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내용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철학적 고찰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어떤 의미에서 '삶과 죽음'은 순간에 의해서 갈라는 것이기에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의 제목처럼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 역시 책의 표지에 '어떤 시간을 사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가 달라진다'라는 문구를 제시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실상 '죽음'이라는 주제는 결코 가볍다고 말할 수 없기에, 그에 대한 논의 역시 자칫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랫동안 붙들고 고민해온 이 주제를 진지하지만, 또한 독자들에게 깊이 성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을 지우는 시간'이라는 프롤로그의 제목의 의미는, 아마도 죽은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동안 이 주제로 고민했던 자신의 사유 과정을 더듬어 보면서, '시간에 대한 사유와 죽음의 구원론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저자의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전체 4부로 구성된 목차에서, 가장 첫 번째에 놓인 1부의 제목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정의로부터 다양한 문화에서 발견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의미를 조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죽은 이후에 시신의 육탈 후에 다시 뼈를 추려 모시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의 교감을 위해서, 때로는 죽은 후에 그의 육신 일부에 대한 식인 의식이 행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죽은 후 육탈시키기 위해 시신을 일정 기간 가매장했다가 뼈를 추려 다시 장례를 치르는 이른바 '이중 장례식'의 풍속도 사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의미와 풍속을 다룬 이후에 2부에서는 '죽음의 해부도'라는 제목으로 '죽음'을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주로 '삶의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죽음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조망하고 있다. 나에게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고, 죽음이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현상학적 인식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해 그토록 고민한다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의지가 그에 비례해서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만이 죽음을 사유할 줄 아는 존재라는 볼테르의 언급이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스스로 한계를 자각한다는 서술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자각 속에서 현상되고 있기에 의미를 가진다는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지고 있다. 특히 2부의 후반부에는 '자실'이라는 주제를 여러 항목에 걸쳐 다루고 있는데, 일부 종교에서 그것을 금기시 혹은 죄악시하는 것은 '자살의 유혹'을 방지하려는 방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곧 죽음을 사색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역설이라고 하겠다.
"죽음과 시간은 유한성의 가장 명확한 표지이다. 시간의 유한성을 구획하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시간이다."(프롤로그 중) 죽음에 관한 의식과 시간의 문제를 다룬 내용에 이어, 3부에서는 '죽음 너머의 시간'이라는 주제로 죽음에 관한 인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직선과 원이라는 이분법적 은유를 통해 서술'되는 시간론에 대해서 먼저 설파하고 있다. 원으로 상징되는 시간론이 순환하는 삶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그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그리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직선은 회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정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순환론적 세계관에서는 죽음보다는 자기의 존재 근원을 찾는 신화와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일직선으로 인식하면서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 그리고 그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고찰을 하는 방법으로서 철학과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 가운데에서는 윤회를 내세우는 불교처럼 순환론적 인식을 보여주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중시하고, 특히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더욱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니, 이른바 종말론과 같은 이야기들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는지가 설명될 수 있었다.
모로스 케르타, 호라 인테르타.(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다!)라는 라틴 경구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3부에서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논리를 소개하면서, '기독교에 의해 점차 역사가 신화를 압도'하게 되었고, '죽음이 개인성의 파괴로 읽히면서 죽음의 문제가 첨예하게 부각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투우장의 신비'라는 항목에서 투우장에 투입된 소의 움직임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덧붙여 철핛적인 죽음과 기독교적인 죽음, 그리고 지식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 관점에서의 죽음의 의미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사라지는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시간이라는 존재 지평에 입각해서 죽음의 다양한 모습’과 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인간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은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잊히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이른바 장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음 개념에 집착하는 순간 어쩌면 ‘자연적인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뇌사와 안락사 그리고 존엄사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등장한 의학이 이제는 사람을 어디쯤에서 죽어야 좋은지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좋은 죽음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죽음’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문제를 고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죽음’이 아닌 ‘현재의 삶’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