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허진석)
소설을 읽는 독자는 주인공에 동화된다. 아예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꿈을 꾸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 그 속을 노니는 나비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 관객은 대개 주인공과 한편이 된다.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 톰(알랭 들롱)은 친구의 심장에 단도를 꽂은 살인자다. 하지만 형사들이 톰을 체포하려는 마지막 순간, 관객들은 아련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난파당한 사나이,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상륙한 직후부터 우리는 그의 생존이 우리의 문제인 양 집착하는 것이다.
크루소는 영국의 대니얼 디포가 쓴 소설의 주인공이다. 디포는 런던 사람이다. 태어난 날은 불분명하지만 죽은 날(1731년 4월24일)은 확실하다. 1719년에 발표한 '로빈슨 크루소'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이다. 조난을 당해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강 하구 근처 무인도 해변에 표류한 크루소는 스물여덟해 동안 자급자족한다. 18년째 되던 해에는 식인종에 붙들린 프라이데이를 구출하여 하인으로 삼고, 마지막에는 무인도에 기착한 영국의 반란선을 진압해 선장을 구출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기독교도의 눈으로 소설을 읽으면 고립무원이 된 한 인간의 영적순례기이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를 깨달아가는 종교적 성찰 과정을 그려냈다. 현대에 다시 읽는 로빈슨 크루소는 인종차별과 근대의 오만, 서구우월주의, 제국주의의 범벅이다. 유럽 백인인 주인공은 흑인 청년을 하인으로 삼고 기독교 세례를 준다.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을 상징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의 독자와 작가는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읽고 '겹쳐' 읽고 '되받아'쓰려 한다.
이권우는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겹쳐 읽는 예로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험프리 리처드슨)'과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미셸 투르니에)'을 든다. 리처드슨의 책은 '혈기 넘치는 크루소가 성욕을 어떻게 해결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가 품은 서구 중심적 사유를 비판한다.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존 쿳시가 다시 쓴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도 있다. '포(Foe)'. 소설은 크루소의 섬에 한 여자가 표류하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크루소에 대한 모든 신화를 재점검한다.
포에 나오는 크루소는 비열하고 고집스러운 늙은이다. 섬에서 탈출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쿳시는 주인공인 수전 바턴의 시각으로 크루소와 프라이데이, 소설가 디포를 새롭게 해석한다. 서구의 정전을 패러디하는 탈식민주의 문학의 대표적 기법인 '되받아 쓰기(write back)'를 통해 소설과 경험 사이의 간극을 살펴보면서 소설의 의미와 구상에 대해 묻고 있다.
그러나 디포의 소설을 너무 야박하게 읽고 싶지는 않다. 로빈슨 크루소는 여전히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가 성욕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몰라도 28년 세월 동안 지키고자 분투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한 사나이의 무인도 행적으로 서구 근대사회를 비판하려던 디포의 진심도. 서구우월주의와 인종차별, 기독교 우선주의는 계몽의 시대를 살아간 디포가 어찌할 수 없는 굴레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