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 1-2 [아나뱁티스트와 메노나이트]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맥락에서 뒤늦게 발현한 근원적 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이다. 사실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한 갈래로 자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세기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났던 아나뱁티스트 르네상스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에게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어떻게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아나뱁티스트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볼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뒤로 미루고, 이번 글에서는 아나뱁티스트와 메노나이트에 대한 관계정리를 하고자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운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운동 혹은 개혁의 움직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운동은 어떤 한 사람의 행위가 사회에 영향을 끼쳐 이전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기류와 흐름을 만들어 냈을 때 하는 말이다. 그 지역적 크기와 대상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운동의 규모가 결정되는 데 16세기 독일 마틴 루터에 의한 개혁은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과 중세시대의 가톨릭 체제를 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유럽의 개혁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히 세계사적 운동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큰 그림에서 종교개혁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을 아우르는 사회 전반의 개혁이었다. 그렇기에 좀 더 사회의 세부적 영역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몇개의 또 다른 움직임과 운동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문주의 학자들의 운동이라 이름을 붙이든, 교회의 개혁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농민들의 개혁 혹은 반란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한 그런 작은 운동들이 있다.
이 말은 종교개혁 안에 또 다른 개혁들이 많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지역을 대상으로 면밀히 살펴보면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의 지역에 따라 세분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주류 역사에서 자주 논의되는 개혁들을 손꼽아보자면 1525년 Black Forest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적 종말을 고한 토마스 뮌처(뮨쩌, 뮌쩌 등으로도 표기함)의 농민개혁이 있었다. 농민 반란 혹은 농민혁명이라고 부르며 훗날 저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추앙받는 그런 운동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루터의 개혁에서 힘을 얻어 일어났던 운동이었다. 꽤나 든든한 지지를 약속했던 루터는 뮌처를 돕지 않을 뿐아니라 훗날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루터의 개혁이 독일 중심의 개혁으로 일어났다면 츠빙글리가 스위스 취리히의 도시 개혁, 시의회 개혁으로 이 불씨를 이어받고자 했다. 독일의 작은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운동이 독일과 접경지역인 스위스 취리히로 연결되어 개혁교회를 태동시키는 불씨를 지폈다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칼뱅을 주축으로 한 제네바 중심의 개혁으로 운동이 더 번져갔다. 이러한 운동을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구분하여 개혁교회 전통이라 부른다. 동일한 시대의 종교개혁이었지만 루터의 개혁과는 조금 결을 달리하고 차별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이 개혁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루터나 칼뱅의 개혁교회 전통에 대해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
반면, 취리히의 츠빙글리 서클에서 시작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해서는 한 세대 전까지 한국어로 된 기록을 찾기 힘들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운동의 정신은 고사하고 아나뱁티스트나 메노나이트라는 이름 자체가 낯설 정도로 잘 소개되지 않았다. 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이 운동에 대한 수 많은 오해와 왜곡이 양산되기도 했다. 번역부터 메노파, 재세례파로 표기했다.
몇십년 전만 해도 우리는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식의 교육, 나와 다르면 적이고 같으면 동지라는 식의 잘못된 통념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세기 교회사가들이 밝힌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그 어떤 종교개혁보다 교회개혁에 있어 초대교회와 1세기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뿌리로 돌아가자, 근본적인 개혁, 근원적인 개혁을 주창했다는 의미로 학자들이 이 개혁을 Radical reformation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이 당시 radical 이라고 규정한 맥락 역시 긍정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아나뱁티스트 개혁은 루터교, 개혁교, 그리고 그 이후의 영국의 국교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운동이었다. 그만큼 다른 운동과 차별화되고 명확히 구분되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고 차별화된만큼 역사의 질곡 속에서 차별을 받았고 박해를 받아왔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시작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론이 있으나 그 시작일을 1525년 1월 21일로 잡는다. 1525년 1월 21일은 취리히 시의회가 츠빙글리 서클에 있었으나 츠빙글리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집회의 자유를 불허한 날이기도 하다. 사실 츠빙글리는 개혁의 대안으로 기독교의회를 구성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개혁의 속도가 늦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의회가 자신들의 모임을 금지하자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성경에 부합한 기독교 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신자들만으로 된 교회를 구성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츠빙글리 그룹에서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개혁을 꿈꾸던 사람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개혁을 주저하자, 소그룹운동으로 모여 새로운 모임을 갖게 된 것이 이 운동의 시작다.
이 운동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기존의 관주도 개혁과 결별을 선언하고, 당시 사회와 정부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대신 진실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면서 "신자들의 세례"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려서 세례를 받음으로 호적신고에 해당하는 절차를 밟았던 사람들이 스스로 유아세례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서로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에 (ana=re, baptist=baptizer) 다시 세례를 베푼 사람들, 혹은 다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토대로 세례를 주는 것은 당시에는 쇼킹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단이었고 더 나아가 정치적인 큰 문제가 되었다.
아마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하는 맥락은 16기의 친정부, 친가톨릭의 관점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실은 루터가 가톨릭으로부터 추방되어 이단아로 규정된 것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토마스 뮌처와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들과의 관계나 1534-5년에 뮌스터라는 도시에서 아나뱁티스트 그룹이 무장 봉기를 하다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패배했던 사건들이 평화주의자들이었던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 큰 장애가 되었다는 점은 늘 지적되어 왔다.
어쨌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루터의 개혁, 츠빙글리의 개혁, 칼뱅의 개혁은 잘 알려져 있으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운동의 건강성과 성경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역사적 상황을 훌쩍 뛰어넘어 500여년 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의 상황을 보더라도 아나뱁티스트와 메노나이트라는 단어는 여전히 생소하다. 더구나 북미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와 메노나이트라는 단어를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하기에 혼란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와 메노나이트에 대한 분명한 정의없이 처음부터 이 두 단어를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하여 이 두 용어를 분명히 정의하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아나뱁티스트는 하나의 운동이고 메노나이트는 그 운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 아나뱁티스트가 우산이라면 그 운동의 결과로 태동된 여러 그룹 중 하나가 메노나이트라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동생활의 후터라이트 (후터파), 아미시 (아만파), 스위스 형제교회처럼 메노나이트(메노파)는 하나의 아나뱁티스트 그룹인 셈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훗날 1860년 러시아에서 메노나이트 형제교회도 생겨났고,1920년 독일에서 부르더호프가 생겨났는데 이들 또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이라는 우산 아래 존재하는 그룹들이다.
이는 종교개혁이라는 큰 운동의 결과로 루터교( 루터란Lutheran)가 생겨났고, 취리히와 제네바의 개혁이라는 운동의 결과로 개혁교회 (Reformed church) 가 생겨났듯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결과로 메노나이트교회가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나뱁티스트는 운동이고 메노나이트는 교회(교단)인 셈이다.
한국에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성경적 교회, 근원적 개혁을 부르짖는 목회자들과 개교회들이 꽤 있다. 늘 그렇듯이 운동은 운동 그 자체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개혁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나뱁티스트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처음부터 그랬듯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핵심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교회의 원뿌리로 돌아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 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사는 늘 "교회를 교회답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없다. 이 운동이 박해로 인해 풍전등화에 있을 때 이 불씨를 다시 살린 메노 시몬스의 리더십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로 살아남은 교회가 바로 이 메니스트, 메노니스트, 즉 메노나이트인 것이다.
메노 시몬스는 순례전도자요 매노나이트 리더였는데 평생 도망자 신세로 살았다 한다. 그 와중에 많은 양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그가 쓴 모든 글 앞에는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린도전서 3:11 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