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구조대와의 거리 225,308,160km
포스터에 박힌 한 문장이 영화의 설정을 콕 집어주고 있습니다. 화성 탐사대가 폭풍우로 인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고로 한 명의 대원을 잃게 됩니다. 여러 정황으로 죽었다고 판단 결국 구조를 포기하고 탐사대원들은 지구로 귀환 길에 오르지만 알고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실종 대원 마크 와트니는 살아있었고 이제 홀로 화성이란 극한의 공간에서 생존해야 합니다. 구조대가 되어줄 다음 탐사선이 오기까진 4년이 걸리고 화성에 남아있는 생존설비는 31일 동안의 유지를 위해 설계되어 있습니다.
오지에 남겨진 1인이 극한의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의지와 기지로 생존해 결국 구조된다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고전인 로빈슨 크루소나 그것을 변주한 캐스트 어웨이, 실화에 바탕을 둔 127시간 같은 작품들이 얼른 떠오르네요.
이번 영화의 동명 원작 소설인 ‘마션’은 그런 설정을 우주로 확장합니다. 무인도나 황무지 등에서 전해지는 일말의 생존 가능성을 더더욱 희박하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이런 끔찍한 재난 속에서 생존하는 주인공의 무기는 식물학자이자 우주인으로서의 지식과 의지 그리고 낙천적 유머감각입니다.
원작 소설을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읽었는데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밤 늦게까지 들여다보며 거의 단번에 읽어 내린 기억이 있습니다. 상당히 전문적이고 정확한 과학적 내용들과 설정을 다루는 굳이 가늠하자면 하드한 쪽의 SF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 상황들과 생생한 캐릭터 그리고 유머로 시종일관 흥미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듭니다. 제법 상세하게 설명된 과학적 내용들도 중고교 시절 지식들을 더듬어 상기하면 어느 정도 쫓아갈 수 있게 서술되어 있고요. 구조계획에서 서술되는 우주선 비행에 관한 (지구의 중력을 이용한 슬링샷이라거나 하는...) 부분들은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먹을 수 있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건 작가로서 상당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드SF 소설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작가의 정보와 지식 전달에 치중해 독자층을 얇게 만드는 실수란 점에 비한다면 말이죠. (그렇다고 이 소설의 내용들이 엉성하다거나 얄팍하단 건 아니고)
아무튼 원작 소설은 SF로서의 성취 외에도 그 자체로 훌륭한 오락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영상으로 옮긴다고 할 적엔 여러 가지 난점들이 내재된 소설이기도 했지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앞서 언급한 과학적 내용들입니다. 대충 뭉개고도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과학적 사실이나 지식들에 관한 부분입니다. 어찌어찌 되어서 아무튼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는 거야란 부분을 화자인 와트니의 관점에서 적절하게 설명했기에 가능한 부분이지요. 하지만 이걸 영상으로 옮긴다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과학적 내용들에 관한 설명을 오로지 영상으로 전달할 것인지. 아니면 와트니의 독백을 넣어 맥가이버 식의 서술을 할 것인지. 어느 쪽이든 장단이 분명해져요. 게다가 이야기는 중후반에 걸쳐 상당 부분의 재미를 이 과학지식을 활용한 생존에 치중하고 있고요.
결국 여러 차례와 단계를 거친 선택과 집중의 문제가 연출상의 난맥으로 걸립니다. 하지만 노장이자 SF 쪽에도 한 방귀 뀌시는 스콧 옹께서는 이를 훌륭하게 해결합니다. 사건이나 서술들을 적절히 생략하고 화면에 가능한 효율적으로 정보를 담아내며 동시에 원작에선 어떤 식이었을지 막연했던 와트니의 독백을 비디오 로그라 설정하여 파운디드 푸티지 장르에서 흔히 사용하는 연출까지 적절히 동원해 원작 소설을 보지 않은 관객도 충분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각색에 어려움을 던지는 부분은 기본적 설정입니다. 지구와 화성 탐사서 헤르메스라는 구조 측의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션은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 1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워낙 낙천적이고 비디오 로그를 통해 적절히 수다를 떨어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영상으로 옮길 적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모습만 담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미처 말을 안 했지만 마션은 화성 탐사라기 보다는 화성의 농경생활을 다룬 농사 다큐적 성격도 짙다는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원작은 충실하게 재현할 망정 영화는 하품 나게 지루할 수도 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대규모 예산이 투여된 기획으론 절대 실현되기 힘든 어떤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이때에 떠오르는 작품이 몇 년 전 개봉한 로버트 레드포드의 거의 모노 드라마에 가까웠던 생존극 ‘올 이즈 로스트’입니다. 이 영화는 요트 여행을 나갔다 사고를 당하고 망망대해에 조난 당한 노년이 주인공이 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대자연과 사투를 벌이지만 점점 상황이 나빠지는 생존극입니다. 무전마저 초반부에 먹통이 된다는 설정인지라 영화의 90퍼센트 이상 전혀 대사가 없습니다. 오로지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하는 인물의 행동과 시선으로 정보를 전달할 뿐이지요. 이를 상당히 훌륭하게 해낸 영화이긴 하지만 오로지 시각정보에 의존하다보니 쉽사리 지루해지고 피곤해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괜히 ‘실험적 연출’ 따위의 말들이 존재하는 게 아니지요.
올 이즈 로스트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원작 마션 역시 영상으로 옮길 적에 상당히 유사한 난점을 가지게 될 처지였습니다. 실재로 다수의 비디오 로그가 나오긴 하지만 영화의 가장 극적이고 흥미로운 초중반은 전혀 대사가 없어요. 마크 와트니를 연기하는 맷 데이먼이 혼자 이것저것 하는 모습을 그저 보여주기만 하지요. 영상 속에 충분한 정보들이 녹아들어 있지만 그걸 따라가는 건 관객의 몫인 겁니다. 역시나 노장 감독은 이런 부분에서 자신의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는데요. 원작에선 수 페이지에 걸쳐 서술되는 농사장면이나 후반부 로버 개조 장면들은 영상만으로 아니면 최소한의 대사만으로 설명이 됩니다.
원작의 훌륭함 그리고 그것을 영상으로 옮기는 연출의 원숙함에 대해 충분히 얘기를 했다면 이제 영화 자체로서 어땠는지에 대해 감상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시간이 20분이 살짝 넘는 러닝 타임의 영화는 원작이 그러하듯 우주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액션적 요소가 적습니다. 실질적으로 액션이라고 할 만한 것은 후반부 EVA 장면 정도가 전부지요. (좀 관대해지자면 초반부 폭풍 장면까지도 가능하겠네요) 액션으로만 치자면 유사한 소재의 영화인 ‘그래비티’ 쪽이 훨씬 강렬합니다. 갈등을 부추기는 악당도 없고 대자연, 아니 대우주와의 사투라지만 원작 소설의 거의 유일한 구라라는 폭풍 장면을 제외하곤 딱히 난점도 없어요 (그냥 화성 자체가 재앙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은 없습니다. 조난측인 화성도 구조측인 지구도 끊임없이 해결할 문제들을 던져줌으로서 긴장을 끌어올립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생경하고 난해할 수 있는 과학적 소재들을 이해하고 쫓아가려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잘 짜여진 추리물을 보는 느낌마저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합니다. 애초에 워낙 믿음직한 사람들로 들어차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맷 데이먼은 여러모로 완벽한 마크 와트니였습니다.
인터스텔라에서 연기한 캐릭터와 비교하는 인터넷상의 농담들이 많더군요. 심지어 제시카 챠스테인도 양쪽 모두에 등장하면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요. 어느 정도 의도된 캐스팅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작 소설의 마지막은 기이하게도 소설 전체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는데요. 지금까지 전하려는 이야기를 마치 요약하든 스스로 전달하는 부분이 오글거리고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선 이 부분은 와트니의 독백 대신 지구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몹신으로 대체합니다. 최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적절한 대안이란 생각은 들더군요. 물론 이 부분이 촌스럽다는 반응도 있는데 원작처럼 와트니의 독백으로 처리했다면 외려 더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게다가 영화판은 그에 더하여 나름의 에필로그를 덧붙입니다. 원작에서 담지 못한 의미까지도 확장되는 이 부분은 사족이 아니라 상당히 괜찮은 보너스란 느낌이더군요.
+
원작에도 등장하는 대원 중 1인의 취향 덕분에 영화는 내내 디스코 풍의 흥겨운 음악들로 가득합니다.
주인공의 낙천적 성격과도 잘 어울리고 이를 가지고 이어지는 농담들도 재밌습니다.
특히나 로버 내부의 난방을 위해 '위험한 물질'을 실내로 들여온 다음에 곧장 나오는 도나 서머의 '핫 스터프' 같은 경우는 잊기 힘들죠.
+
한 차례 구조 작전의 실패 후, 한 연구원이 생각해낸 계획을 두고서 나사 관계자들이 회의를 갖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에 구조작전에 임시로 붙인 명칭이 '엘론드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원작 소설에서도 나온 농담인데요
특히 영화판에선 바로 그 회의 장면에 '보르미르' 숀빈 배우가 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어서 빵 터지게 만들지요.
첫댓글 그래서 잣잣은?
2년 가까운 시간을 한정된 행동을 루틴하게 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생길수 밖에 없는데 영화에서는 그러한 시간적 변화는 최소화하고 맷 데이먼이 스스로 구조되기 위해 취한 행동들을 사건적으로 표현하더군요. 맷 데이먼의 루틴한 삶을 분량에서 빼먹은 만큼은 지구에서 일하는 다양한 나사 담당직원들의 관계와 사건으로 채워진 것은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화성에서 혼자 살아가는 주인공과 대원을 버리고온 동료들은 물론 난항이 계속되는 구조 계획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나사 직원들 모두를 유머가 넘치는게 표현한 것이 이 작품을 좋은 오락 영화로 만들어낸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