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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영화에서 주체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과거의 영화에서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짙게 투영되어 있었다. 어쩌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각종 제도나 그것이 관철되는 면모가 모든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영화에 형상화된 여성 캐릭터가 연출자의 시각에 의해 굴절되었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여성 캐릭터를 새롭게 읽어내어 그 의미를 따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당대의 현실이 여성들에게 어떤 역할을 부과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여성 캐릭터 다시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있는 기획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에서 보내준 책의 속표지에는 “달리 바라‘봄’으로 ‘봄’날 같은 세상을!”이란 내용과 함께, 저자의 사인이 자필로 적혀 있었다. 미리 사인을 해 놓은 듯 ‘2019. 6’이란 시기에 맞춰, 독자들에게 늦봄의 기운이라도 전해주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달리 '봄'으로써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봄'과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생각해 보았다. 모두 12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저자가 겪은 여성 현실의 문제와 연결시켜 논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 책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페미니즘이 관점에서 깊이 있는 문제의식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에서 다룬 12편의 작품들 중에서는 내가 이미 관람한 작품도 있고, 아직 보지는 못했으나 내용을 알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제목을 처음 접한 작품들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설명을 따라 읽다 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현실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영화 ‘도그빌’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그레이스)에게 가해지는 마을 남자들의 암묵적인 집단 가해의 모습은, 최근 ‘미투 운동’의 와중에서 오히려 피해 여성들의 처신 운운하면서 논점을 흐리려는 움직임과 상통한다고 여겨졌다. 저자는 ‘도그빌’에서 가해지는 남성들의 집단 가해가 전혀 낯선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페미니즘이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가치’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팝콘 먹는 페미니즘>이란 제목을 보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영화에 나타난 의미를 조금은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감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현실이 떠올라,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심하게 기울어졌던 남녀의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각종 제도가 다소 여성친화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되면서, 남성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외치기도 하는 것이 엄연한 작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발생한 ‘여혐 문화’와 이에 대한 미러링으로 발생한 ‘남혐’은 지금도 심각한 갈등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개인이 겪는 '불편함'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용인되어 왔던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당위에서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당하는 캐릭터(카미유 클로델 등)에서부터 주체적인 세계를 구축해가는 여성들(안토니아스 라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실상 한국의 다양한 영화나 문학 작품들에서도 남성중심적인 제도 아래 억압된 현실을 살아왔던 여성 캐릭터의 형상은 보편적으로 존재해왔다. 그것이 당대 여성들이 겪었던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 작가나 여성 감독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작품 속에 그려진 여성 형상은 이제 확실히 달라진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여성 감독들에 의해서 새롭게 형상화된 작품의 면모나 여성 캐릭터의 면모는 주의 깊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형상이 앞으로는 더욱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중간중간에 ‘어떤 독자에게서’라는 제목 아래, 여성이 현실에서 느끼는 문제들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저자의 답변은 다양한 영화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와 작품의 주제 의식을 통해서 서술되고 있다. 우선 저자가 선택한 질문의 내용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읽어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 모두 3개의 항목이 배치된 내용들의 제목을 보면, ‘‘미투운동’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와 ‘탈 코르셋, 가부장적 시선을 탈피하다’ 그리고 ‘위대한 ‘맘충’과 모성신화’ 등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영화 속의 상황을 제시하고, 아울러 우리의 현실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이 항목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뒷부분에는 ‘영화와 함께 읽기 좋은 페미니즘 도서’라는 제목으로, 12편의 영화와 함께 저자가 소개하는 12권의 페미니즘 서적이 소개되어 있다. 이 역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단지 영화 속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 억압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남성중심적 제도와 사고의 실상을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여기에 소개된 영화들 중에서 아직 보지 못했던 작품들은 멀지 않은 꼭 관람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보았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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