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그리고
50년 전인가, 부산이란 데를 처음 다녀오신 어머니가.
“너무 쬐끄만헤서 실망했어.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데……서울에 비해 너무 작다. 이.”
그렇게 호미날 들고 생강밭 고샅으로 몸을 감췄는데.
30여 년 전인가, 나는 늦깎이 신랑이 되어 부산 광한리 겨울바다로 신혼여행 행선지를 정했다. 그럴 때였다. 돈이 있는 벗들은 비행기 타고 제주도 패키지를 누렸지만 대개 부산, 경주, 설악산에서 신혼의 꿈을 그렸고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한머리 동네 형님과 누이들은 온양온천이나 수덕사를 감지덕지하던 시절.
자갈치 시장 어디쯤에서 고래 괴기와 호박죽도 곁들이며 아마 장급 여관 정도에서 행복을 구가했던 것 같다. 주머니 지폐감촉을 손가락으로 감지하며 짯짯이 쪼개 쓰던 시절……항구도시 한반도 제2 도시 부산의 규모를 따질 엄두가 없었다.
수십 년 전 얘기이다. 그 후 태어난 아들, 딸들 모두 미루나무처럼 쭉쭉 커서, 아비 혼자 가끔.
“도대체 이 자식들은 언제 둥지를 트는 거여?”
그건 그렇고.
후배 작가들과 찾아온 부산은 화들짝 비상한 21세기 풍경이었다. 저무는 어둠 탓이었을까, ‘돌아와요 부산 갈매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싱가포르에서나 만날 법한 고층 건물 불빛과 동남아 본토인보다 키가 크고 잘 생긴 부산 시민 그리고 젊음의 쭉쭉 빵빵들……이제 억센 겡상도 사투리도 보이지 않았다.
횟집 2층 창문에서 바라본 해운대 대교도 휘황해서 멀거니 구경만으로 본전을 뽑는 마음이었으나. 하필 배가 아팠다. 간밤에 이슥토록 조우한 주님 탓이다. 화려한 횟감에는 아예 젓가락을 대지 못한 채 밤길의 부산 시민 얼굴만 감상하며……요즘 나는 몸이 아프면 자꾸 죽음을 연관시킨다. 연륜을 차치하고라도 엄살일 확률이 높긴 한데.
필리핀 보홀 섬의 건물들은 3층 이상이 없었고 오토바이에 양철을 뒤집어 씌운 채 불안한 3인승인 트라이시클로 운반을 해줬고 키 작은 사람들은 친절이 몸에 배어 있었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꼬치구이를 시켰을 때. 40대 주인 부부는 20분 내내 숯불에 굽느라 땀을 흘렸고 100페소(2000원)을 받으며 세 번 이상 등허리를 굽신거렸다. 돌아오는 거리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필리핀여행이 끝나고 인천공항에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미래도시로 이동한 느낌이었다. 그랬다. 고가도로를 즐비하게 에워싼 조명들이 호프집 불빛보다 화려했다. 불안을 먹고 성장한 자본주의의 약진이 놀랍다.
계단에 올라서면 스스로 열리는 자동 문 그리고 화려한 조명,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이 카페처럼 화사하니 돈만 있으면 행복한 세상이다. 내 2세들이 자본의 혜택 속에서 21세기를 그렇듯 보내리라.
그렇게 자본의 쓰나미에 취했다가 돌아서는 내 마음은 아리고 수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