볼록하다/ 낙찰되지 못한 모자란 것들,/ 밀물같은 노을이 창문을 다독인다”는 환상 공간에 실재한 ‘창문시장’은 손해 본 사람도 폭리 취한 사람도 없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 속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한 존재 의미를 언어의 상상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절묘한 발상과 순정한 마음이 시적으로 어떻게 발현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다. 김지란 시인의 사유는 엉뚱한 곳에서 발현한다. 전혀 시와는 먼 사물을 통해 시가 되는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똥꼬막>도 그런 예일 것이다. 시제詩題부터가 시골스럽고, 촌스럽다. 하지만, ‘똥꼬막’은 실제로 통용되는 바닷가의 날것 같은 참말이다. 날것은 살아있다는 것으로 미네랄이 풍부한 뻘에 서식하는 김지란 시인의 시적 몸체다. 시의 부분을 통해 전체를 공감할 수 있다면 진정해야 한다. “똥꼬막을 씻는다// 주름진 껍데기 짙은 뻘이 끼어있다// 손길 닿을 때마다 토하는 짠 속내// 제사상에도 오르지 못하는 똥꼬막”의 실상을 안다면 외면할 수 없다. 시인은 똥꼬막이란 사물을 통해 우리 사회가 만든 규범이 뻘에 박혀 사는 생명체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참과 똥이 동석同席한 둥그런 밥상// 날것의 바다가 수북하다”는 현실을 통해 언어의 오, 남용이 인간의 편의주의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규정한 똥꼬막도 똥과는 연관이 없는 꼬막일 뿐이다. 지금껏 김지란 시인의 시편들을 통해 피력하고 있는 시의성으로 다가가는 시간을 가졌다. 시인은 신선한 발상으로 ‘가막만’이라는 바닷가에서 성장기 체험한 사건들을 시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굳이 시를 ‘바다’라는 환경으로 구분 짓지 않아도 ‘가막만’, ‘망끝’, ‘발통기미’, ‘사스레피 꽃’, ‘불배’, ‘갯것’, ‘영 트는 날’, ‘순비기나무’ 등 이외에도 김지란 시인만이 발언할 수 있는 많은 언어가 시어로 유입되면서 변별성을 돋워주고 있다. 또한 그는 언어의 변별성뿐만이 아니라 사물이 갖는 본질에 대한 천착은 일상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의 환기를 통해 추구하는 김지란 시인의 시적 세계는 자아와 교감하며 공존하는 삶을 지향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적 언어와 세계가 일치하는 지점을 찾아가는 여정은 멀고도 지루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것은 지난한 시간으로 끝없이 애정을 쏟은다 해도 가시적인 성과는 쉽지 않다. 그런 시간을 잘 감내하기를 바라면서 김지란 시인의 미래와 문학적 성장을 한껏 기대해본다.
첫댓글 기다려지는 시집입니다.
얼른 받아 읽어보고 싶어지는 (^-^)
철영형님!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쓴
평론의 느낌이 물씬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