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차가 너무 밀려서 간신히 교무실에 7시 50분까지 도착.
후다닥 아침을 먹고 교무실로 올라와서 따르릉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학생 할머니의 전화였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벌점이 너무 많이 쌓여서 연락이 왔더라구요. 너무 놀라서 전화드렸습니다.'
목소리가 한껏 상기되어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떨림마저 느껴졌다.
'네 할머님, 애기가 평소에 성실한데, 요즘 생활규칙을 잘 지키지 않았나 봅니다. 평소 교실에서 학습태도는
올바르고 성실한 아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름대로 할머니를 안정시키고 이제 전화가 마무리 되겠지? 했는데, 할머니께서 우셨다.
자초지종 사연을 듣고보니, 할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고 계셨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 많으셨나 보다.
나또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나면서, 마음이 뭉클해져서 할머니의 하소연을 10분정도 들어드리고,
나름대로 차분하게 안심시켜드리면서 그렇게 전화를 끝맺었다.
통화를 끝내기전에 '할머니, 제가 애기랑 잘 상담해보겠습니다. 평소에도 제가 관심과 애정을 주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수업시간에도 아기공룡 XX이라고 부르는걸요, 귀엽고 착한 아이입니다' 라고 말을 마무리하며 그렇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전내내 마음이 애매모호하고 뭉클했는데 때마침 오늘 5교시가 그녀석의 수업이었다.
중간고사 직전이라 자습을 주고 있었는데, 내 옆자리로 책상과 의자를 가져오게 한 뒤에
나란히 우리는 그렇게 2시간을 열심히 공부했다. 나도 그녀석 옆에서 열심히 교육학을 보고 외웠다.
'선생님, 선생님이 보고 있는 책은 뭔가요? 어려워 보입니당'
'응 그냥 보는거야, 이따가 오후 4시에 교무실로 와라'
'네? 저 혼나나요 선생님?'
'아니 그냥 너랑 대화하고 싶어서~'
2시간을 같이 옆자리에 앉아 공부한 뒤에 책을 주섬주섬 챙겨서 나는 교무실로 돌아왔다.
4시가 되었는데도 이녀석은 교무실로 오지 않았고, 나는 회의가 있어서 곧바로 다녀온 뒤에 바로 부장님과 저녁을 먹고
다시 교무실로 올라와서 양치를 하던 도중에 그녀석을 만났다.
'야 임마, 왜 아까 안왔어, 너 기다렸자나 (사실은 나도 까먹고 있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지금 대화하실래요?'
'그래 잠시만 기다려'
나는 교무실에 가서 컵 2개에 얼음을 각각 1개씩 넣은 뒤, 녀석을 끌고 매점에 갔다.
'야, 음료수 하나씩 골라, 산책하면서 마시자'
그녀석과 나는 학교 한 바퀴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니?'
'할머니 입니다.'
'그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
'70대 후반이십니다'
'할머니와 언제까지 함께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아이의 말문이 턱 막혔다. 눈물을 흘리길래 모른척 하며 계속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내 옆에 있어주는 건 아니야 그치?'
'네 선생님'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진 않을게, 세상에는 분명 공부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치만
너의 꿈이 생명공학자가 되어서 할머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거라고 하지 않았니?'
(사실 할머니와 오전에 전화하면서, 아이가 할머니랑 달나라로 같이 건강하게 다녀오는 게 꿈이라고 했어서 대충 알고 있었다)
아이는 대답은 없고 고개만 말없이 끄덕였다.
'공부하다가 너무 힘들면, 할머니 사진을 책이나 독서실 책상위에 붙여놓고 공부하거라'
아이의 눈동자가 또 흔들렸다. (사실 작년에 나도 그렇게 공부했었던 것 같다. 올해는 그정도는 아니지만.ㅠㅠ)
'그리고 할머니랑 통화 자주 하냐? 안하지? 할머니랑 통화 매일 하고, 녹음을 꼭 해라!'
'녹음은 왜요 선생님?'
'너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 목소리 기억나냐?
'잘 기억이 안나요..'
'졸업한지 1년도 안되었는데, 담임선생님 목소리도 기억안나지?. 심지어 매일 들었을텐데 말이야,
너 할머니가 나중에 돌아가시면 목소리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
'선생님도 엄마랑 통화하고 녹음 가끔씩 한단다. 한 번 들어볼래?'
그렇게 아이에게 나와 엄마의 통화 녹음을 들려주었다.
아이는 또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우리 옆에 있어주지 않아, 그들이 옆에 있어줄 때 사랑을 한 껏 주고 받는게 좋은거야
사랑해라는 표현을 평소에도 절대 아끼지 말거라' (나도 말하면서, 어 좀 멋있는데? 이랬지만, 태연한척 학생에게 말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느새 학생 자습실 문앞까지 도착했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올라오길래, 그 아이와 작별하고 나도 교무실로 되돌아왔다.
교무실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학생에게 괜히 오지랖을 부린건 아닐까?, 내 인생도 잘 살지 못하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생각이 많아진 상태로 정~말 오랜만에 물화생지카페에 접속하고 글을 써본다.
벌써 오후 7시 15분이다. 언능 중간고사 출제 해야겠다.
첫댓글 별 생각없이 글 눌렀다가,
'할머니와 언제까지 함께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저도 학생처럼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평소에 학생과 라포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도 텍스트를 그대로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문이 막혔던 것 같아요. 정말 멋있으십니다. 선생님같은 분이 정말 참교사이십니다. 정말 학생을 위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고, 막연히 열심히 하자같은 말이 아니라 학생에게 평소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얘기하셔서 학생에게 더 크게 전달되고, 이 선생님이 날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구나 느꼈을 것 같아요. 좋은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1차까지 며칠 안남았는데 일병행 힘드신 것 알지만 꼭 합격하셔서 교단에 서시길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아이고ㅠ 긴 글로 제 일기에 댓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휴가 시작되었네요. 졸린 눈을 비비며 카페에 나왔는데
전 스터디카페가 더 맞는 사람인가보다 하며
이 글을 씁니다..ㅋㅋ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둘다 올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남은기간 같이 파이팅해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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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아기공룡 학생에게 평생 잊지못할 한 페이지를 쓰셨네요ㅎㅎㅎ
요즘엔 오지랖 부리는 선생님이 드물다보니,
아이들도 알아요.
이런 선생님 정말 얼마 없다는걸, 정말 감사하다는걸
선생님 가시는곳마다, 만나는 아이들마다 왜그리 특별한지 알 것 같아요.
선생님이 특별하고 선생님이 애정 가득하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ㅎㅎ
임용 남은 기간 좋은 마음, 좋은 기운으로 달려나가시길 바랍니다.
항상 응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