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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기록에는 과하마와 양마(良馬), 고려시대 기록에는 국마(國馬)와 경마(耿馬), 조선시대 기록에는 향마(鄕馬)와 호마(胡馬)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각각 앞에 것이 상대적으로 작은 말이고 뒤에 것이 상대적으로 컸다고 합니다. 특히 경마와 호마는 교역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온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품종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당서에 신라 말에 대해 평하기를 多馬. 馬雖高大, 不善行. 이라고 했으니 신라 말의 주류는 (덩치 작은 과하마가 아닌) 키가 큰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이후의 국마-향마 계통의 말은 평균적으로 (대략 130cm 이하급) 덩치가 작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같은 한국 고유 말인 국마-향마 중에도 약간 계통이 다른 말이 섞여 있었는지 아니면 시대별/지역별/개체별로 어느 정도의 크기 차이나 품종 차이가 있었는지를 따져봐야 하는데 막연한 기록은 산발적으로 발견되도 그걸 구체적으로 논할만한 직접적 사료는 아직 뚜렷하게 확인된 것이 없는 같습니다.
-여하간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 반강제적으로 대량의 말을 공납한 이후 세종대왕의 말 품종 개량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말 품종의 열화현상이 일어났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신라 고분에서는 완전한 말의 전신 뼈가 출토된 적도 있고, 가야 고분에서는 말 이빨도 제법 출토된 사례가 있는데 이를 토대로 구체적으로 말의 품종을 규명한 논문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전통 말의 계통에 대해서도 사천마 계통의 중국 소형마와 유사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몽고마 같은 중형마와 유사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도 제대로 분석하자면 과연 어떤 말이 한국 고유의 말 품종인지... 먼저 한국 토종마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인지를 특성을 특정지워야하는데...일부 논문이 나와있긴 합니다만 완전 혼혈되어 종의 특성을 따지기도 부담스러운 제주마 외에 남아있는 한국 말이 없는 상태라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닌듯합니다.
일단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조선 본토 육지(해안도서 포함)의 목장이 격감하면서 한국 토종마의 본류가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한국 토종마의 특성을 잔존하고 있는 제주마조차 구한말-현대를 거치면서 혼혈이 심해져서 한국 토종마의 품종 자체를 따지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입니다.
일본에서도 스즈키 마사야가 "일본 전국 기병 허구론"을 들고 나올수 있었던 것도 전국시대 무렵의 일본 토종마 유체가 대량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의 지역별 토종마는 우리나라보다도 제대로 보존된 상태임에도 시대별 변천에 대한 부담때문에 직접적인 연구는 당시 말의 유체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이야기지요. 과연 우리나라에서 고려~조선시대 토종마의 유체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일이 앞으로 있을지 모르겠는데....좀 어려울듯... 그나마 삼국시대 고분에서 나온 말 유체라도 남아있으니 이걸 토대로 뭔가 좀 살펴봐야할듯 합니다.
조선시대 문헌중에 말관련 자료는 신편집성마의방이나 마경초언해 등 수의학적인 차원에서 말에 대해 논한 자료가 주류입니다. 이외에 목장지도 등 전국 말 목장의 현황을 담은 자료, 태복사절목 등 말 관련 행정부서의 실무 규정 등이 다수 남아있습니다. 이들 자료에 색깔에 따른 말 구별법 등이 일부 나오긴하는데 체계적으로 말 품종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만해도 동양권에서는 현대적인 품종 개념은 약했으므로 지역별로 말을 구별하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도 등 북도 지방 말이 좋았다는 기록이 일부 남아있지만 중국이나 일본처럼 각 지역별로 xx마 식으로 구별할 정도로 특성이 분명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결과로는 고려말~조선초에 걸쳐 명나라로 넘어간 말의 숫자는 대략 10만 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종~세종대에 이 문제는 거의 정치적 논란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특히 태종대에는 고구려가 수당과 싸워 이길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좋은 말이 있었기 때문인데 중국에 말을 넘기는 것은 결국 기병을 잃는 일이고 이는 국방에 심대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반대까지 있었습니다. 이하는 태종 9년 사간원에서 국왕에게 올린 시무3조 중 제2조입니다.
"나라에 중한 것은 군사이고, 군사에 중한 것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나라 제도에 군사를 맡은 관원을 ‘사병(司兵)’이라 하지 않고 ‘사마(司馬)’라 하였으니, 말이 나라에 쓰임이 중한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땅덩이가 작고 말도 또한 한도가 있는데, (명나라) 고황제 때부터 건문에 이르기까지 그 바친 말이 몇만 필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상국(上國)에서 또 마필을 요구하여 그 수효가 심히 많은데, 유사가 기한을 정해 독촉하여 비록 말 한 필이 있는 자라도 모두 관에 바치니, 이 같이 하면 나라에 장차 말이 없을 것이니 말을 하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당나라 태종과 수나라 양제가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거란의 군사와 홍건적이 우리를 침구하다가 먼저 망하였는데, 이것은 산천이 험하고 장수가 훌륭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말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사대의 예로 말하면 바치지 않을 수 없고, 종사의 계책으로 말하면 많이 바칠 수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또 어찌 오늘에 요구하고 명일에 요구하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대의 예와 종사의 계책으로 참작해 시행하소서"
사대의 예로 생각한다면 바쳐야하지만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자면 달라는대로 주면 안되니 잘 생각해 달라는 건의문이죠. 조선 건국 이후에만 이미 2만3천필이 넘어간 상태에서 이 건의문이 나온 이후 세종대에도 3만필이 추가로 넘어갔으니...그야말로 사간원 간관의 말대로 "눈물이 날 지경"이죠.
고려가 명나라에 말을 바친 것은 공민왕때부터입니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할때까지 25600~30000 필 정도를 명나라로 보냈습니다. 공민왕때만해도 비교적 백단위 이하의 소량이었고, 우왕때부터 천단위로 증가했습니다. 25600~30000필에는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이후 명나라로 보낸 물량 약 8000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조~문종대까지 보낸 물량이 대략 63000~70000필 정도이니 실제로는 10만이 조금 못되는 9만 ~10만 사이가 되겠네요. (수치는 모두 동국대 남도영 교수 계산 기준임) 이렇게 보내고도 성종대 국영 목장에서 관리하는 말만 40000필 정도가 남아 있었으니 중국에 말을 보낸 것 때문에 기병이 바로 약화되지는 않았겠지만... 조선의 말 생산 유지 기반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기병의 전력 약화로 연결될 여지는 있었습니다.
공민왕때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우왕때는 좀 의외로군요.
세종은 4군6진을 개척하느라 군마도 상당히 필요했을텐데(어차피 핵심은 사민정책이긴 하지만) 명나라에 보낸 것만 3만필... 함경도 기병들은 죄다 태울 수 있는 숫자인 것 같습니다. 심각한 손실이네요. 북방의 경계선을 다지려던 세종에게 있어 말품종 개량은 당연히 시도해야할 것이었을테고 이건 북방 야인들을 상대하기 위한 기병전력 강화의 일환이었겠죠. 장기적으로 보면 실패한 거지만, 정작 기병 문제로 야인에게 곤란을 겪은 사례는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
진경시대에 들어서 기병전력에 애로사항이 본격적으로 나타났을까요. 말기야 뭐 기병 이전에 군사력 자체가...
조선 전기 군대에선 주력 병종인 정병의 반수 이상이 기병이었던데 비해 조선 후기에는 정병의 입번 자체가 기본적으로 중지되면서 한때 기병의 기반 자체가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갑니다. 하지만 숙종대 무렵부터 점차 지방 기병이 재건되면서 완전한 붕괴상태는 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순조 이후를 기점으로 점차 약체화의 길을 걷지만 적어도 고종 초기때까지도 상당수 기병부대내지 병종들이 (약체화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순조대 기준으로 기병 정원은 57794명이지만 대부분 방군수포 대상이므로 거의 대부분 정번(번상 중지)되어 실제 근무자는 25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순조대 기준으로 실제 근무인원은 1번당 대략 250명 내외로 6번 교대근무제로 유지됐습니다. 6번 전체로 봐도 약 1500명 규모가 됩니다. 이것도 고종 초기가 되면 각 168명이 6번 근무하는 것으로 더욱 줄어듭니다. 6번 전체로 봐도 번상 기병은 약 978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이마저도 정번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들 조선 후기 번상 기병은 소수일망정 조선 전기 정병 기병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존재죠. 이들은 조선 후기에 하나의 전투용 단위부대로 운용되기 보다는 궁궐 외곽을 비롯해서 수도 한양의 주요 시설을 경비하는 용도로 운용됩니다.
-금군 계통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및 이를 총칭하는 내삼청, 금군청, 용호영 계열)은 전통적으로 기병 위주의 군대지만 부대라기보다는 국왕 경호 병종에 가깝죠. 역시 규모는 700~1000명 내외입니다. 조선 말기에가면 약 600명 규모로 줄어듭니다.
-조선 후기의 중앙군, 특히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핵심부대인 훈련도감의 경우 기본적으로 보병 위주의 군대였기 때문에 최초 창설당시 아예 기병이 없다가 선조의 지시로 원칙적으로 기병 설치가 결정되고 광해군대 50명 규모, 인조대 5초(5개 중대) 규모, 숙종대 6초 규모, 이후에는 7초(7개 중대 약 700~800명 내외)정도로 까지 단계적으로 증가합니다. 적어도 고종 초기까지도 마병 7초 800여명 내외의 병력 기준 자체는 유지됩니다.
-금위영과 어영청도 원래 기병 전력이 미약했지만 숙종대 이후 지방 기병이 점차 재건되면서 이들 병력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황해도에 해서 향기사, 서울도 경기사가 설치되고 이들 중에 일부가 금위영, 어영청 소속이 됩니다. 어영청이든 금위영이든 잡다한 기병 전력을 모두 합하면 각각 약 700~900명 수준이고 적어도 고종 초기까지 기본적인 모습은 유지됩니다.
-조선 후기 지방군 기병 중에 대표적인 존재가 함경도의 친기위와 평안도의 별무사입니다. 숙종대 최초 300여명 규모로 시작된 함경도 친기위는 나중에 3000명 규모로 확대되고 평안도 별무사도 최초 600명에서 점차 최대 2500명 규모로 확대됩니다. 평안도 별무사들은 영조무렵 이인좌의 난때 일부가 반란군의 동원계획에 선이 닿았고 순조 홍경래란때도 별무사들 다수가 반군에 개입하면서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 점차 약체화됩니다.
** 거칠게 계산해보면 중앙군 중에서 번상 기병 (조선 전기 기병의 후신) 900~1500명, 금군계열/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소속 각종 기병이 각 700~900명(합 대략 3000명 내외), 지방군 기병(이중 일부는 중앙군에 지원됨) 중에서 비교적 정예로 분류되는 친기위 3000명, (평안도 지역) 별무사 2000명 내외니 대략 1만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 정도는 됐습니다. 이들 제 기병부대의 말은 원칙적으로 자비 조달이 원칙이지만 부분적으로 나라에서 관마가 지급됐습니다.
--이 밖에도 후기 지방군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속오군에 기반한 것이고, 속오군 자체가 보병 지향적인 성격이 강하긴 합니다만 조선 후기 지방군대의 명색도 워낙 잡다해서 마병, 무학마병, 별초마병 등 명목상 기병으로 분류되는 군대도 많았습니다. 함경도의 경우 경우 남병사 휘하에 마병 30초(30개 중대=3000명 이상), 북병사 휘하에 마병 17초가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보다는 적었지만 마병초 자체는 존재했습니다.
-함경도 마병 47초, 평안도 마병 12초를 비롯해서 삼남지역까지 포함해서 잡다한 지방군 기병들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이 유지됐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예를들어 정조대를 기준으로 평안도의 별무사-마병초를 합한 명목상 기병 총수는 5000명이지만 실제 말을 가진 병력은 3000명 정도였다고 언급한 기록도 나옵니다. 이밖에도 명목상 기병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방군수포용 병종도 있어서 이들 지방군 소속 기병의 정확한 수치를 잡기는 힘듭니다. 다만 대략 1만에 조금 못미치는 정예 기병(번상기병,금군계열,중앙3군영,친기위,별무사)을 제외하고도 약 1만 정도는 추가로 지방군 소속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봅니다.
-더하기를 거칠게 하고 기준 시점도 약간 들쭉날쭉하게 숙종~고종 초반까지 기록을 마구 섞어서 계산한 것이므로 단순 참고용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단어나 숫자 하나 뜯어서 보시지 말고 전체적인 경향만 참고하십시오.
출처: 워포그 임진왜란 게시판
別武士님의 댓글을 짜집어서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기병대의 중요한 전마에 대한 자료라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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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좋은 자료 매우 유익하게 보았습니다...고려말(공민왕이후) 때는 명나라와 고려가 대원(북원)전쟁의 동맹군의 입장에서 '말'을 지원하였다고 보이는데...조선이 개국한 뒤의 상황은 이미 북원은 명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명에서 조선에게 '말'을 바치라고 하는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봅니다....즉, 명은 조선의 군사력신장을 우려하여 사전에 이를 제거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2. 명이 조선의 군사력 증강을 우려한 이유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태조 이성계가 확실하게 '사대'를 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조선을 저리도 철저하게 '견제'한 것은 바로 '일본(왜)'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아직 소멸되지 않은 '북원'도 경계의 대상이긴 하였었겠지만, 명으로서는 '조선+일본'의 연합군을 가장 우려한 것으로 봅니다.
3. 그래서 명나라는 자주성이 강한 태조(정도전포함)의 집권을 중도에 정지시키고 야심가인 태종의 집권을 인정(지원)하는 반대급부로 태종으로부터 매년 10,000필의 말을 매매형식으로 조공받도록 함과 동시에 태종이 직접 '왜구(일본)'를 정벌하여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증명토록 요구하였다고 봅니다.
4. 결국, 조선초기에 수만필의 말이 중국에 바쳐졌고, 또 태종에 의해서 대마도정벌도 이루어지므로서 비로소 명나라는 조선의 '사대주의'가 진심임을 확인한 뒤에 조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었다고 봅니다...어떻게 보면 명나라로서 국방을 우려하는 당연한 조처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명나라에서는 개국 초기부터 전해안에 들끓는 '왜구'의 침략을 단순한 '해적'들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5. 즉, '왜구'들이 극성을 부렸던 이유가 따로 있었으며, 명나라에서는 그 이유 때문에 '조선+일본'을 가장 경계하였었다고 봅니다...이 '조선+일본'이라는 개념은 200년뒤에 풍신수길이 조선침략을 하면서, '명나라를 치는 길을 열어라'라는 요구로 재현된 것으로 봅니다...이에 당연히 '조선+명'이 일본을 상대하게 된 것이지만, 좀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때의 전쟁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기 이전에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6. 만일 조선초에 명나라에서 조선의 군사력을 철저하게 약화시키지 않았고 또 조선의 국가전략이 '사대주의'를 표방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울러 이를 역설적으로 본다면 '조선+왜'의 연합으로 명나라나 대륙을 공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여져서 이래저래 조선초 '사대주의'라는 국책의 선택여부는 논란이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