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슬기
정수경
greentree21@korea.com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가게 된 곳이었다. 기와집과 슬레이트집 사이 드문드문 초가집들이 보였고 꼬불꼬불한 돌담길이 있는 마을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시골 생활은 새로운 경험이면서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 황망한 변화였다. 그 생경스러운 분위기만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음식이 있었는데 ‘고디국’이었다. 다슬기 삶은 물로 끓인 쌉쌀한 맛과 다슬기 알이 모래처럼 버적버적 씹히는 불쾌감이 입안에 가득했다. 그곳에 흘러가게 된 상황과 같은 불쾌감이었다. 다슬기를 삶아낸 물은 비취색보다 더 파랬고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린 내 마음의 색깔이기도 했다.
다행히 마을 한가운데 넓은 폭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어색하고 두려운 내 마음을 살갑게 보듬어주는 듯했다. 종종 강가로 나가 친구와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슬프고 애조 띤 노래만 곧잘 불렀다. 어쩐지 강물 소리와 잘 어울리는 듯했고 강물도 우리의 노래에 애절한 비파 소리를 내며 화음을 맞춰주었다. 강 이름도 비파강이었다.
높은 건물이 없는 시골의 여름 하늘, 눈을 찡그리며 올려다본 태양은 살갗을 태울 듯이 가까이 있었다. 태양을 피하려고 낮에는 마을 아이들이 죄다 강물로 뛰어들었고, 밤에는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멱을 감느라 선녀탕이 되었다. 찬물에 몸을 담그기 싫은 어르신들은 어슬렁어슬렁 느티나무 아래 평상으로 밤마실을 나왔다. 피워 놓은 모깃불 탓인지 몰려오는 초저녁잠 탓인지, 졸린 눈을 하고서도 아들 손자 이야기에는 눈에 힘이 실렸다. 때마침 누구네 집에서 가지고 나온 수박이 쩍 벌어지자 밤잠도 ‘쩍’ 소리에 놀라 달아났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무료한 날도 제법 있었다. 그럴 땐 마을 뒷산을 돌아 넓게 펼쳐져 있는 시퍼런 보리밭 사이를 뛰어다녔다. 하릴없이 놀다가 목마름과 배고픔이 느껴지면 냅다 집으로 달려가 시원한 우물을 길어 올렸다. 물을 담은 양푼이에 미숫가루와 사카린 한 알을 넣고 휘휘 저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금방 부른 배에 만족하며 솟은 힘을 또 써야 했기에 친구와 함께 수경을 들고 강으로 갔다.
나무로 된 사각틀에 바닥에는 유리를 깔고 나무와 유리의 틈, 모서리는 촛농으로 봉한 것이 수경이었다. 물에 띄우면 일렁거리는 물결이 잠잠해져 다슬기를 잡기 쉽게 해줬고 다슬기를 담는 용기로도 쓰였다. 수경에 얼굴을 묻고 온 강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다슬기는 바위 밑 그늘진 곳이나 돌 틈을 들추어보면 모도록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전복을 발견한 해녀처럼 허겁지겁 다슬기를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운이 좋은 다슬기는 손가락 사이로 빠지면서 구사일생으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거나 바위 밑에 다시 숨었다.
물결을 잠재우는 수경은 확대경이 되어 깨알 같은 다슬기를 커다랗게 부풀리기도 했다. 수경유리의 속임에 먹지 못할 작은 다슬기를 건져 올리기도 했다. 자잘한 다슬기들을 눈여겨보았다가 후에 기대를 하고 다시 와보면 사라지고 없었다. 강물이 갑자기 불어난 날 몸을 맡겨버렸을까. 넓은 바다를 동경했을까. 지느러미가 없어도 그렇게 떠날 수 있는 다슬기가 부러웠다. 나도 가난뿐인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다슬기보다 잘 움직일 수 있는 발을 가지고도 강물에 붙어 움직일 줄 몰랐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라야 소름 돋은 몸에 파래진 입술을 하고서 물에서 나왔다. 수경 안에 다슬기를 제법 채우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서둘러 저녁을 먹고 수경과 손전등을 넘겨받아 집을 나섰다. 숨었던 다슬기들이 밤에는 바위 위에 죄다 나오는 걸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어깨 위로 내리는 어둠이 내 마음에도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자다가 인기척에 실눈을 뜨면 어머니는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 몸으로 내 옆에 누웠다. 어머니의 체온이 섬뜩하도록 차갑게 와 닿았다. 굵은 다슬기를 잡으러 더 깊은 곳으로 갔다가 죽을 뻔했던 강 아래 어둡고 차가운 느낌과도 같았다.
어머니의 다슬기는 제법 비싼 값에 팔렸다. 내가 잡은 자잘한 다슬기는 국이나 무침으로 상에 올랐다. 돈이 궁해질 땐 내가 잡은 두어 되나 되는 것도 한 되 값에 팔려나갔다. 그래서 여름엔 다슬기 덕택에 쌀도 사고 학교 육성회비 걱정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다슬기 때문에 어머니의 뼈마디에 깊은 골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익숙한 솜씨로 고디국을 끓여낼 때 내 입맛에 들지 않았던 쌉쌀한 맛도 시나브로 달게 변해갔다.
언젠가 강을 떠난 다슬기처럼 드디어 나도 그곳을 떠났다. 벌건 황톳물로 강이 범람할 때 탁해진 물과 세찬 물살이 다슬기가 떠나는 이유가 되었을까. 아버지의 벌이와 어머니의 다슬기 잡이로도 쉽사리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비파강이 싫었다. 오랜 가난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부산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부산에는 한없이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오래된 흑백사진에서 보았던 그 바다가 있었다. 영화배우를 닮은 어머니가 선글라스를 쓰고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가에 서 있던 사진이었다. 사진 속 환한 어머니의 얼굴에서 가난이 없는 곳이라 짐작하며 그곳을 동경하곤 했었다.
정작 넓은 바다가 있는 곳은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기분이었다. 멱을 감다 실수로 강물을 들이키게 되면 저항 없이 꿀꺽 삼켰는데 바닷물은 도무지 넘길 수가 없었다. 같은 물이어도 쉬이 마실 수 없는 것처럼 바다가 있는 곳은 만만치 않은 세상이기도 했다. 바다고둥은 크고 시원스럽게 생겼지만 알찬 속을 가지지 못한 껍데기는 허세를 부리는 듯도 했다. 때때로 속 빈 고둥 속을 파내는 허무함과 상실감이 들었다. 해운대 바다를 보며 여고 시절을 보냈고 여인이 되었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바다고둥이 되어가고 있었을까.
재래시장에 갔다가 쪼그려 앉은 시골 할머니 앞에 놓인 고무대야에 눈이 갔다. 대야 안에는 잊고 있었던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좁은 대야 안을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기어오르는 다슬기는 지난날 내 모습이었다. 반짝거리며 까만 윤기를 내는 다슬기들은 애써 대야 안을 벗어나도 이내 땅바닥에 떨어지거나 다시 잡혀 대야에 담겼다. 좁은 대야 안에서 희망을 꿈꾸며 좌절을 하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강을 떠난 내 삶도 때때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슬기는 결코 강을 떠나지 않았다. 강물이 불어 세차게 흐를수록 흡반을 바위에 더 밀착시켜 꿋꿋하게 견뎌내었다. 다슬기가 단단한 껍질로 여린 속살을 감싸고 지켜냈듯이 나를 단단하게 감싸고 다독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도 그 강물이 흘러나오는 땅속으로 돌아가 한줌 흙이 되던 날 내 눈물로도 강이 된 곳이다. 두 아이를 가졌을 때 유일하게 입덧을 가라앉혀주는 음식도 고디국이었다. 연어처럼 내 몸의 기억도 다슬기를 잊지 않고 비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입에 맞지 않았던 그 맛이 결국엔 익숙해진 것처럼 오래전 아픔들은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강물이 되고 있다.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낙동강 끝자락에 그리운 사람을 만난 듯 눈길이 머문다. 아득한 그곳에서 날아왔는지 물비린내가 풍긴다. 다슬기가 내 기억의 해감을 토하며 곰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