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날개'를 읽고, (박제된 천재의 날개로 날수 있는가?(好友)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괘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레이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요.’
이상이 지향하던 자의식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나는 박제된 인간일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를 통하여 실재적인 나의 모습을 표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상, 그는 인간을 그 의식의 면에서 관찰하고 절망 의식에 빠졌던 최초의 정신적 파산자였으며, 또한 자기 자신도 희생할 가망이 없던 폐병 환자였다.
나는 바로 이상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그래서 더욱 확신이 가는 것이다.
뭇 사람들은 이상의 추도회에서 “이상의 예술은 미완성”이라고 규정했는데 이것은 이상 문학의 성격을 단적으로 요약한 매우 의미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상의 ‘오감도’라는 시를 보자
13인의兒孩(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하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하오,
그는 정돈된 의식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거부한 이방인이었던 것 이다. 그에게 작품은 바로 자신이요. 버릴 수 없는 넋두리인 것 이다. 분열 되어진 내면에 흐르는 잠재의식이 구심점없이 비극적으로 점철되어서, 고뇌하는 그 시대 지식인의 나약함이 박제된 인간으로 표현된 것이다.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 드는 방이 내방이오…..천재로 대변되는 나는 교육을 받은 이요. 음지에서 움츠려 있는 죽은 의식의 실체이다.
내 아내 그녀는 실재적으로 음지 인생을 사는 배우지 못한 인생으로 본능에 움직이는 하등 동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볕드는 방에서 기거한다. 나는 그녀의 화대로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는 소위 기둥서방이다. 나는 그녀를 등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살아 갈 수 있는 무능력한 피 보호자인 것이다.
아스피린인줄 알고 내가 받아 먹은 약은 최면약 아달인이다. 한달 동안이나 그것을 먹으며 죽어가고 있는 내 의식은 밖으로 나 왔을 때 어지러움을 가져왔고, 피곤함에 내 몸은 저당 잡혀 있다.
비어있는 의식의 저편에서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그에게 어느 순간엔가 날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왜? 날개가 부러 졌던 것 일까?
날개가 부러진 박제된 인간 군상은 2004년을 살아 내야 하는 하늘 아래에 널려 있다.
우리의 아빠들은 날개를 잃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박제되어 거리를 헤메고 있다. 길 잃은 그들에게 세상은 살얼음판처럼 겁나고 두렵다. 어느 땐가 잘 나가던 소위 화이트 칼라들에게 세상은 울타리가 되어 주어서 그들은 안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어떠한가! 화이트 칼라든 블랙칼라던 세상은 어둠에 덮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기 마련이다. 아직도 고속도로처럼 아주 잘나가는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들의 의식 속에 박제된 인간은 인생 쓰레기요. 낙오자일 뿐이다.
박제된 천재들은 갈 곳이 없다. 아니 가지를 못한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자부심과 긍지가 있어서 그들 자신이 궂은 일에 참여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아닌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의 분리를 애써 강조한다.
옛날 양반들의 후예인 박제된 계층의 고달픔을 ‘양반전’을 읽은 이들은 족히 알 것이다.
농촌은 일손이 없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판인데 그들은 외면한다. ‘고용촉진’ 사업상 이루어지는 근로 사업에도 그들은 외면한다. 그들에게 그런 일들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날개를 훨훨 날리며 창공을 누비고 싶은 욕망이 아직은 남아 있으니 그들에게 누군가가 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는 아직 박제되지 않았다.
그는 날고 싶어 한다.
우리의 아빠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자.
실직자의 아픔을 그린 눈물겨운 영화 ‘폴 몬티’를 본적이 있다.
실직한 철강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스트립 쇼를 벌이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이다. 우여 곡절 끝에 쇼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실직자들은 비로소 자신감을 얻는다. 체면과 허위를 과감하게 벋어 던진 그들은 진정한 날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이상의 ‘날개’의 나는 지금 현재에도 너무 많이 존재한다. 슬픔에 잠겨있는 날개 잃은 많은 이들,,,,,,1930년대에도 2004년에도 그들이 살아내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이 땅에 과연 날개는 존재하는가?
진정한 용기는 날개를 달아 준다.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우리 모두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자.
또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서로의 날개를 달아 준다면 더 이상 박제된 천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를 살아낸 이상주의자, 이상 김 혜경. 그는 종생기, 봉별기, 동해. 실낙원등 단편들과 오감도,1934등 80여편의 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