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1~2, 정민, 천년의상상, 2019.
주지하듯이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던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 정조 사후 18년 동안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까닭에 정치가로서의 정약용의 활동은 단지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그의 저술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유배 기간의 생애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이 유배를 가기 전의 생애를 2권의 책으로 정리한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약용의 새로운 면모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의 평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일생이 아닌, 정조가 죽고 기나긴 유배가 시작되기 이전인 1800년 무렵에서 그 내용이 종결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저자는 그 이후 정약용의 활동을 별도의 책으로 저술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입어, 당시 소수파인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입안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부친의 복권과 노론의 견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소수파인 남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에 부응하여 정약용과 체제공 등의 활약이 있었던 것이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다수의 천주교도들의 처형으로 귀결된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정약용은 죽음을 겨우 면한 채 유배에 처해지게 되었다. 아마도 처음 유배를 떠날 당시에,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정약용은 살아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자들이 많았고, 그의 형제와 친척들 대부분이 천주교도로서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면한 정약용은 이후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견뎌야 했으며, 그 기간 동안 학자로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러한 학문적 업적으로 인해 이제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정약용을 연구했던 저자가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 그의 젊은 시절의 행적을 면밀히 추적하여 정리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저자의 문체로 인해 쉽게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정약용을 천주교도이자 정조가 총애하던 신하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저자는 정약용에 대해 ‘유배 이전의 키워드는 정조와 천주교’라고 단언한다. 정약용 스스로 천주교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곤혹을 치르고 천주교와 단절했다는 것이 그동안의 통설이다. 그러나 저자는 천주교가 단순한 포즈가 아니라, ‘그에게 생애 전체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단언한다. 실제 이 책을 읽으면, 왜 저자가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정약용은 정조를 제외하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당시 권력의 소수파였던 남인으로서 정조의 총애가 없었다면,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의 탁월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약용은 스스로 한때 천주교에 빠졌음을 고백하고, 이후 그것이 단순한 학문적 관심이었다고 밝힘으로써 다시 벼슬에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모두 ‘신유사옥’ 당시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아 18년 동안의 유배 기간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는 불행일 수 있겠으나, 정약용은 18년 동안의 기나긴 유배 기간에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여 후세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약용이 철저한 천주교도였다는 것을 전제로,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과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기록들을 토대로 정약용을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를 면밀히 서술하고, 특히 정조와의 특별한 인연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차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교와 정조, 그리고 강진과의 만남’이라고 하겠다. ‘정조’와 ‘강진’ 그동안 정약용의 연구에서 활발하게 다뤄졌기에, 천주교와의 만남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 책의 관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정조와 천주교에 대해서 저자는 ‘40세 이전, 다산에게서 이 둘을 빼고 나면 다산은 없다’고까지 단언할 정도이다. 그리고 1편에서는 정약용인 초기 천주교 10인의 신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단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주변 기록 등 다양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비록 그 스스로 천주교에 대한 배교 선언을 했음에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더욱이 만년에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가 평생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현재 그와 주변 사람들이 남긴 기록으로 보아 이러한 저자의 확신에 대해 여전히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저자의 말처럼 평생 천주교를 신봉했다면, 엄혹한 탄압이 자행되던 ‘신유사옥’ 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울러 신유사옥 당시 천주교도들을 밀고하고 잡아들이는데 협조하던 정약용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증 기록을 통해서 논하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저자처럼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특히 2편에서의 1790년대의 급박한 정국 상황을 돌아보면, 정약용은 그를 주시하던 비판 세력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절 정조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천주교도들을 체포하고, 또 정조 사후 ‘신유사옥’ 때는 천주교도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나아가 그들의 체포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배 기간 중 그의 활동은 천주교와는 거리가 있는 학문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정약용이 천주교도였다는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 면모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지하게 따져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만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당시 정적을 많이 만들었고, 때로는 오해가 쌓여 가까운 사람들과도 멀어지기도 했던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정치가로서 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정조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은 고난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이 그를 학문 활동에 매진하게 만들었던 요인이 되었고, 그가 저술한 업적들은 그를 대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 정약용보다 사상가이자 저술가로서의 정약용을 있게 한 유배 생활이, 당사자는 고난이라 여기겠지만 후세로서는 더욱 소중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당시 권력의 소수파였던 남인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하고, 그로 인해 남인들 사이에도 천주교로 인한 반목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기화로 당대 정치의 주류 세력이었던 노론들은 천주교 문제로 지속적으로 남인들을 공략했고, 정조가 죽은 이후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사옥’도 결국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단지 정약용의 생애뿐만이 아니라, 천주교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닌, 저자가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18세기 후반 정조시대의 정치사와 천주교의 초기 역사에 대한 풍부한 시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