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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에 관한 담론
여세주(문학평론가, 수필가)
1.‘너를 그린다’의 정체
김선유의 《달밤에 너를 그린다》는 십 년 동안 쓴 글들을 묶은 첫 수필집이다. 한 권의 수필집을 상재하기까지 벼리고 벼린 시간만큼 작품들은 매우 정성스러운 언어들로 짜여 있다. 단시간에 속필로 휘갈겨 쓴 글이 아니라, 오랫동안 힘을 꾹꾹 눌러 쓴 글이다. 명조체로 쓴 글이라기보다는 고딕체로 쓴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고 문장 하나를 구성하는 데 곡진한 정성을 쏟았다는 말이다. 언어의 요체만으로 신중하게 얽어 짠 문장들은 중의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언어의 조합이 평범하지 않은 의미를 발산한다.
‘달밤에 너를 그린다’라는 서명만 봐도 범상한 것 같으면서도 범상치 않다. 사전적 의미로만 읽을 때는 너무나 쉬운 문장이지만, 그 속에 내포된 함의는 심상찮기 때문이다. 그 함축된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달밤’은 보편적으로 ‘그리운 밤’의 이미지를 지닌다. 그리워할 대상이 없더라도 그리움이 피어날 법한 서정적 공명을 지닌 말이다. 달밤의 정경만으로도 그러한데 ‘너를 그린다’고 하였다. ‘그리다’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도 여럿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다’, 즉 그리워하다는 뜻도 있고 생각을 구체적인 글로 나타낸다는 형상화를 뜻하기도 한다. 책의 머리말에서 ‘그리움을 그리듯이’라고 한 어구와 관련시키면 형상화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성을 지닐 것 같다. 그렇다면 ‘너’는 자연스럽게 그리움으로 치환되어 ‘달밤에 너를 그린다’라는 서명은 ‘달밤에 그리움을 형상화한다’는 의미의 언어 결합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움을 그리워한다’라고 풀이하면 의미의 중복으로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움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그리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어떤 형태의 이미지로 구체화시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추론해 보아도 해석의 에움길이 뚫리지는 않는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인가’라는 또 하나의 의문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형상화의 대상이 ‘너’라는 데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말의 문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리다’를 ‘그리워하다’로 되돌려 읽어도 무방하다. 이처럼 김선유의 수필집은 의미를 끝없이 전복시키는 책의 제목에서부터 회오리를 일으키며 잠든 뇌세포를 화들짝 깨우는 에스프리의 섬광이다. 그리워하든 형상화하든, 도대체 ‘너’라는 2인칭 대명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고작 한 음절에 지나지 않는 이 단어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이 키워드의 중의적 함축을 풀어내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를 해석하는 관건이다.
2. 재해석되는 가족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가족 공동체 안에서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과 친밀성을 바탕으로 하는 가족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중시하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개인보다 집단 전체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가족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윤리적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가족적인 인간관계를 사회 공동체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하려고 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주의적 사고방식 속에서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만 강조하고 개인의 의지나 선택 같은 고유성은 종종 무시되었다.
가족 공동체는 근대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흔들리기 시작하여 현대에 와서는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가족 공동체는 아직 삶의 베이스캠프로 작용한다. 특히 사회 활동보다는 가정에 머물며 가사노동을 책임지는 여성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터전이다. 그런 까닭에 여성 작가들의 수필 세계에는 ‘가족사 수필’이라고 할 만큼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가족 공동체의 해체가 가속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가족 이야기는 패러다임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울타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자신을 재확인하거나 그러한 관성적인 자아를 성찰하는 수준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선유의 수필 세계에서도 가족 이야기는 적지 않다. 그런데 가족에 대한 그의 인식은 여느 수필가들과는 다르다. 가족 공동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얼마나 다를까? 그가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이나 가족 공동체의 질서는 무엇일까? 어머니나 아내의 역할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완전수를 꿈꾸며>는 가족의 개념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가족의 완전수가 부부만인 ‘둘’이었다가, 아이를 안은 ‘셋’과 ‘넷’이었다가, 며느리를 편입시켜 ‘다섯’과 ‘여섯’이 되고, 시간이 흘러 ‘일곱, 여덟, 아홉…’으로 늘어난다. 여기서 혼인과 출산으로 형성되는 공동체가 가족이다. ‘아버지(남편)-어머니(아내)-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완전하다고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현실적으로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재하는데도 혈연과 결혼에 의한 가족 구성을 이상적인 가족의 전형으로 생각하는 셈이다.
<내게도 아내가>는 팔을 다쳤을 때 자질구레한 부엌일부터 자신의 뒷바라지까지 해 준 남편을 아내라고 생각하고 싶은 환상을 표현한다. 아내는 가사노동의 부담감을 짊어져야 한다는 가정주부 의식을 은근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이 언어의 행간 속에 어른거린다. <때로 오이도 눈물을 흘린다>는 집안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는 작가 자신을 성찰하면서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는 주제를 도출한 작품이다. 표면적 주제 뒤에는 관념적 자아와 실체적 자아의 괴리가 가져오는, 즉 가사에 야무지지 못한 가정주부로서의 반성적 성찰이 깔려 있다. 이 두 작품에서 볼 때 작가는 실존적 자아라기보다는 가사노동을 전담하면서 그 집안일에 야무지지 못한 가정주부이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아내라고 여기는 상투적인 여성관을 드러낸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가족주의적 가치관을 관성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피아노 사중주>에서는 이러한 가족의식에 변화를 보인다. 이 작품은 피아노 사중주의 네 악기에 가족 구성원의 특성이나 역할을 투영시킨다.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피아노 사중주에 비유한 발상이 매우 적절하고 신선하다. 피아노에 자신을, 바이올린에 남편을, 첼로에 큰아들을, 비올라에 둘째아들을 포갠다. 피아노는 화음을 맞추고 바이올린은 연주를 쉬지 않고, 첼로는 안정감 있고 따뜻한 울림이 있으며, 비올라는 표현의 폭이 넓으면서 부드럽고 친근한 음색을 지닌 점에서 가족 구성원 각자와 닮았다는 것이다. 연주가 서로 눈빛을 나누며 호흡과 박자를 교감해야 하듯이, 때로는 불협화음이 생기더라도 서로 간에 진정한 이해와 사랑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용기를 가져야 마음의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구성원 각자의 고유성을 알아보고 인정할 때 서로 간의 이해와 사랑이 생기고, 나아가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가족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의 주체적 존재성을 존중하는, 이러한 의식은 가족 구성원 개인보다 가족 전체에 가치의 중심을 두는 가족주의적 사고방식의 변화를 예고한다.
어머니 또는 아내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보인다. 가족 구성원들이 직면하는 삶의 힘겨움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모성성을 중시하면서도 남다른 성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욱하게도 나는 페이지 터너의 역할까지 잘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악보를 놓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내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꽁지깃을 푸덕거리며 날아다니는 게 그들에게 더 불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일찍 몰랐을까.
-<피아노 사중주>에서
이 대목에서 페이지 터너의 역할까지 맡는 것은 가족들을 오히려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반성적인 성찰을 드러낸다. 가족 구성원을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간섭하지 않는 어머니나 아내의 역할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2막 2장>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보인다. 지적으로 다재다능한 부모, 자녀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어머니, 친밀하면서도 엄한 어머니를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린다. 그러면서 완벽한 부모가 되는 길은 어렵다고 토로한다. 자기 자신의 미완성을 인정해야 가족 구성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자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어머니라는 낱말이 갖는 의미를 다양한 층위에서 탐색함으로써 ‘어머니 되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여기에서 김선유의 어머니상은 많은 수필가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어머니상과 차별성을 지닌다.
가족주의적 관성으로부터의 탈주는 가족의 보편적 기능인 자녀교육관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들 작품이 고정관념에서 이탈하는 자녀교육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주제로 설정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역할에 관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둘째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회의 중책을 맡아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했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리더십 부족을 거절의 이유로 내세우고 미움받을 용기를 내는 자아의 주체적 존재성을 중시한 것이다. 가족의 집단적 가치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로 추앙하던 모성 신화가 무너지는 현장이다.
<꽃수레>에서는 기성의 틀에 맞추려는 반복 훈련, 부모의 과도한 간섭이나 사랑을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그릇된 교육관을 경계한다. 인간의 자기 주도적 학습과 성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작품의 핵심인데, 커가는 아이들의 자율적 의지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작가의 자녀교육관이 이면에 내장되어 있다. 취미생활을 즐기는 아들 이야기 <숨>에서도 마찬가지다. 숨 쉴 틈도 없이 살아야 하는 삶 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숨구멍 하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게 이 작품의 주된 의도다. 여기에도 자식이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 주기를 채근하지 않고 자식을 독립적인 인격체의 주체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작가의 가족 가치관이 표면에 드러나 있다.
리모컨을 누르는 대로 아이가 움직여 주기를 바랐던 적이 나 역시 있었다. 아이는 내 배 속에서 잠시 있다 나왔을 뿐 나와는 다른 인격체라는 걸 숱한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버리니 아이의 낯빛이 밝아졌다.
-<숨>에서
수필가 김선유는 한편으로 기존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이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관계의 재해석을 통해 가족주의의 관성으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틈>에서는 그러한 탈주를 노골화시키고 있다. 생물학적 가족 개념에서 개별적 존재들의 관계인 사회문화적 가족 개념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가족주의는 남다르다. 여성 수필가들의 작품에서 영원한 제국으로 남아 있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김선유의 수필에서 제시된 가족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향후의 한국 수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만하다.
3.인간의 실존성 존중
가족 공동체에 관심을 집중하던 김선유는 이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주목한다. 삶의 흔적을 간직한 사물이나 삶의 조건인 자연 현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 개인의 실존적 의미에 촉각을 세운다. <인흥마을>, <순례자>, <수지 글라라>, <시간의 빗장을 풀다> 등 여러 편의 여행수필에서조차 특이한 풍경이나 자연의 오묘함 또는 위대한 건축미 등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간의 삶을 응시한다.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 개인의 주체적 존재성, 즉 실존주의적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이들 작품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개인들, 즉 인흥마을을 일으킨 수봉 선생은 이미 주체적인 존재로 살았고 성지 순례에서 만난 어느 순례자와 수지 글라라는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며 봉정사 답사기를 쓴 아들은 그런 존재로 성장해 가고 있다.
<순례자>는 포르투갈 파티마 여행수필이다. 파티마성당의 새벽 광장에서 온몸으로 기도하고 있는 순례자를 만난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한 몸뚱어리뿐인 그 순례자에게서 자신의 옷자락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닦고 자신의 죄와 인간의 업을 닦는 삶의 실존을 본다. “그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라는 문장 속에는 자아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도 숨어 있다. <수지 글라라>도 역시 여행수필이다.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의 한 기슭에 있는 루드르에서 만난 젊은 여성, ‘수지 글라라’가 클로즈업되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대기업에 다니며 치열하게 살다가 사직하고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는 한국 여성인데, 그녀는 이미 주체적 존재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오직 침묵과 고행을 통한 기도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길을 나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헤어지기 전, 어떻게 수도자의 길을 가려고 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글라라가 나직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냥요…. 참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울림 때문이었을까.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성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내 기도의 대부분은 가족이다. 기껏해야 지인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 사람을 위해 회개하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라’는 성모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먼 이국의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도 있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성지순례에 나섰던가.
-<수지 글라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작품에서도 주체적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는 ‘수지 글라라’를 통해 작가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성찰하고 있다.
김선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도 친화적 감성을 드러낸다. 가족이라는 보금자리 속에 안주하지 못하고 소외된 채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작가의 시선이 머문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없다. 열악한 조건에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성과 권리를 누리기 어려운 약자들을 인간적 감성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삶에 위로와 찬사를 보낸다.
<춤 또는 몸짓>에서는 한적한 목욕탕에서 만난 여인이 주인공이다. “그대로 빨려들 것 같은, 소피아 로렌처럼 그윽한 눈매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인”은 외다리로 걷는 신체적인 약자다.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을 것만 같아 보이는, 그러나 타인의 시선을 “피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여인. 편견을 깨지 못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작가에게 불현듯 그녀의 태연한 몸짓은 날갯짓하는 듯한 춤사위로 다가온다. 다리를 다쳐 목발에 의지한 채 한 발로 걷던 때 사람들의 눈길에 무한정 위축되었던 것을 생각하며, 삶의 무대 위에서 상실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자존감에 작가는 암묵적인 찬사를 보낸다. “나에게도 나만의 춤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나만의 춤’을 신체적 조건이나 타자의 시선에 구속되지 않는 자아의 실존성으로 읽는 것은 그래서 타당하다. <등대>에서의 사회적 약자는 동네의 갈래 길에 사는 ‘버버리 할배’다. 신체적인 불편함에 더하여 골목길에 붙어 있는 단칸방에 살면서도, 그리고 말기 암의 고통을 안고서도 마주칠 때마다 박꽃 같은 편안한 미소로 반기는 사람이다.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통의 삶을 살기 어려운데도 밝은 미소로 살아가는 그분은 삶의 자족감과 자존감을 지니고 살아간다. 작은 고통에도 미간을 찡그리며 세상의 짐을 다 진 듯이 시름을 이고 사는, 말을 할 수 있는데도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말을 들을 수 있는데도 타인의 표현력을 탓하는 작가에게 그분은 등대일 수밖에 없다.
심리 상담 경험을 소재로 다룬 <베로니카, 죽기를 결심하다>, <고양이를 부탁해>, <콩쥐 이야기>, <쌍칼 형님> 등에서는 심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는 개인이 소환된다. 그들이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주체적 존재로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표현한다. 비행기 소리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봄이’의 불안심리, 가출과 자해를 서슴지 않는 ‘가을이’의 우울증(<베로니카, 죽기를 결심하다>), 오토바이를 훔친 ‘정호’의 문제아적 행동(<고양이를 부탁해>), 어머니가 명문대생 언니를 편애한다고 생각하는 어느 대학생의 대인기피증과 무대공포증(<콩쥐 이야기>), IMF 경제위기로 사업이 망한 ‘쌍칼 형님’의 노숙자 생활(<쌍칼 형님>). 수필가 김선유는 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모습을 실존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존중하는 작가의 세계관을 이런 작품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 ‘너를 그린다’의 재해석
김선유의 수필 세계는 인간의 주체적인 존재성을 중시하는 담론으로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지적이다. 직관적 감성을 표현하는 언어로 치장하되, 그 속에 매우 지적인 사유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김선유는 한두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특별한 인물을 작품의 제재로 선택한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개인들은 이미 주체적 존재이거나 그런 존재로 거듭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너를 그린다’는 그런 사람들을 그리워한다고 읽어도 되고 그린다(형상화)고 해석해도 된다. 머리말의 제목과 관련시켜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다고 이해해도 상관없다. 그들과 함께한 빛바랜 기억들을 그리움이나 형상화의 대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달밤에 너를 그린다》에 수록된 작품들은 인생행로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의 형상화다. 그리움의 정서가 문면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너’의 정체는 인생길에서 만난 특정한 사람들이거나 빛바랜 기억의 조각들이다. 김선유의 수필집은 주체적 존재성을 가진 사람들,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엮어져 있는 것이다.
형상화의 농도는 짙지 않다. 교술의 본령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김선유는 교술문학의 장르적 본성에 충실한 작품들을 쓴다. 그러면서 서정적 수필의 장점을 끌어들이고 있다. 즉, 사전적 의미로 전달하는 설명의 방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함축적 의미를 지닌 비유적 문장들을 상당히 많이 구사한다. 비유는 다의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수필가 김선유는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을 연결할 때 촘촘하게 메우지 않고 성글게 비운다. 자질구레한 수다들은 떨어내고 요체만으로 작품을 구성하여 행간의 여백이 넓다. 이런 작품들을 읽을 때는 섶다리가 아니라 돌다리를 건너는 느낌이 든다. 돌다리를 건널 때마다 잠시 멈칫거리게 된다. 편하게 읽으려는 독자들의 안일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수필은 골똘히 생각하며 읽어야 읽힌다. 그래서 김선유의 수필은 만만하지 않다.
-김선유 수필집, 《달밤에 너를 그린다》(요요북스,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