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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世家
許 穆
沸流․溫祚는 句麗始祖朱蒙二子也라 與太子類利로 不相能이라가 及類利立에 兄弟二人이 與烏干․多黎로 亡至河南이라 沸流는 歸彌鄒忽하고 溫祚는 歸慰禮라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의 두 아들이다. 태자 유리(類利)와 서로 융화하지 못하다가 유리가 즉위하자 형제 두 사람이 오간(烏干)․다려(多黎)와 함께 도망하여 하남(河南)에 이르렀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귀착하고 온조는 위례(慰禮)에 귀착하였다.
* 비류(沸流):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 아들 북부여에서 남하한 배다른 형 유리(類利 : 유리왕 瑠璃王)가 태자가 되자, 동생 온조(溫祚)와 부하들을 이끌고 남하, 한산(漢山)에 이르렀으나 온조와 도읍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져 미추홀(彌鄒忽 : 인천 仁川)에 도읍을 정했다. 온조가 도읍을 정한 하남위례성(河南慰醴城 : 광주 廣州)보다 미추홀은 저습하여 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흩어지자 백성과 온조에게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살했다.
* 온조(溫祚): 백제를 건국한 시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북부여에서 태어난 유리(고구려 제2대 왕)가 고주몽을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온조는 한강 이남으로 남하하였다. 비류는 인천에 터를 잡았고, 온조는 BC18년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하였다. 재위 BC18년~AD28년.
* 能: 화목하게 지내다.
* 다려(多黎): 《국역 동사강목》 제1상 계묘년 조와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 직산현〉의 기록에는 ‘마려(馬黎)’로 되어 있다.
溫祚는 有良佐十人하여 國號十濟라한데 沸流死하고 幷有其地하며 改國號曰 百濟라 與句麗로 同出扶餘하여 以扶餘爲氏하고 立始祖東明王祠라 其立國은 當漢鴻嘉三年(紀元前 18年, 신라 혁거세 40年)이라
온조에게는 보좌하는 훌륭한 신하 10명이 있어서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는데, 비류가 죽고 그 땅을 병합하면서 국호를 백제라고 고쳤다.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로 氏를 삼고,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웠다. 나라를 건립한 시기는 한(漢)나라 홍가(鴻嘉) 3년에 해당한다.
與靺鞨로 相攻伐에 用乙音爲右輔하여 治兵事하며 築城馬首하고 立栅甁山이라 樂浪太守ㅣ 使告曰 城不隳하고 栅不毀면 請一戰決之라한데
말갈과 서로 공격하여 전쟁하게 되자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아 군사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마수(馬首)에 성을 쌓고 병산(甁山)에 울짱〔柵〕을 세웠다. 낙랑 태수(樂浪太守)가 사람을 보내 알리기를, “성을 허물지 않고 울짱을 부수지 않으려면 한번 싸워 결판내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는데,
王謝曰 堅城設險은 封疆之固也요 執事ㅣ 恃強出兵이면 小國도 亦嚴兵以待라하다 樂浪이 連靺鞨하여 襲破甁山이라
왕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성을 견고하게 하고 요충지에 방비 시설을 하는 것은 국경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오. 집사께서 강함을 믿고 군대를 출동시킨다면 소국도 군사를 정돈해 놓고 기다릴 것이오.” 하였다. 낙랑이 말갈과 연합하여 병산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王이 遣使馬韓하여 定疆域이라 北自浿江으로 南盡熊川하고 東至走壤하며 西極大海라 築城闕于漢山하여 徙慰禮民人以實之하고 遂徙居焉이라
왕이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영토의 구역을 정하였다. 北으로 패강(浿江)에서부터 南으로는 웅천(熊川)을 다하고 東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며 西로는 대해(大海)에 닿았다. 한산(漢山)에 성궐(城闕)을 쌓아 위례의 백성을 옮겨서 채우고, 마침내 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 패강(浿江): 대동강의 옛이름. 패수와 같은 뜻이다.
立國母祠하고 制祀壇하여 以享天地神祇․五帝之神이라 王宮에 鴻雁集이어늘 日者曰 當有遠人至라한데 南沃沮ㅣ 來라
국모(國母)의 사당을 세우고, 제단(祭壇)을 지어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궁에 기러기가 모여들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먼 곳의 사람들이 이르러 올 것입니다.” 하더니, 남옥저(南沃沮) 사람들이 귀의해 왔다.
* 입국모사(立國母祠): 국모는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어머니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를 말한다. 《국역 동사강목》 제1장 계묘년 조의 기록에 의하면, 소서노는 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는데, 후에 우태가 죽고 주몽(朱蒙)이 졸본에 이르자, 주몽과 결혼하여 고구려를 세우는 데에 내조가 많았다고 한다. 주몽의 아들 유리(類利)가 즉위하자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는데, 온조가 백제를 세운 후 13년에 소서노가 죽었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 사당을 세운 것이다.
* 오제지신(五帝之神): 다섯 방위의 상제(上帝)로, 동방의 청제(靑帝), 남방의 적제(赤帝), 서방의 백제(白帝), 중앙의 황제(皇帝), 북방의 흑제(黑帝)를 말한다. 진(秦)나라 때에 동방, 남방, 서방, 중앙 네 곳의 상제에게 제사하였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북방의 흑제를 세워 제사하였다고 한다. 《漢書 卷25 郊祀志上》
立熊川栅하니 馬韓國君이 責讓溫祚曰 王이 初濟河而南에 無尺寸地라 我割百里地以與王하니 待大王不爲不厚온 及國完民聚에 不見報德하고 反侵犯我疆域하니 此何義也오하니 溫祚ㅣ 慙而毀之라
웅천에 울짱을 세우자, 마한의 군왕이 온조를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하수(河水)를 건너 남쪽으로 왔을 때 한 치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00리 땅을 잘라 왕에게 주었으니, 대왕을 대우한 것이 不厚한 것이 아니었는데, 나라가 완비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은덕을 갚지는 않고 도리어 나의 영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무슨 의리입니까?” 하니, 온조가 부끄럽게 여겨 울짱을 허물어 버렸다.
明年에 宮井溢하고 有馬生牛한데 一體兩頭라 卜之曰 國以昌大하여 幷有隣國이라하니 溫祚大悅하여 與群臣謀曰 馬韓이 削弱하여 百姓離心이라 兼弱攻昧는 霸王之大權이니 時不可失也라하고 佯出獵하며 襲破馬韓하여 盡有其地로되 惟圓山․錦峴이 不下러니 仍伐之에 二城下하니 馬韓亡하다
이듬해에 왕궁의 우물이 넘쳐흐르고, 말이 한 몸에 머리가 둘 달린 소를 낳는 이변이 있었다. 점을 치니, 점사(占辭)에 이르기를, “나라가 번창해져 이웃 나라를 병합할 것이다.” 하였다. 온조가 대단히 기뻐하며 뭇 신하들과 도모하여 말하기를, “마한이 깎이고 약해져서 백성의 마음이 떠났다. 약한 나라를 겸병하고 혼매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패왕(霸王)의 큰 권한이니,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고, 거짓으로 사냥을 나가는 체하면서 마한을 습격하여 깨뜨려 그 영토를 모두 차지하였다. 다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이 함락되지 않다가 이어 계속된 정벌로 두 성이 함락되니, 마한이 망하였다.
大旱으로 東北諸部落飢하여 亡入句麗하니 浿帶之間이 空無民居라 乙音死하고 解婁代之라 解婁는 年九十(七十)餘로되 有神知不老라 溫祚立四十六年卒하고 子多婁立하다
큰 가뭄이 들어 동북의 여러 부락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니, 패수(浿水)와 대방(帶方) 사이가 텅 비어 거주하는 백성이 없었다. 을음이 죽고, 해루(解婁)가 대신하였다. 해루는 나이가 90여 세로 신령스러운 지혜가 있었으며 늙지 않았다. 온조가 즉위한 지 46년 만에 졸하고, 아들 다루(多婁)가 즉위하였다.
東部屹于ㅣ 與靺鞨로 大戰於馬首下하여 斬首虜甚多라 賞良馬十粟五百하다 下令國南州縣에 始作漑田하다 靺鞨ㅣ 陷馬首하고 燒其城이라
동부(東部)의 흘우(屹于)가 마수(馬首) 아래에서 말갈과 큰 전투를 벌여 목을 베고 사로잡은 적병이 매우 많았다. 상으로 양마(良馬) 10마리와 곡식 500석을 내렸다. 영을 내려 나라 남쪽 지역의 주현(州縣)에서 벼농사〔漑田〕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말갈이 마수를 함락하고, 그 성을 불태웠다.
多婁卒하고 子己婁(3대왕 在位77~128年) 立이라 卒하고 子蓋婁(4대왕 在位128~166年)立이라 卒하고 子肖古(5대왕 在位166~214年)立이라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하고 虜獲千人이라 新羅大發兵伐之하니 百濟懼하여 還虜獲乞和하다
다루가 졸하고, 아들 기루(己婁)가 즉위하였다. 졸하고, 아들 개루(蓋婁)가 즉위하였다. 졸하고, 아들 초고(肖古)가 즉위하였다.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의 서쪽 변방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0명을 사로잡았다. 신라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자 백제가 두려워 사로잡은 사람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後에 百濟ㅣ 與羅兵으로 戰於蛙山하여 大破之하다
肖古卒하고 子仇首(6대왕 在位214~234年)立이라 靺鞨이 圍赤峴하니 仇首ㅣ 親率勁騎하고 擊破之하다 仇首卒한데 子沙伴(7대왕 在位234年)幼不慧하여 國人이 立肖古母弟古尒(8대왕 在位234~286年)하다
후에 백제가 신라의 군사와 와산(蛙山)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초고가 졸하고, 아들 구수(仇首)가 즉위하였다. 말갈이 적현(赤峴)을 포위하자, 구수가 직접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쳐서 무찔렀다. 구수가 졸하였다. 아들 사반(沙伴)이 어리고 지혜롭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초고의 동모제(同母弟) 고이(古爾)를 세웠다.
置佐平六官하니 曰內臣은 掌宣納하고 曰內頭는 掌庫藏하고 曰內法은 掌禮儀하고 曰衛士는 掌宿衛하고 曰朝廷은 掌獄刑하고 曰兵官은 掌兵事하다 又置達率․恩率․德率․扞率․奈率과 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과 文督․武督․佐軍․振威․克虞의 十六品하다
좌평(佐平) 6관(官)을 두었다. 내신좌평(內臣佐平)은 선납(宣納)을 관장하고, 내두좌평(內頭佐平)은 창고의 보관을 관장하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와 의식을 관장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숙위(宿衛)를 관장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을 관장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은 군사의 일을 관장하였다. 또 달솔(達率), 은솔(恩率), 덕솔(德率), 한솔(扞率), 내솔(柰率), 장덕(將德), 시덕(施德),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위(振威), 극우(克虞)의 16품을 두었다.
* 선납(宣納): 임금의 명령을 널리 알리고 신하의 상주를 임금에게 여쭈는 일.
* 달솔(達率): 백제(百濟)의 십육(十六) 관등(官等) 가운데 둘째 등급(等級).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裝飾)하고 옷은 자줏빛(紫朱-)이었다.
* 한솔(扞率): 백제(百濟)의 관계. 십육품(十六品) 관등(官等)의 다섯째 등급(等級)으로 보랏빛 관복에 은화(銀花)를 꾸몄음.
佐平․五率은 服紫요 五德은 服緋요 二督․佐軍․振武․克虞는 服靑이라 國君은 紫袍大袖에 靑錦袴․素革帶․烏革履라 立贓法하여 贓은 禁錮하고 官人으로 受財及盜는 徵三倍라
좌평과 5솔은 의복이 자색(紫色)이고, 5덕은 의복이 비색(緋色)이고, 2독, 좌군, 진무(振武), 극우는 의복이 청색(靑色)이다. 임금의 복장은 소매가 넓은 자색 도포, 청색 비단 바지, 흰색 가죽띠, 검은 가죽신이다. 장법(贓法)을 확립하여 뇌물을 받은 자는 금고(禁錮)에 처하고, 관인(官人)으로서 부당한 재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한 자는 세 배를 징수하였다.
* 진무(振武): 15품으로, 진위(振威)와 같다. 《동사강목》에도 〈도하(圖下) 문무산계연혁(文武散階沿革)〉에는 ‘진위’로, 제2상 경진년 1월 조와 제2하 임자년 8월 조에는 ‘진무’로 되어 있다.
古尒卒하고 子責稽(9대왕 在位286~298秊)立하다 貊人來侵伐에 責稽ㅣ 親率兵拒之라가 爲所殺이라 長子汾西(10대왕 在位298~304秊)立한데 又爲樂浪刺客所刺殺이라 子幼하여 國人이 以仇首子比流(11대왕 在位304~344秊)ㅣ 久在民間하며 寬仁愛人하여 共立之라 問民疾苦하고 賜窮人無所告者穀人三石이라 卒하고 汾西長子契王(12대왕 在位344~346秊)立이라 卒하고 比流子近肖古(13대왕 在位346~375秊)立이라
고이가 졸하고, 아들 책계(責稽)가 즉위하였다. 맥인(貊人)이 와서 침략하자, 책계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막아 싸우다가 피살되었다. 맏아들 분서(汾西)가 즉위하였는데, 또 낙랑에서 보낸 자객의 칼을 맞아 피살되었다. 아들이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구수의 아들 비류(比流)가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남을 아낀다 하여 함께 그를 세웠다. 백성의 질고를 묻고, 고할 데 없는 궁한 사람들에게 곡식 3석씩을 내려 주었다. 비류가 졸하고, 분서의 맏아들 계왕(契王)이 즉위하였다. 졸하고, 비류의 아들 근초고(近肖古)가 즉위하였다.
句麗來侵이나 大敗而歸라 近肖古ㅣ 帥精兵三萬하고 攻平壤하여 射殺其王釗라 禿山民三百奔新羅라 初置博士라 近肖古卒하고 太子近仇首(14대왕 在位375~384秊)立이라 卒하고 子枕流(15대왕 在位384~385年)立하다 遣使如晉이라 有胡僧摩羅難陀ㅣ 至自晉하여 佛法始行이라 枕流卒한데 太子阿莘ㅣ 幼하여 其弟辰斯(16대왕. 在位385~392年)立하다
고구려가 침략해 왔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근초고가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여 그 왕 쇠(釗)를 화살로 맞혀 죽였다. 독산(禿山)의 백성 300명이 신라로 달아났다. 처음으로 박사(博士)를 설치하였다. 근초고가 졸하고,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즉위하였다. 졸하고, 아들 침류(枕流)가 즉위하였다.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냈다.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晉나라로부터 와서 불법(佛法)이 비로소 행해졌다. 침류가 졸하고, 태자 아신(阿莘)이 어려서 침류의 동생 진사(辰斯)가 즉위하였다.
* 쇠(釗):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초명은 ‘사유(斯由)’이고, 일명 ‘국강(國岡)’이라고도 하였다. 《국역 동사강목 제2상 신묘년 2월》. *故國原王: 16대왕. 재위 375~384년.
* 禿山民三百奔新羅: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반란을 일으켜 백성 300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국역 동사강목 제2하 계유년 7월》
大發丁壯하여 設關防하니 自靑木嶺으로 北距八坤城하고 西至于海라 大獵狗原七日하다 治宮室하고 多聚異草木奇禽하고 又大獵狗原이러니 卒於狗原하다 枕流太子 阿莘(17대왕 在位392~405年)立하다
대대적으로 정장(丁壯)을 징발하여 관방(關防)을 설치하니, 청목령(靑木嶺)에서 북쪽으로 팔곤성(八坤城)까지 뻗치고 서쪽으로 바다까지 닿았다. 구원(狗原)에서 7일 동안 대규모의 수렵을 하였다. 궁실을 수축하고 신기한 초목과 새들을 많이 모아들였으며, 또 구원에서 대규모의 수렵을 하더니, 구원에서 졸하였다. 침류의 태자 아신이 즉위하였다.
* 관방(關防): 변방(邊方)의 방비(防備)를 위하여 설치(設置)한 요새(要塞).
* 청목령(靑木嶺): 경기도 개성 서북방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삼국의 영.
遣左將眞武하여 伐句麗라 戰於浿水上이나 大敗하여 死者八千人이라 欲雪浿水之恥하여 大擧者再而皆不利還軍하다 明年에 又大徵發하니 百姓怨之하여 多奔新羅라
좌장(左將) 진무(眞武)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패수 가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8000인이었다. 패수에서의 치욕을 씻으려고 대대적으로 거병한 것이 두 번이었으나 모두 전세가 불리하여 환군(還軍)하였다. 이듬해에 또 대규모로 징발하니, 백성이 원망하여 신라로 달아난 자가 많았다.
阿莘卒한데 太子腆支ㅣ 質於倭하여 次子訓解ㅣ 攝政하며 以待太子歸한데 少子碟禮(설예)ㅣ 殺其兄自立한데 腆支至에 國人殺碟禮而立腆支(18대왕 在位405~420年)하다 卒하고 子久尒辛(구이신. 19代王 在位420~427年)立하다 卒하고 子毗有(비유. 20代王 在位427~455年)立하다 卒하고 子餘慶立하니 是爲蓋鹵王(개로왕. 21대왕 在位455~475年)이라
아신이 졸하고, 태자 전지(腆支)가 왜(倭)에 볼모로 있었으므로 둘째 아들 훈해(訓解)가 섭정(攝政)하며 태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막내아들 접례(碟禮)가 자기 형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전지가 이르자 나라 사람들이 접례를 죽이고 그를 세웠다. 전지가 졸하고,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즉위하였다. 졸하고, 아들 비유(毗有)가 즉위하였다. 졸하고, 아들 여경(餘慶)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개로왕(蓋鹵王)이다.
發東北部丁壯하여 築沙口城하다 王欲伐句麗하여 乞兵於魏로되 魏不許하니 王怒하여 遂絶魏라
동북부의 정장을 동원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다. 왕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위(魏)나라에 군사를 요청했으나 위나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마침내 위나라와의 국교를 끊어 버렸다.
句麗募에 浮屠覺琳이 僞得罪來하여 以博奕見王이라 說以治城池하고 高宮室하고 大園囿하며 作石槨하여 更先王之葬하다 國內空하고 百姓離散하니 句麗王ㅣ 親率三萬兵來伐之하여 直趨王都急하니 王以數十騎遁去라가 爲怨民所執縛하니 麗王ㅣ 殺之라 子文周(22代王 在位475~477年)立하여 遷都熊津하다
고구려의 모집에 응한 부도(浮屠) 각림(覺琳)이 거짓으로 죄를 짓고 와서 바둑 두는 것으로 왕을 알현하였다. 왕을 설득하여 성과 해자를 수축하고, 궁실을 높이고 원유(園囿)를 넓히며, 석곽(石槨)을 만들어 선왕의 장사를 다시 지내게 하였다.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고 백성이 흩어지자 고구려 왕이 직접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정벌하였다. 곧장 왕도(王都)로 달려와 급하게 치니, 왕이 수십 기(騎)로 달아나다가 원한을 품은 백성에게 붙잡혀 결박되었다. 고구려 왕이 그를 죽였다. 아들 문주(文周)가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 구려모(句麗募): 《국역 동사강목》 제2하 을묘년 9월 조에 고구려가 백제를 도모하기 위해 간첩을 모집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 각림(覺琳): 《국역 동사강목》에는 부도(浮屠)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였다고 되어 있다.
耽羅ㅣ 貢方物이라 耽羅는 或曰 耽毛羅니 南海中小國이라 佐平解仇ㅣ 擅權이나 王不能制라 王出獵에 解仇ㅣ 令盜弑之라 太子三斤(23代王 在位477~479年)立하다
탐라(耽羅)가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탐라는 혹 탐모라(耽毛羅)라고도 하니, 남해 가운데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좌평 해구(解仇)가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나 왕이 제압하지 못하였다. 왕이 수렵을 나갔을 때, 해구가 도적을 시켜 시해하였다. 태자 삼근(三斤)이 즉위하였다.
德率眞老ㅣ 討解仇誅之하다 三斤卒하고 文周弟昆支子牟大立하니 是爲東城王(24代王 在位479~501年)이라
덕솔 진로(眞老)가 해구를 토죄(討罪)하여 처형하였다. 삼근이 졸하고, 문주의 동생 곤지(昆支)의 아들 모대(牟大)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동성왕(東城王)이다.
魏ㅣ 遣兵伐百濟나 大敗라 百濟大飢하여 盜賊多起하니 流民入新羅者六百家요 入句麗者二千이라 起臨流閣하고 諫者에 皆不報한데 王出獵에 芍加ㅣ 使人殺之라 子斯摩立하니 是爲武寧王이라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백제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많이 일어나자, 신라로 들어간 유민(流民)이 600가호였고 고구려로 들어간 사람이 2000명이었다.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간하는 말에 답을 하지 않았는데, 왕이 수렵을 나갔을 때 작가(芍加)가 사람을 시켜 시해하였다. 아들 사마(斯摩)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무령왕(武寧王)이다.
* 작가(芍加): 《국역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 백가(苩加)〉에 ‘작가’는 ‘백가’의 잘못임을 밝히고, 《북사(北史)》를 근거로 백씨(苩氏)는 백제 8대 성(姓)의 하나이고, 음은 ‘백(白)’이라고 하였다.
* 무령왕(武寧王): 백제의 제25대 왕으로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뒤 혼란에 빠져 있던 백제를 안정시켰다. (재위 501~523).
加ㅣ 據加林叛하니 王討之에 加出降이나 斬之하다 句麗ㅣ 襲取加弗․圓山하고 虜獲千餘라 王出擊하여 大破之하다
작가가 가림(加林)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토벌하였다. 작가가 나와 항복하였으나, 그를 참수하였다. 고구려가 가불(加弗)과 원산(圓山)을 습격하여 취하고, 포로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나가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梁ㅣ 冊王寧東大將軍하다 王薨하고 子明禯立하니 是爲聖王이라 遷都泗沘하고 改國號曰 南扶餘라 遣使如梁이나 侯景ㅣ 已滅梁이라 景ㅣ 囚使者라 後景平에 使者乃還이라 王伐新羅한데 軍主武力ㅣ 擊殺王하고 斬佐平四人하며 士卒死者二萬九千六百人이라 子昌立하니 是爲威德王(27代王 在位554~598年)이라
양(梁)나라가 왕을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왕이 薨하고, 아들 명례(明禮)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쳐 남부여(南夫餘)라고 하였다.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후경(侯景)이 이미 양나라를 멸한 뒤였다. 후경이 사신을 수금하였다. 후에 후경이 평정되고 나서야 사신이 돌아왔다. 왕이 신라를 정벌하였는데, 신라의 군주(軍主) 무력(武力)이 왕을 쳐서 죽이고 좌평 4인의 머리를 베었으며, 사졸로 죽인 자가 2만 9600인이었다. 아들 창립(昌立)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위덕왕(威德王)이다.
* 성왕(聖王): 백제의 제26대 왕. 재위 523~554년. 무령왕의 아들로 태어나, 3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왕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백제의 부여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일본에 불교를 전하는 등, 대일관계에서도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 후경(侯景): 남북조 시대 사람으로 자는 만경(萬景)이다. 양무제(梁武帝) 때 하남왕(河南王)에 봉해졌으나 반란을 일으켜 대성(臺城)을 함락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였다. 곧 간문제를 죽이고 스스로 한제(漢帝)라 칭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왕승변(王僧辯) 등에 의해 멸망되었다. 《梁書 卷56 侯景列傳》
* 군주(軍主) 무력(武力): 무력은 김유신(金庾信)의 조부(祖父) 김무력(金武力)이다. 본래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김구형(金仇衡)의 아들로 신라에 귀화하여 553년(진흥왕14)에 군주가 되었다. 《국역 동사강목 제3상 계유년 7월》
齊ㅣ 冊王爲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하다 薨하고 子惠王季明(28대왕 在位598~599年)立이라 薨하고 子法王宣(29대왕 在位599~600年)立이라 下令嚴佛戒하여 禁殺生하고 禁網罟라 大作興王寺라
제(齊)나라가 왕을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 왕(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훙하고, 아들 혜왕(惠王) 계명(季明)이 즉위하였다. 훙하고, 아들 법왕(法王) 선(宣)이 즉위하였다. 영을 내려 불계(佛戒)를 엄격하게 하였으며, 살생을 금하고 그물로 고기 잡는 것을 금했다. 흥왕사(興王寺)를 대규모로 지었다.
王薨하고 子武王璋(30代王 在位600~641年)立하다 穿大池於王宮之南하고 灌水爲海라 王이 遊泗沘北浦한데 名其浦曰 大王浦라
왕이 훙하고, 아들 무왕(武王) 장(璋)이 즉위하였다. 왕궁의 남쪽에 대규모의 못을 파고 물을 대어 바다처럼 만들었다. 왕이 사비(泗沘)의 북쪽 포구에서 놀았는데, 그 포구의 이름을 대왕포(大王浦)라고 하였다.
隋大業八年(612秊)에 發天下兵百三十萬衆하여 伐句麗라 王이 遣使請爲向道하고 嚴兵境上하니 實持兩端以觀望이라 隋師ㅣ 大敗而歸라
수(隋)나라가 대업(大業) 8년에 천하의 군사 130만 무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향도(向導)가 되기를 청하고 국경에서 군사를 엄중히 하였으니, 사실은 양쪽 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며 관망한 것이었다. 수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唐武德七年에 百濟ㅣ 入貢于唐하니 唐冊王爲帶方郡公百濟王이라 薨하고 太子義慈(31代王 在位641~660年)立하다 王이 親率衆伐新羅하여 取四十餘城하고 又遣將陷大野하니 軍主品釋이 出降하니 軍亂이라 品釋이 先殺其妻하고 自刎而死라 百濟ㅣ 取其尸而歸하고 留兵守之라 又攻新羅나 連敗於買利라
당(唐)나라 무덕(武德) 7년에 백제가 당나라에 입공(入貢)하니, 당나라가 왕을 대방군공 백제 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훙하고, 태자 의자(義慈)가 즉위하였다. 왕이 직접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를 정벌하여 40여 개 성을 취하고, 또 장수를 보내 대야(大野)를 함락하였다. 군주(軍主) 품석(品釋)이 나와 항복하자 군사가 혼란해졌다. 품석이 먼저 자기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백제가 그의 시신을 취하여 돌아가고 군사를 남겨 지키게 하였다. 또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매리(買利)에서 연달아 패하였다.
* 당무덕칠년(唐武德七年): 무덕은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로, 7년은 서기 624년이고, 신라 진평왕 46년이다.
* 매리(買利): 매리포성은 645년(선덕왕 14)에 백제와 신라의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김유신의 출정으로 신라가 승리하였다. 그 위치는 낙동강 남안의 경남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일대로 비정된다. 매리포성은 낙동강 수로의 주요 포구였던 매리포를 감시 통제하기 위한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大野道隡에 大將殷相死하고 士卒亡者ㅣ 前後八萬餘人이라
有衆狐ㅣ 入王宮하고 鬼夜哭이라 又有鬼入王宮하여 大號百濟亡하고 忽入地라 掘地得龜한데 其背有文曰 百濟月滿하고 新羅月新이라한데 有巫釋之曰 月滿者虧하고 新者盈이라하니 王怒殺其巫라
대야와 도살(道薩)의 전투에서 대장 은상(殷相)이 죽고, 사졸로 죽은 자가 전후로 8만여 인이었다.
여우가 무리 지어 왕궁으로 들어오고, 귀신이 밤에 곡을 하였다. 또 귀신이 왕궁에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부르짖고 홀연 땅속으로 들어갔다. 땅을 파서 거북이를 얻었는데, 그 등에 “백제의 달은 차고, 신라의 달은 새롭다.〔百濟月滿 新羅月新〕”라는 글이 있었다. 무당이 그 뜻을 해석하기를, “달은 차면 이지러지고, 새로우면 차게 되는 법입니다.”하니, 왕이 노하여 그 무당을 죽였다.
起望海樓於王宮之南이라 王都泉井이 赤하고 泗沘水도 赤이라 西海群魚死하고 蝦蟆集樹上萬數하여 市人相驚走라가 有僵死者라
왕궁 남쪽에 망해루(望海樓)를 세웠다. 왕도(王都)의 샘과 우물이 붉고, 사비의 물도 붉었다. 서해에서 물고기가 떼 지어 죽고,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로 모여들어 저자의 사람들이 서로 놀라 달아나다가 넘어져 죽는 자가 있었다.
義慈淫亂을 佐平成忠諫하니 義慈ㅣ 怒以爲謗己라하여 囚之하니 成忠이 不食死라 臨死에 上書言 忠臣은 死不忘君이라 相時占變하니 兵革已兆라 有亂이면 守上流하여 毋令敵兵先得險阨라하고 遂死獄中이라
의자의 음란함을 좌평 성충(成忠)이 간하자, 의자가 노하여 자기를 비방한다고 하며 옥에 가두었다. 성충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었다. 죽음이 임박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시세를 보고 변이를 점쳐 보니, 전쟁의 조짐이 이미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상류를 지켜서 적병으로 하여금 험준한 곳을 먼저 차지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大野之敗軍主品釋之妻는 新羅國君之女也라 旣積怒於濟하여 日以滅濟爲謀러니 親乞兵於唐矣라
대야의 전투에서 패하여 죽은 군주 품석의 아내는 신라 국왕의 딸이었다. 이미 백제에 노여움이 쌓여 날마다 백제를 멸망시킬 궁리를 하더니, 직접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顯慶五年(660秊)에 唐이 遣蘇定方하여 率水陸兵十三萬人하고 伐百濟하고 勅新羅王爲行軍摠管하여 以助兵威라 新羅以太子法敏․上大等庾信에 率精兵五萬하고 與唐兵會於德物이라
현경(顯慶) 5년에 당나라가 소정방(蘇定方)에게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고, 조칙을 내려 신라 국왕을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 군사의 위세를 돕도록 하였다. 신라가 태자 법민(法民)과 상대등 유신(庾信)에게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덕물(德物)에서 회합하게 하였다.
佐平興首ㅣ 忤於王하여 旣斥去한데 王ㅣ 急遣人하여 問於興首曰 事急矣니 爲之奈何오하니 興首曰 拒塞白馬炭峴하고 以待食盡하여 擊之면 可破也라
좌평 흥수(興首)가 왕의 뜻을 어겨 이미 쫓겨나 있었는데, 왕이 급히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묻기를, “사태가 급하니,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니, 흥수가 말하기를, “백마강(白馬江)과 탄현(炭峴)을 틀어막고, 적국의 군량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左右皆曰 興首ㅣ 自以非罪로 久入牢獄하여 常怏怏怨望하니 其言은 不可信用也라한데 大兵이 已過白馬炭峴하여 直趨王都라 將軍階伯이 受命하고 先殺其妻子하고 率死士出戰이라 羅兵이 四戰四却이라
좌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흥수는 스스로 죄도 없이 오래 옥에 갇혀 있다고 여겨 항상 앙앙불락하며 원망하였으니,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런데 대군이 이미 백마강과 탄현을 지나 곧장 왕도로 쳐들어왔다. 장군 계백(階伯)이 명을 받고, 먼저 처자식을 죽인 다음 죽음을 각오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신라 군사가 4번을 싸워 4번을 물러났다.
階伯이 力戰死之하니 義慈歎曰 悔不用成忠之言이라하고 與太子孝로 夜遁去하여 保熊津이라가 詣定方降이라 諸城皆下하니 百濟亡하다
계백이 온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의자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하고, 태자 효(孝)와 함께 밤을 틈타 도망하여 웅진을 보전하고 있다가 소정방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여러 성이 모두 함락되니, 백제가 망하였다.
百濟는 自溫祚至義慈히 三十世요 凡六百七十八年이라 新羅王與唐將이 置酒大享將士라 坐義慈於堂下하고 使之行酒하니 百濟群臣이 皆欲死泣下라 定方이 以義慈及太子孝와 諸王子貴臣將士八十八人과 百姓萬二千八百七人으로 歸하다
백제는 온조로부터 의자에 이르기까지 30세이고 모두 678년이다. 신라 왕과 당나라 장수가 술을 차려 놓고 장수와 군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의자를 당 아래에 앉게 하고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뭇 신하가 모두 죽고 싶은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소정방이 의자 및 태자 효와 여러 왕자, 귀신(貴臣), 장수, 병사 등 88인과 백성 1만 2807명을 데리고 돌아갔다.
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하고 使郞將劉仁願으로 留鎭泗沘城이라
義慈ㅣ 死於唐이라 詔葬孫皓․陳叔寶塚傍이라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개 도독부를 두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남아서 사비성(泗沘城)을 진무하게 하였다.
의자가 당나라에서 죽었다.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唐이 以王子隆으로 爲熊津都督하여 歸國與新羅釋憾이라 新羅王與扶餘隆이 盟于熊津이라 其誓曰 各除宿憾하고 結好和親하노니 有背盟侵犯者는 神明監之하여 禋祀磨滅이라하고 旣歃血에 埋牲幣하고 藏其書於祖廟라
당나라가 왕자 융(隆)을 웅진 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나라로 돌려보내 신라와 감정을 풀도록 하였다. 신라 왕과 부여융이 웅진에서 맹약하였다. 맹약문에 이르기를,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 관계를 맺어 화친하노니, 맹약을 어기고 침범하는 자는 신명(神明)이 살펴 제사조차 남아 있지 않게 할 것이다.”하였다. 삽혈(歃血)하고 나서 희생과 폐백을 땅에 묻고, 맹약서를 조묘(祖廟)에 보관하였다.
後에 唐加隆帶方郡王하여 令返國安輯餘衆이라 隆이 畏新羅不敢歸하고 寄治句麗死하니 百濟遂絶이라
후에 당나라가 융에게 대방군왕(帶方郡王)을 더하여 나라로 돌아가 남은 무리를 편안히 정착시켜 다스리게 하였다. 융이 신라가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지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백제의 왕통이 마침내 끊어졌다.
贊曰 百濟는 自溫祚로 以強戰立國하여 專務富國強兵하니 雖享國長久하여 傳六七百年이라 然이나 特強暴之國으로 世無遺風善俗이라 國君으로 以強戰殺死者ㅣ 四君이니 亦可爲有國者之戒라
贊曰 백제는 온조로부터 강력한 전투력으로 나라를 세워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썼으니, 비록 장구한 세월 나라를 누려 6, 7백 년을 전하였으나, 단지 강포한 나라일 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훌륭한 풍속이 없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무리하게 전쟁을 벌이다가 죽은 왕이 4명이니, 이 또한 나라를 소유한 자들의 경계가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