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은 예술에 대한 검열에 찬성합니다.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는 독재 체제가 거의 자취를 감춘 20세기의 3/4분기, 즉 1980년대 이후에는 의미를 잃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는 자유방임으로 인해 예술이 피폐해 지는 것이 기업의 탐욕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구매할 수 있는 화폐 시스템의 탓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소비자의 선택 또는 취향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도 어리버리한 소비자를 현혹해 이득을 얻으면서도 지구 온난화라든가, 소비자의 도박(또는 성형, 또는 쇼핑, 또는 게임) 중독이라든가, 그로 인한 가족 해체 같은 불행에는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는 기업의 이기심을 지적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예술이 피폐해진다면 기업의 탐욕보다는 소비자들의 잘못된 기호(嗜好)가 좀 더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알랭 드 보통의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알랭 드 보통의 주장은 “엘리트 비평가가 상품의 예술성에 대해 검열하되, 기업과 부자가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상품의 소비자가 검열의 적용 대상, 또는 시혜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귀결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는 곧 국민을 의미합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어떻게 검열 대상이 될 수 있나고요? 이에 대한 그의 주장은 「검열을 위한 변명」(p221∼p227)에 나와 있습니다. 일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민이 선출한 정부가 그 답이다.... 검열을 찬성하는 주장의 핵심에는 현대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태도가 놓여 있다...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는 독재 체제가 거의 자취를 감춘 20세기의 3/4분기까지만 유효했다...”
저는 솔직히 1980년대 ‘이전의 검열’과 ‘이후의 검열’이 다르다는 시대적 특수성에 대해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매우 겸손한 말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강력한 공동 기구(사회주의 정당과 노조)가 ‘과학적’인 역사관에 입각해서 이데올로기라는 가짜 세계, 또는 허위의식에 빠진 소시민들에게 세계를 진짜 제대로 판독해 주겠노라는 엘리트주의적인 ‘꼰대’ 논리와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은 2월 10일(토) 4시 사과나무 치과 5층에서 열리는 ‘임영근이 안내하는 책읽기’ 모임이 긴장감 없이 훈훈한 분위기로 흘러갈까봐 경계하면서 쓴 글입니다. 저는 이번 책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미술을 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의 미술관(perspectives in art)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책모임 시간에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더불어 위에서 제기한 저자의 ‘검열’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그럼 2월 10일에 뵙겠습니다.
첫댓글 아~~책은 진작 사놓고 많은 컬러 그림에 흐믓해 하기만하고 읽지도 못하고 노느라 시간이 날아갑니다.
다 읽고 갈 수나 있을지~~~
다 못 읽더라도
소비자의 고민하는 태도를 거친 작품들은 어떤것인지 알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