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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의 철교'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의 철교’, 1873년
Le Pont du chemin de fer à Argenteuil , 60x98.4cm,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철교 위를 달리는 기차가 말해주는 것
“멀지 않은 장래에 철도로 인해 어떤 업종들은 멸종될 것이고 다른 몇몇은 그 면모가 일신될 텐데, 특히 파리 근교를 누비는 교통편과 관련된 업종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만간 여기 이 정경은 그것을 구성하는 인물들과 사물들로 인해 고고학적 작업의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의 소설 <인생의 첫출발>에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문장이다. 발자크의 소설은 오스망의 근대화가 있기 이전, 그러니까 여전히 퀴퀴한 중세의 냄새를 풍기고 잇던 파리의 풍경을 사진을 찍듯이 그려내고 있다. 발자크의 소설은 어떻게 ‘뻐꾸기 마차’를 사라지게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뻐꾸기 마차는 4~6인승 소형 마차인데, 18세기 초에서 19세기 초까지 파리 외곽과 도심을 연결해주던 교통수단이었다. 이 마차를 뻐꾸기 마차라고 부른 까닭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달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뻐꾸기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뻐꾸기 마차는 곧 ‘옴니버스’에게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옴니버스는 라틴어로서 ‘만인을 위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처음에 합승마차를 일컫다가 나중에 자동차가 나온 뒤에는 합승하는 운송수단을 지칭하게 되었다. 1826년 처음 파리에 등장한 이후에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7월 왕정이 의도적으로 보급하면서 유력한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옴니버스가 뻐꾸기 마차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더 많은 승객들을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뻐꾸기 마차는 단거리 운행으로 전략을 바꾸어 명맥을 유지했지만, 열여덟 명의 승객을 태운 쌍두마차인 옴니버스가 성공하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발자크는 전한다.
레저와 관광을 위한 운송수단의 교체 - 철도의 등장
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발자크가 단번에 얼마나 많은 승객을 태우는가에 따라서 교통수단의 성패가 좌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뻐꾸기 마차에서 옴니버스로 주요 운송수단이 바뀌는 까닭은 못 말리는 파리지앵의 ‘근교 사랑’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파리지앵의 관광과 레저를 위해 운송수단의 대대적인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더 많은 승객들을 더 빠르게 근교로 데려갔다가 데려오기 위한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의 철교’ 1874 카미유 피사로 ‘루앙의 풍경’ 1898
발자크가 언급하듯이 철도의 등장은 그때까지 각축을 벌였던 운송시장에 폭풍을 모라온 사건이었다. 비좁은 옴니버스에 열여덟 명씩이나 타고 이층까지 매달려서 위태롭게 달리던 승객들은 이제 편안한 객실에 앉아서 그림처럼 스쳐가는 바깥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73년에 모네가 그린 ‘아르장퇴의 철교’는 발자크의 예견을 현실화한 풍경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철교가 강을 가로질러 가고, 그 위로 기차가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지나간다. 피사로는 위의 그림 ‘루앙의 풍경’처럼 평소 공장 풍경을 즐겨 그렸지만 모네는 의도적으로 공장 풍경을 그림에서 지워버리곤 했다. 그런 모네가 기차를 빈번하게 그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바꿔보면 기차에 대한 모네의 호기심은 실제 풍경의 공장을 그리지 않은 까닭과 그렇게 모순을 이루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상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차는 근교로 레저를 즐기러 가는 파리지앵의 쾌락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관광지에 가서 찍는 사진처럼, 모네의 그림이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여가를 통해 발견하는 ‘즐거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차는 이러한 여유로운 나들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문명의 이기인 것이다.
산업화의 변화를 나타내는 기차를 구경하는 시선
물론 겉으로 평온한 일상을 담고 있지만, 앞서 발자크가 묘사한 것처럼, 기차는 산업화와 공존하면서도 갈등할 수밖에 없는 파리지앵의 모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파리지앵이 보여주는 근교의 풍경에 대한 유별난 애착은 산업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와 이를 통해 상실한 전원생활에 대한 향수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파 역시 이런 모순을 감지하고 있었다. 인상파의 파격은 야외에서 스케치한 그림을 스튜디오에서 완성하는 전통적 제작 방식을 탈피했다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인상파 이전에도 야외 스케치는 그렇게 낯선 작업이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인상파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아예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염료 산업의 발달로 물감을 휴대용으로 간편하게 색색들이 작은 튜브에 담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인상파의 야외 작업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빠른 시간 내에 편리하게 근교로 이동해서 마음에 드는 자연 풍경을 담아내게 해주었던 기차의 출현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잇을 것이다.
이렇게 인상파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근교로 여가를 즐기러 나온 관광객들에게 훌륭한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관광객들은 화가를 둘러싸고 이 ‘신기한 화가들’의 작업을 ‘구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욕설이나 조롱을 퍼부으면서 훼방을 놓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렇게 잠재적 고객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그림을 그렸던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인상파를 최고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들도 초기에 이들을 못살게 굴었던 그 자본주의의 소비자들이었다.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 1867
흥미롭게도 모네가 1873년에 그린 ‘아르장퇴의 철교’는 이제 경계마저 사라져버린 파리와 근교의 풍경을 보여준다. 기차가 달려가는 풍경은 더 이상 ‘전원’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역설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그림의 시선은, 앞서 살펴보았던, 1867년에 그린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와 같은 노르망디 풍경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기차에 대한 모네의 시선은 초기에 보여줬던 그 관광객의 시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기차를 ‘구경’하는 시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코뮌을 피해 영국에 머물던 모네가 프랑스로 돌아와 거처를 마련한 곳이 아르장퇴유이다. 아르장퇴유는 센 강변에 있는 파리 근교 지역이다. 이곳은 후일 카를 마르크스가 머문 동네이기도 하다. 모네가 화폭에 담은 풍경을 마르크스도 보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모네의 집에서 두 집 걸러 위치한 곳에 살았지만, 아쉽게도 모네가 떠난 뒤에 아르장퇴유로 이사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둘이 조우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역사에 만일은 있을 수 없지만,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철교’를 보면서 이런 실없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글 이택광(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