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입력 2022.07.04 19:00 수정 2022.07.04 21:10
[프리즘] 낙태권 충돌과 F워드
안유회 사회부장
연방대법원이 지난달 24일 낙태권을 인정했던 1973년 판례를 폐기했다. 이로써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임신 24주 이전까지는 낙태를 허용한다는 연방의 기준선이 사라졌다. 이제 낙태 허용 여부와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주정부와 주의회가 각자 결정하게 됐다. 주마다, 주 안에서 편차와 혼란이 일 것은 당연하다.
낙태는 총기 문제와 더불어 가장 휘발성이 강한 이슈로 꼽힌다. 시각차가 첨예해 의견을 좁히기 어려워, 논쟁이 격화되기 쉽고 그만큼 민주적 토론 과정을 걸쳐 사회적, 정치적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다.
낙태권 인정 판례 폐기 직후 나온 반응은 낙태 문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연방대법원의 결정을 놓고 바이든 대통령은 “주법으로 낙태가 불법이었던 1800년대로 돌아간 것”이라고 비판했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 세대 만의 가장 큰 승리”라고 환호했다. 말 자체로도 격차를 메우기 얼마나 힘들지 느껴진다.
주마다 견해 차이는 더 격렬하다. 미주리주의 에릭 슈미트 검찰총장은 “생명의 신성함을 위한 기념비적인 날”로 규정했고 미시간주의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는 낙태권 유지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다 해도 낙태를 둘러싼 근원적 주장은 바뀌지 않았다. 흔히 낙태 반대와 찬성으로 번역되지만, 원래의 주장은 ‘생명 옹호(pro-life)’와 ‘선택권 옹호(pro-choice)’다. 두 주장을 떼어내 보면 모두 정당성이 있다. 태아의 생명이 존중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나,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나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두 가지 가치를 나란히 놓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안에 따라 어느 가치를 우선할 것이냐는 바뀔 수 있지만 판결 직후 나온 미주리주의 법안처럼 “의학적 응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낙태하거나 유도해서는 안 된다”라고 못 박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사람의 신체, 특히 출산하는 여성의 몸을 보는 시각은 개인의 입장과 사회와 국가의 입장이 뒤섞여 있다. 서로 다른 입장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수용할 것인가는 그 시대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낙태 문제가 어려운 것은 몸과 생명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시대 정신과 사회의 정체성, 진영간 시각이 그 어느 문제보다 강하게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낙태를 허용한 연방대법원 판결은 진보의 물결과 함께 나왔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낙태 관련 문제는 내 몸은 내가 결정한다는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지난달 내려진 73년 판결 폐기 결정은 보수의 확산과 흐름을 같이한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보충의견에 동성결혼 및 피임 관련 판례도 재검토할 의무가 있다는 의견을 낸 것도, 연방대법원이 포괄적 온실가스 배출규제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내린 것도 이런 맥락을 보여준다.
낙태권 인정 판결 폐기가 낙태 제한으로 이어질지, 거센 반발 속에 낙태권 인정으로 회귀할지, 양 진영이 주별로 계속 충돌할지 알 수 없지만 우려되는 것은 민주적 토의 절차 자체가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8일 로리 라이트풋 시카고 시장은 공개된 자리에서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에게 F워드를 사용했다. 논쟁이 격화되면 의견이 아니라 의견을 낸 사람을 공격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민주적 체계와 시스템, 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깨지고 토론 절차가 파괴된다. 결국 찬반 토론은 합의가 아닌 혐오로 증오로 향한다. 거기까진 가지 말아야 한다.
안유회 / 뉴스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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