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6일에 기쁨의집에서는 바스락 콘서트를 열었다. 착한 노래꾼 좋은날풍경 박보영 버시와 독캠 기족들, 사랑별 독서모임의 벗님들이 매년 열어 오는 가을 콘서트이다. 여러 순서 뒤에 마지막으로 출연한 김겸섭 목사(천사는오후3시에 커피를 마신다 작가)는 잊혀지지않는 메세지를 벗님들에게 선물했다. 다시 한번 듣고 싶어 원고를 받아 올린다.
가을, 그가 내게 묻다 (김겸섭 목사)
그대에게 ‘가을’은 무엇인가?
성서의 민족 히브리인들은 ‘가을’을 ‘스타드(סטאד)’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 ‘스타드’는 ‘씻어 버리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랬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가을은 단순히 곡물을 거두는 수확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을은 봄과 여름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탐욕으로 오염된 품성을 빗물로 세척하듯 씻어버려야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을은 ‘스스로를 피고(被告)의 신분으로 소환하여 법정에 세우는 시절”이어야 했습니다. 곧 ‘가을’은 이제껏 다른 사람을 법정에 세워 정죄하던 시절과 결별하고, 스스로를 법정에 세워 ‘자신이 사는 현재의 삶’을 날카롭게 심문(審問)하는 청문회가 되어야 하는 시절입니다. 그리고 그 심문은 스스로에게 ‘세 가지의 질문’에 던지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 첫 질문 - 그대는 ‘셈페르 에어뎀’을 살았는가?
라틴어 ‘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은 ‘항상’을 뜻하는 ‘셈페르(semper)’와 ‘같다’를 뜻하는 ‘에어뎀(eadem)’로 이루어진 어휘로서 “항상 같다”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가을에는 스스로에게 “그대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같았는가?”를 날카롭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인격이 ‘농숙(濃熟)한 사람’은 ‘항상 같다’의 삶을 삽니다. 여기 ‘항상 같다’의 삶을 살던 권력가가 있었습니다. 이 권력가는 16세기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그녀는 “세상에 나보다 더 탁월한 군주는 있을 수 있어도 나보다 더 백성을 사랑한 군주는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던 군주였습니다. 그런 그녀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왼손에 낀 흑진주로 만든 반지에 ‘셈페르 에어뎀’이란 글귀를 새기고 삶으로 실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인격이 ‘농숙(濃熟)한 사람’은 ‘항상 같다’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사실 ‘셈페르 에어뎀’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이 <팡세>에서 “인간에게는 신의 은총이 없이는 치유될 수 없는 세 가지 오류(誤謬)가 있는데 그것은 변덕과 권태와 불안이다”라고 밝혔듯이 “변덕”은 평범한 인간들의 휴대하고 있는 강력한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질문 - 그대는 ‘메아 쿨파’를 살았는가?
단테의 「신곡」 ‘연옥편 제 9곡’을 보면, 신실했던 그리스도인 ‘루치아’의 안내로 연옥입구에 도착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입구에 있는 ‘세 개의 계단’을 발견합니다. 그 ‘세 계단’은 각각 얼굴이 비칠 만큼 투명한 흰색, 좌우로 금이 가있는 검정, 그리고 동백꽃보다 더 짙은 붉은 색이었습니다. 투명한 흰색계단은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행위, 옆으로 금이 가있는 검은 계단은 죄악으로 균열된 영혼의 상처, 붉은 색 계단은 죄에 얼룩진 영혼을 씻겨 정화시켜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 듯 보입니다. 두 사람이 이 계단을 지나자 그 앞에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문지방에 ‘칼을 들고 앉아있는 천사’를 보게 됩니다. 순간 단테는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라고 외치며 가슴을 ‘세 번’ 칩니다. 단테가 외친 이 라틴어는 ‘제 탓입니다. 제 탓입니다. 제 큰 탓입니다’라는 ‘참회의 외침’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들고 있던 칼로 단테의 이마에 ‘죄’를 의미하는 라틴어 ‘페카툼(Peccatum)의 첫머리 ‘p’를 ‘7개’나 새겨주는데, 그것은 영혼을 오염시키는 교만, 질투, 분노, 게으름, 탐욕, 탐식, 정욕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천사는 연옥으로 순례를 떠나는 단테에게 “이제부터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권고하며 배웅해줍니다. 사실 이 시대는 ‘메아 쿨파’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잘못’은 발견되었는데 ‘잘못한 사람’은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인해 비겁한 삶을 삽니다. 전쟁의 승리자만이 영웅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시인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진정한 영웅일 것입니다.
3. 세 번째 질문 - 그대는 ‘메덴 아간’을 살고 있습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아레테(ἀρετή)’로 불리는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여겼습니다. ‘아레테’란 ‘지성과 인성으로 정밀하게 세공된 인격을 갖춘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레테’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메덴 아간(Μηδὲν ἄγαν)’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 솔론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메덴 아간’은 ‘아무것도’라는 그리스어 ‘메덴(Μηδὲν)’과 ‘지나치게’라는 ‘아간(ἄγαν)’이 조합된 어휘로서 ‘아무것에든지 지나치거나 치우지지 않게’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 왕이었던 페이시스라토스는 ‘메덴 아간’의 삶을 보여주었던 선한 권력자였습니다. 아테네 축제에 참여하던 왕의 딸을 흠모하던 한 시민이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분노한 왕비가 이 무례한 자의 두 팔을 잘라 공주의 수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자, 페이시스라토스는 “그대여,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벌(罰)준다면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상(賞)을 주란 말이요?”라고 말한 후, 그 사람에게 ‘너의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두 번 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묻되 ‘잘못에 대한 분노’는 알맞게 조절했던 페이시스라토스는 이후 아테네 시민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됩니다.
사실 삶의 대부분 비극은 ‘메덴 아간의 없음’에서 발원됩니다. 곧 스스로 ‘지나침’과 ‘치우침’을 통제하는데 실패할 때 비롯됩니다. 사실 낮은 자존감에 눌린 사람에게서 ‘메덴 아간’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연약한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한 ‘방어기제’가 극도로 예민하여 작은 상처나 불이익에 지나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낮은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절제 못한 감정의 발산이후 곧 그런 모습을 보여준 자신에 대한 자책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 못하게 되어 이후 어떤 일을 스스로 책임 있게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선택 장애’를 앓게 됩니다. 곧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주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타인에게 전적 의지하는 타율적 삶을 선택합니다. 이런 삶을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조차 남의 집에 세(貰)들어 사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 - 이제는 ‘티쿤 올람’을 살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유대인들의 삶속에는 ‘티쿤 올람(Tikkun Olam)’사상이 깊게 자라잡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티쿤’은 ‘고친다’는 의미이고 ‘올람’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곧 ‘티쿤 올람’은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어 간다’라는 사상으로서, 태초에 하나님께 지으신 이 세상이 인간의 악으로 오염되고 손상된 ‘지금 세상’의 질서와 공의를 새롭게 구축하도록 자신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상입니다. 특히 가난과 질병으로 아파하는 병든 세상을 새롭게 회복시키기 위해 ‘교육’과 ‘구제’를 우선과제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주할 때마다 세계각처에 대학을 건립하고 질병치료를 위한 신약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현대 의학계는 유대인들에게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아나 노약자들의 질병치유에 절대 필요한 소아마비, 독감, 페니실린, 인슐린 같은 백신을 유대인들이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가 한숨과 탄식으로 얼룩지는 것을 제거하고자했던, 그래서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창1:31)라는 ‘창세기 1장의 감탄사’를 회복하려 했던 ‘쿤티 올람’의 철학이 만든 결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을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재건축하여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티쿤 올람’의 삶이 있는 곳에 ‘황금 추앙’이라는 병든 탐욕도, ‘오직 자기만’이라는 ‘차가운 이기심’은 깃들지 못합니다. 황금과 권력이 구축하는 ‘함량미달의 행복’에서 벗어나 ‘섬김과 희생’에서 행복의 표정을 찾았던 유대인들의 ‘티쿤 올람’이 점차 사라져 가는 이 시대를 보며 짧은 탄식을 하게 됩니다.
이 가을에는 “주님, 제 작은 몸을 사용하셔서 ‘티쿤 올람’의 삶을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천공(天空)을 채우기를 소망해 봅니다.
첫댓글
먼 길 달려오셔서 이 가을에 들려주신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티쿤 올람’의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쁨지기님
좋은 글 올려주셔서 특식으로 영혼에 채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