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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형이라고 불러라" 장기수가 추억한 '형님 신영복'
[현장]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 교수 영결식, 추모객 발 이어
[오마이뉴스 글:조혜지, 사진:유성호, 편집:장지혜]
"23살인가, 24살인가 만났어. 내가 신 선생님, 신 선생님 하니까 '신 선생님이 뭐냐. 가까움이 없다. 형님이라고 해라. 피로 만나는 것만이 형제는 아니다. 마음으로 하나 될 수 있으니까. 앞으로는 영복이 형이라고 불러라'고 하더라.
(감옥을) 나와서도 (형은) 내가 사는 걸 먼 곳에서 지켜봤다.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가를 보고. 한날은 주변 사람이 '신영복 선생님이 와있더라', 하길래 내가 쫓아나갔지. 저만치 가고 있는 거라. '형 배고프지? 밥먹자' 하니까 '그래 추어탕 먹자' 하더라고. 위장이 안 좋으니까 형은 항상 추어탕이야. (작고하기) 얼마 전에도 만났다. 생전 안 그러더니 '야 상은아 나 차 한 잔만 사줄래' 하대. 차 나눠 먹고 사진 찍고 헤어졌어. 그게 마지막이야."
교도소 같은 방 썼던 동료 "영복이 형이라고 불러라, 하더라"
노인의 주름진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영복이 형이라 불러라'하는 대목에서였다. 그는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교도소에서 6년간 같은 방을 쓴 '감방 동료'였다. 만 20년 7개월. 그도 고 신영복 교수와 마찬가지로 청·장년을 영어의 몸으로 살았다. 죄목은 '적진 도주', 국가는 평범한 군인이었던 그에게 '월북자'라는 죄를 씌워 감옥에 가뒀다.
"내란이라고 할만한 일을 하진 않았어. 군부독재 때 실제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았잖아. 그런 거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던 것 뿐이고. 입건된 후 형하고는 육군 교도소에서 만났지."
18일 오후 2시께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탄 운구차가 교정을 벗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박상은씨. "살아 있다고 생각해야지 뭐" 비통해하는 그에게 한마디 던진 권낙기 서울진보연대 고문도 기자에게 고 신영복 교수에 관한 추억 한 편을 들려줬다.
"가출옥(가석방)해서 며칠 전 떠나셨지. 내가 우스갯소리로 그랬어. 진짜 출소하셨구나, 사회라는 큰 감옥에서 말이야. 이제 진짜 자유인이다. 근데 기왕 출옥하실 거 만기 출소 하시지 왜 또 일찍 가출옥 하셨나. 안타깝더라고."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그는 1972년 당시 통일혁명당 경남도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그는 출소 후 신 교수를 찾아가 어리광도 많이 부리고, 요구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단체 재정 상황이 어려우니 '글 좀 써주시오' 읍소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신 교수는 "몇 장이나 쓰면 되겠노" 했단다. 권씨는 "어느날 내가 '폐만 끼쳤는데 (신영복 교수) 연구소에 몇푼 드리고 싶다'하니 '내가 붓글씨를 배운 게 장사하려고 배운게 아닐세, 그런 생각 아예 하지 마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신 교수가 복역할 당시 있었던 실화를 전하기도 했다. 권 고문은 "(고 신영복 교수가) 교도소에 있을 때 4번의 소장이 새로 왔다. 새 소장들이 올 때마다 (신 교수를) 찾아와 큰절을 하면서 '선생님' 하는 거다"라면서 "이건 그 사람의 명성을 듣고 오는 게 아니라 내뿜고 있는 인품에 감동해 찾아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정 교육감 "이별의 자리가 아니라 언약의 자리"
고 신영복 교수의 영결식엔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이른 시간부터 많은 조문객이 찾아들었다. 성공회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6일에는 3500여 명이, 17일에는 4000여 명이 조문을 왔다. 영결식 시작 시간인 오전 11시가 다가오자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많은 이가 분향소로 몰려 들었다. 백발 성성한 노인부터 아이를 등에 업은 아빠와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학교 성미카엘 성당 안은 오전 10시 20분께 모든 자리가 찼다. 영결식 이원 생중계를 위해 분향소 아래 마련한 피츠버그홀 250석도 오전 10시 45분께 한 자리도 빠짐 없이 조문객으로 채워졌다. 자리를 찾지 못한 조문객은 강당 좌우 벽에 서서 고인의 영결식을 지켜봤다. 스크린 위로 띄운 고인의 얼굴을 휴대폰으로 찰칵 찰칵 찍는 소리와 그의 생전 모습을 보며 훌쩍이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늘 나라에도 학교가 있다면 훈장 노릇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바라옵건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세월호에서 생을 마감한 어린 영혼들, 미처 배움을 얻지 못하고 사망한 수많은 불쌍한 어린 영혼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김기석 교목실장의 위 말과 함께 고 신영복 교수의 영결식이 시작됐다. 이날 영결식의 사회를 맡은 방송인 김제동씨는 신 교수가 생전 좋아했다는 주역 한 구절을 소개했다. 그는 사회를 보는 중간 중간 목이 메 잠시 숨을 고르는 모습도 보였다.
김씨는 "땅이 산을 품고있다는 (주역의) 궤인데, 우리가 산을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산을 우리 가슴 속에 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을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우리 땅 속에 신영복이라는 사람을 묻고 오늘 흘린 우리 눈물로 잘 키워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출소한 고인을 성공회대로 이끈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은 조사를 준비했다. 이 교육감은 "많은 나무들의 슬픔을 떨치고 가시렵니까. 아직도 그 나무들은 숲을 이루지 못하셨는데 선생님은 떠나시려 하십니까"하고 조사를 열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고인이 생애 마지막 저서인 <담론> 마지막 장에서 인용한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라는 구절을 언급하며 "선생님의 75년 삶 그 자체는 한 편의 담론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주신 그 언약, 이제 우리가 꽃으로 피워야할 차례다. 오늘은 선생님과 이별의 자리가 아니라 언약의 자리다. 우리의 단호한 결의를 선생님께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님의 제자 이재정 올림'으로 조사를 마무리한 이 교육감은 "이제 그동안 미뤄오신 자유로운 여행길을 즐겁게 떠나시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울지 마라, 다시 만나면 되지"
이어 윤미연 서울여대 초빙교수, 고민정 KBS 아나운서, 진영종 성공회대 교수회의장,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가 고 신영복 교수 앞에 추도사를 올렸다.
생전 고인을 인터뷰하며 인연을 이어온 고민정 아나운서는 고 신영복 교수의 딸이 되길 자처하면서 "세상에 선생님의 제자는 수 없이 많지만 다만 없던 한 자리, 딸이라는 자리를 제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이 생전 '서로가 서로에게 나무가 되어주라'고 당부했던 말을 상기하며 "벗이된 수많은 나무들과 함께 서로 위로가 되어주며 한걸음씩 떼겠다, 그 먼나라에서도 저희를 보아 주시라, 살펴주시라, 쓰다듬어 주시라"고 말했다.
성공회대 재학생 시절부터 신 교수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며 인연을 이어온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그에게 스승이 마지막으로 전한 말을 전했다. 그는 이 말을 전하면서 이따금 눈물을 쏟기도 했다. 아래는 그의 추도사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조문객들이 모두 (선생님과) 특별하고 각별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했다. 모두 어느 위인의 죽음을 대하는 의례적 슬픔이 아니라 저처럼 몸의 한 부분이 허물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고 있던 것 같다. 몇해 전 제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도 없을 때 선생님은 엄청난 비극이, 그만한 크기의 기쁨으로 위로 받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니가 찾을 수 있는 작은 기쁨이 위로가 될 거라고 하셨다...(중략)... 돌아가시기 전에 선생님이 제게 해주신 마지막 말씀을 여러분께 전하고 싶다. '울지마라, 울지말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되지.'"
가수 정태춘이 추모곡 <떠나가는 배>를 부른 뒤 슬픔에 빠진 유가족을 대신해 고 신영복 교수의 한 지인이 인사 말씀을 전했다. 그는 고인이 생전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과 국밥을 나눠 먹으며 조촐하게 송별해주길 바랐다는 것을 전하면서 "고인의 뜻보다는 지나친 송별이 됐지만, 고인도 기쁘게 여기리라 믿는다, 추운 날씨에도 각계각층에서 오셔서 고인이 떠나는 길에 함께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영결식 후 동료 교수들이 앞서 고 신영복 교수를 운구했다. 유족인 부인 유영순(68)씨와 아들 지용(26)씨가 뒤따랐다. 성당을 나온 운구 행렬은 국화꽃을 든 추모객 사이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고인의 관 위에는 국화꽃 한송이, 한송이가 모여 산을 이뤘다. 운구차에 그를 모신 후 유가족과 동료 교수들은 영정을 들고 그가 마지막 생을 보낸 연구실인 인문사회관 7604호를 찾았다. 추모객 대부분은 운구차와 장례 버스가 교정을 다 떠낼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이 엄마도, 21살 제자도, 감방 동기도 "존경한다"
마지막 휴가 첫날 영결식장을 찾았다는 정 아무개 병장은 군복에 군용 배낭을 멘 차림이었다. 그는 "군대에서 <담론>을 읽었다"면서 "스스로 반성도 많이하고, 인간답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개인적으로 찾아 뵙고 싶었는데 군 복무 중이라 힘들었다. 전역하고 찾아가도 늦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운 좋게 문상도 하고 영결식도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아들 둘과 함께 영결식에 온 최선희(43)씨는 "평상 시 정말 존경하는 분이다, 전날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쓰신 책도 보여줬다"고 말했다. 고인의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이제 마음 편하게 가시라고 말했다"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고인의 어린 제자들도 영결식에 함께했다. 이영익씨(성공회대 사회과학부 15학번)는 "지난해 1학년 1학기 (고 신영복 교수의) 여는 강의를 들었다, 인자하시고 솔직 담백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회대 자체에서도 교수님이 가지는 의미가 컸을 거다"라면서 "평소에 더 많은 강의를 접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크다"고 전했다.
동갑내기인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박서희, 오상지(24)씨도 영결식에 참석했다. 오씨는 "따로 수업을 안 들었지만 (성공회대) 학생들은 교수님을 다 안다, 멋있는 생각보다는, 그냥 마음이 찡했다"고 전했다. 박씨는 "20년 옥살이를 하시면서도 책을 쓰셨지 않나. 진정한 학자라고 생각한다"고 고인을 떠올렸다.
"내가 신영복 선생한테 가장 보고싶었건데 결국 못봤어. 화를 내는 걸 봤으면 좋겠는데... 화내는 걸 못 봤다. 아 저 양반은 사람인지, 부처인지 시험해보려고 약도 올리고 귀찮게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은근한 미소를 띠면서 하는 부탁 다 들어주더라고. 한 번은 특별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하면 사탕, 떡을 가져가서 먹기도 하거든. 그걸 가지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진 못한다고. 근데 (고 신영복 교수가) 간수 눈을 피해 가지고 사탕, 빵을 가슴 한편에 넣는 거야.
감방에 있는 죄수들이랑 나눠 먹겠다고. 집어 넣고 시치미 뚝떼는데. 인사한다고 "가입시데이" 하는 순간 툭툭 사탕이랑 떨어지는 거라... 감방에 돌아와서 "고마 들켜부렀다"하면서 웃었다고 하대. 그만큼 소박하다는 거라.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다른 이웃들 먼저 생각하고. 개울물이든 시냇물이든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다처럼 품는 사람이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한마디로 (고 신영복 교수에 대해) 그렇게 말해."
소탈했던 고인의 일화를 기자에게 들려주던 권낙기씨는 이따금 소리내 웃기도했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 대부분이 "그와 보낸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영결식 날 만난 많은 이가 그를 '바다'로 기억했다.
그를 떠나 보내는 날, 권씨의 말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넉넉한 품을 열고 누구든 받아들이고 안아 주는 시대의 스승으로, 그는 기억되고 있었다. 영결식 마지막 순서로 모든 추모객이 일어 서서 동요 <시냇물>을 불렀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고인이 생전 즐겨 불렀다는 노래다. 스크린 속 고인이 먼저 선창을 하고 이어 추모객이 가사를 이어 나갔다. 아래는 고 신영복 교수가 그의 저서 <강의>에서 말한 '바다'의 의미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 신영복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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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 낮은 곳에서 넉넉한 품을 열고 누구든 받아들이고 안아주는 시대의 스승"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을 위로하며 가르치시는 하늘의 선생님 되시옵소서.신영복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