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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충동하는 시적 윤리와 가치들
<시인 · 문학평론가> 박철영
개성 넘치는 현대 사회 구조에서 주체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부류들이 상당할 것 같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첨예하게 분화된 사회 구조가 개인의 분방한 사유를 억압하고 그것도 모자라 규제를 통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규범에 대한 일탈이나 반감의 욕구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부분적 일탈에 대하여 사회 규범으로 본다면 응당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인간의 고유한 개별적 정서를 침해한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런 행위의 연속선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보편성에 준거해서 판단하려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를 우리는 윤리적으로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왕왕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보며 소시민들은 묵묵히 수용하는 듯해도 속내까지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시류에 무관심하고 외면한 듯해도 한계를 넘어설 때는 분노를 행동으로 나타낸다. 그 분노는 어디까지나 사회라는 공공의 보편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참여는 당연하다.
현 시류에 소신을 나타내는 방법들이 다양하겠지만, 왕광옥 시인은 시적 담론을 통해 사회의식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방식은 옛날 옛적에라는 이야기처럼 편안하면서 불편함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의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답습해온 공동체적 존중을 바탕으로 한 윤리의식에 있다. 왕광옥 시인은 자연에 대한 진솔한 관찰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생명 현상에 대한 오묘함까지 진정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인간적인 심상으로 상관하여 공감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언어망의 고도와 진폭에서 자유롭다. 그렇다고 왕광옥 시인의 시가 참여성이 강한 투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되레 시적 전개 속에서 보여주는 순정함은 순수한 본성인 동심처럼 해맑게 담아낼 때가 많아 서정의 근경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부드러운 언어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사적인 문제 제기에 능하기 때문이다. 여타의 표현 방식에서 시가 갖는 언어의 우위와 위의란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엄정한 시어 안에서 아름다운 삶을 위한 인간적 정서의 주동主動 의식은 빼놓을 수 없는 시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심성에서 비롯한 바탕과 사물에 대한 천착으로 발현된 시 세계는 지금껏 보아온 시 유형과는 전개 방식에서 달리 왕광옥 만의 변별성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은근한 풍자와 유머까지 시류 속으로 곁들인다. 자칫 통속에 빠지기 쉬운 구어체가 갖는 묘미까지 잘 살려내 해학까지 덤으로 만끽하게 한다. 시인의 시선은 사물과 눈높이로 사유하면서 천착한 보편성에 대한 의지를 지향한다.
장마여서
여기도 촉촉 저기도 촉촉
무당벌레가 사랑터로
꼬실꼬실한 자갈밭을 선택했네요
무당벌레야
내 눈도 가려야지!
부끄러우면
자기가 감는 거예요!
저기에 있는 풀들도 나무도 다 자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이 끝나면
다 깨어날걸요……
이것이 자연이에요
-<원초적 사랑> 전문
시적 대상으로 다가온 무당벌레를 관찰하면서 시인은 전이된 이미지를 시의 형태로 전언하는 나레이터가 된다. 사람에 따라 자연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인 곤충류 그 자체를 혐오하거나 불편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무당벌레가 갖는 외형이 꼭 혐오감을 유발할 정도인 것은 아니지만, 호의적으로 바라만 볼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시인은 무당벌레끼리 무리 지어 뒹구는 모습을 연인들의 ‘사랑’처럼 아름다운 행위로 본 것이다. 그 시간만큼은 사물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고 생명체가 갖는 순수성을 해맑은 시선으로 보려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잊고 있는 덕목 중 하나인 인간적인 금기와 염치를 미물을 통해 환기시킨다. ‘사랑’에 대한 행위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환한 대낮 공개된 장소에서 그러면 안된다며 “내 눈도 가려야지!/ 부끄러우면/ 자기가 감는 거예요!”라며 최소한의 지켜야 할 덕목인 염치뿐만이 아니라 윤리의식까지 담고 있다. ‘사랑’의 대상은 동물뿐만이 아니다. 대상이 여자의 남자이거나 남자의 여자인가에 다르지 않고, 남녀가 평등한 인식이 보편화된 시대가 도래했음을 재삼 말해준다.
남녀에 대한 차별 없이 서로에 대한 존중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식을 시의 기저에 담고 있다. <페미니즘이 있는 마을로!>에서는 인간적인 존중감과 여성성女性性에 대한 개념을 보여준다. 첫 행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라는 시구는 오규원의 시 <한 잎의 여자>의 첫 행과 일치한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오규원의 시를 인용하면서 따옴표나 인용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시가 담보하려 한 페미니즘 의식을 극대화하려 했을 것이다. 사실 오규원의 시 ‘한 잎의 여자’를 남녀의 동등한 인권으로 바라볼 때 여성적 시각에서는 매우 불편할 수 있다. 오규원 시인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왕광옥 시인은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영혼, 눈/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라는 시구처럼 나약한 여성성을 강조한 사회적 편견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인식의 옳고 그름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성性에 대한 인식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왕광옥 시인은 오규원 시인에게 ‘한 잎의 여자’ 속에 갇힌 여자를 놓아주라 한다. 그 여자가 떠나지 않거든 벽을 부숴서라도 여성성의 온전한 세계를 향유토록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페미니즘적 사고는 여성성에 대한 편향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껏 남성 우위의 풍조를 용인해 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회적 편견이나 그로 인해 잘못된 인식들을 바꿔가자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서울특별시장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에 대하여 <당신의 추락을 50%는 막았어!>라는 시에서 언급한 의도는 따로 있다. 언뜻 보면 매우 긍정적인 것 같지만, 그 저의는 “인권 운동가란 과연 무엇인가/ 내로남불이란 말/ 점점 내 가까이 다가온당께”라고 말하려는 데 있다. 아직은 사법적인 절차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 50%까지도 추락하는 일이 없었어야 한다는 것을 질타하고 있다. 시인이 알고 있는 인권운동가(박원순 전 서울 시장)로서 일신은 그러해야 옳았다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민의로 대변되는 저변의 힘은 매우 엄중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옳고 그름에 있어 사사로움이 개입할 수 없는 분별은 100%처럼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광옥 시인은 소시민(민중)의 생각을 가차 없이 시로서 발화한다. 인간의 존엄은 상대방을 동등하게 존중할 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애써 기피하는 진영 논리에 우선하는 정치성을 불인하기에 가능하다. 말은 문자 체계 속에서 문장으로 완성될 때 힘을 발휘한다. 그 언어의 무게에 따라 전이된 감정은 기복起伏을 보인다. 왕광옥 시인만이 갖는 시적 텍스트는 지금껏 보아온 기존의 의미를 넘어 확장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평범한 언어를 통해 부림과 굴림에 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어로 개입된 문자가 그 의미를 배가시켜 소외된 사람들에게 고소함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 옷에는 노숙한 듯 기름이 잔뜩 끼어 있었대
사람들의 말 "개기름 끼었네" 했다더군
개는 그 사람 옆에 가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 개기름이 끼었담……
사람의 눈에는 개를 사랑한 척하지만
뭉개고 밟고 퉤퉤 뱉고 싶은 충동이 있는 거야
밟아버려야 시원한……
-<개의 항변> 부분
‘개’가 항변을 하다니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말로 시작되는 사회 현상은 실제로 일어나는 말의 오류로 거리낌없이 남용되고 있다. 시인은 말에 함의된 고도의 언어 감각을 활용해 사실을 적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다. 시에서의 풍자는 자칫 잘못하면 본전도 되지 못한다. 경박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왕광옥 시인은 그것을 번번이 넘어서고 있으니 시인만의 시적 변별성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개의 항변’ 속 “나는 사람과 그래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아니었어!/ 어느 전철역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옷을 벗었어!/ 그랬더니 사람들이 "개지랄하네" 하더군/ 개가 지랄했나, 사람이 했지!”라는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 만만찮다. 바로 서지 않는 세상에서 부조리한 일상에 대한 카타르시스는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계절의 변화는 자연 속에서 일어나지만, 시인은 예민한 감각으로 시적인 사유를 이뤄 형상화한다. <너희들은 몰라 헌신적 사랑의 법칙을!>이란 시제詩題부터가 선언적이다. 시어는 부드럽지만, 당찬 인식의 전환을 여기에서도 욕구한다. 햇볕도 안 드는 도시의 담장 안에 핀 화사한 벚꽃을 드나들며 꿀을 따는 벌이 있다. 일벌의 행위를 인간의 눈으로 가볍게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는 시다. 시인은 노동의 결과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서 멈추지 않는다. 건강한 노동을 통해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꿀벌을 인간의 이기심으로 보는 것을 나무라고 있다. “벌이 아닌 인간인 너는 항상 만족하니?”라며 ‘사랑’은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상식화된 조건부나 대가성이 아닌 이타적인 헌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의 사회성은 경계를 넘어 국제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부끄러운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데에 대한 진정한 양심이다.
2018년 12월 15일 스즈키컵 베트남 우승
나두 우리나라가 우승한 것만큼 좋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조금 감소한 듯 가볍고 좋다
박항서! 화면에 비치는 저 정열
나도 한번 갖고 싶다
베트남 제일 높은 사람인 듯
박항서와 악수하며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줬어!
관중석에도 태극기가 휘날렸지만
우승 뒤 선수 한 명이 태극기를 몸에 감싸고 있었어!
-<박항서의 정열> 부분
축구 감독 박항서의 베트남 성공신화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투혼으로 일궈낸 한 개인의 성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박항서 감독이 상징하는 ‘대한민국’과 ‘태극기’는 한 개인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베트남 전쟁 시기 파병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만행을 상기시킨다. 당시 처참한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베트남인들은 현장에 ‘한국군 만행비’까지 세워 놓았다. 그런 것을 모를 리 없는 베트남인들의 박항서에 대한 환호를 보면서 “ 눈물이 나왔어!/ 우리의 진심은 아니었을지라도 베트남에 끼친 상처/ 미안하구/ 이념을 넘어 출렁이는 저 환호!”가 왕광옥 시인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왕광옥 시인의 시가 평범한 언어로 구조되어 있지만, 위중한 시의詩意의 범주를 포괄하는좋은 방증이다. 그것은 시가 갖는 윤리적 덕목들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수사적인 문장의 나열이 아닌 실질적인 삶의 과정이자 가치이고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시를 만들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응시와 투사 속에서 꿈틀대는 과거의 시간을 통째로 소환한다. ‘애기똥풀’을 보면서 왕광옥 시인은 몸으로 낳은 아들을 떠올린다.
꽃잎을 따서 짓이겨 보았죠
내 아가의 노오란 것이 거기 있었죠
지금은 내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그래도 내 아들이죠
하나만 아니고
고아원처럼 애기똥풀처럼 많았으면 좋겠어요
왜 그렇게 내 마음이 아련해질까!
이제 나도 접기 시작해야 되는 나이가 되었구나
.............
-<애기똥풀> 부분
‘애기똥풀’의 앳된 이미지는 “순수 그 자체죠/ 똥 해도 더럽지 않은 꽃/ 내 가슴에 박아 놓고 싶은 꽃”처럼 예쁘기만 한 아기를 연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낳아 키운 과정을 온몸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잎을 따서 짓이겨 보았죠/ 내 아가의 노오란 것이 거기 있었죠”라는 말을 보면 요즘처럼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해 아기를 키운 세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예전에는 부드러운 천을 떠다 기저귀를 만들어 헤어질 때까지 썼다. 아기가 똥을 싸면 천 기저귀를 빨아 삶아 다시 사용했고, 기저귀를 말린 후에도 똥 자국이 노랗게 남았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힘들던 세월을 지난 지금 아들이 성장하면서 시인을 가슴 아프게 한 것마저 안타까운 것이다. 엄마의 마음이 그런 것이다. 품 안 자식이란 말이 맞기 때문이다. 나이는 피해 갈 수 없듯 세월이 지나서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애기사과>에서 본능 속에 온재되어 있는 모성을 드러낸다. 시적 대상으로 다가온 ‘애기사과’의 연원을 생각해본다. 사물에 대한 이름을 명명할 때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애기사과’를 통해 “참 예쁘다/ 이렇게 조그만 사과를/ 애기 머리만큼 크게 만든 이 누구인가/ 인간!/ 바로 나”라며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성을 상기한다. 그 모성은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전능을 갖고 있다. 시인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도 그렇거니와 ‘애기사과’도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논리적이지 않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닌 더 많은 누군가에게 기여하기 위한 창조인 셈이다. “작고 쓰고 떫고 맛없는 사과를/ 달고 시원하게 만든 이 인간 아닌가!/ 나무를 위해 만들었나?/ 새 같은 짐승들을 위해 만들었을까!”라는 설의법으로 묻는 것에 대한 답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왕광옥 시인이 지향하는 시의 진폭振幅은 인간의 욕망을 넘은 곳까지 바라보기 때문이다. 각박한 현대인들의 본성의 근원이 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왕광옥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회복도 가능한 것이다. 계절의 순환처럼 어느새 봄은 겨울을 맞아 하얀 눈 속에 덮이고 만다. 죽음의 속성도 계절처럼 그렇다.
보았수!
기와 위에 핀 소나무!
꽃이 많이 피었어!
가려나 봐!
-<와송> 전문
사람들은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말한다. 시인도 와송을 보며 그런 속내를 드러낸다. ‘와송’은 도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골에서도 보기가 쉽지 않은 식물이다. 그 와송이 풍기는 이미지처럼 검버섯 핀 지붕 위 기왓장 위에서 혼신을 다해 살아남은 처연함을 보여준다. 모든 식물이 그렇듯이 꽃을 피워 생명을 대물림한다. 그래서 생명은 ‘사랑’이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도 끝이 있어 소멸(죽음)을 맞이한다. 척박한 기왓장 위의 와송의 생애가 ‘사랑’이라면 참으로 모진 것이다. 그 처절한 고투에서 얻은 생마저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 꽃을 피운 와송을 보며 ‘죽음’의 천기를 읽고 만다. 이럴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법이다.
<아들의 지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영광이 있을지 몰라!!>란 말에는 깊은 생의 비의가 담긴 페이소스다. 생을 마감하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마는 애수의 극한極限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인간답다. 외삼촌 집에서 뜻밖에 “첫눈에 들어오는 것,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사진”을 본다. 그분들은 이미 오십 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고인들의 소중한 사진이 아이들 유치원 사진과 나란히 벽에 걸려있는 것이다. 변함없이 ‘사랑’으로 함께하는 외삼촌의 순정한 마음을 보았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내가 죽은 뒤라도/ 조그만 그림이 되어/ 아들의 지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영광이 있을지 몰라!”라는 독백은 인생이라는 연극이 끝난 뒤에도 마감할 수 없는 대사臺詞의 여운이 짙다. 시인도 세상이 보이는 눈을 가진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다. 아니라면 시인의 타고난 신통함으로 천기를 읽을 줄 안다는 말과 상통한다. 시인의 관점에 대한 사유는 과거 속에 멈추지 않고 현실에서 재현되곤 한다. 그것은 시인이 갖는 가치관의 긍정적인 변주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렇게 멋있어 분다요>는 우회적으로 자본주의 속성에 물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담론성의 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왕광옥 시인의 다양한 지식을 축적한 사유의 폭이 넓고 깊다는 것이다. 추나라 ‘목공’ 이야기를 아는 분들이 많다고 볼 수만은 없다. 알곡 대신 쭉정이를 새 모이로 쓰도록 한 군주의 위민 정신을 통해 현실에서 만연하고 있는 “지금 부잣집 우리나라의 개들은/ 사람보다 훨씬 호강하며 산 다메요/ 국민의 노력과 노동/ 국민이 팔아주어 이룩한 富인데/ 지금 수출해서 번 돈이라고국민을 개 취급도 안 한다면……” 가진 자들의 탐욕적인 욕망을 질타하고 있다. 시를 통해 해소해가는 갈증적인 현실은 그만큼 녹록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거의 필사적일 만큼 끝이 없기 때문이다. 왕광옥 시인이 바라본 현실은 문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인간과 달리 자연은 가진 만큼의 속성을 보여주고 스스로 거두어간다. 봄에 핀 ‘산수유’ 꽃은 무한 변신을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는 먼 본성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상상 속 세계는 동화의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순수한 충동으로 매번 새롭다. 새롭다는 의미는 상상력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는 뜻이다. <르누아르의 풍경화 같은 세상>에서는 ‘르누아르’의 인상파적인 색채감을 상상한다. ‘르누아르’가 상상한 대로 색감을 넣어 화려한 그림을 완성하듯, 시인도 노랗게 핀 ‘산수유’ 꽃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이다. 산수유의 마른 가지 속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줄 수 있었다니라며 “산수유야!/ 겨우내 노오란 꿈을 꾸었니?/ 나도 파스텔 색조의 풍경화 같은 꿈을 꾸면/ 내년에 르누아르의 풍경화 같은 세상이 나에게 올까!”라며 고조된 심상을 보여준다. 왕광옥 시인의 감각은 매우 예민하여 소소한 것에서도 감동한다.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시적 발상은 시인만의 장점이다. 그것들의 오랜 축적의 결과인 시론을 통해 시적 윤리를 환기한다.
지금 시는 수학이다
옛적에 국어 선생님이 설명하는 시는 감동이었다
이용악의 시를 읽으면
지금도 그 감정에 빠진다
도서관에서 시집을 열 권씩 빌려다 읽고 또 읽는다
읽을수록 시는 수학이더라
짜고 비틀고 시클로프스키의 문학론과 딱 맞아떨어지더라
지금 시는
문학론에 의거 백점 만점에 백점이지만
감정은 없고
문학계엔 형태만 있는 백점만 난무하더라
시라는 게
덧셈 뺄셈 지나 방정식 같은 건 수학도 아니고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건 수학 측에나 낄려나
지금 詩는 미분이고 적분이더라
수학은 대체로 0이던지 1이란 답이 있지만
시란 빵이더라
둥근 오븐에 빙글 빙글 돌아가는, 지금은 수퍼에 없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립 호빵 같은 거!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립 호빵 같은 거!> 전문
시인은 문학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시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맥락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시류를 들춘 것이다. 그 징후는 서정성의 근간인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느 때부터 별개가 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인간의 삶과 밀착한 자연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 부유해버린 문학이 서정시의 영토를 잠식하는 데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시인은 시의 변곡점이 된 90년대의 사회 환경이 80년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의 서정에서 견고하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 단절은 심화하고 반복된다. 그 결과는 앞으로도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고 현실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다. 시인은 인간적인 삶의 심연을 통해 수수된 서정적 자아의 정처는 다른 곳이 아닌 “시란 빵이더라/ 둥근 오븐에 빙글 빙글 돌아가는, 지금은 수퍼에 없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립 호빵 같은 거!”라며 현대인의 냉혹해진 가슴을 보듬어줄 과거의 시간을 제시한다. 과거의 그 시간 속처럼 시가 그러해야 한다는 시론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서정시의 위기는 변화된 현실에서 충분한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 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말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국가 윤리에서도 적용하려 한다. 그것은 사람의 도리이자 우리나라 사람만이 지켜야 하는 덕목만은 아닐 것이다. 한 여름날의 폭염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염력으로 주문呪文한 시詩다.
참 고고도 미사일이 성주로 간다데
수도도 방어 못 하는 부족한 쇠붙이들
원하는 사람 없어도 제 발로 걸어오데
원폭 피해자 위령탑에 기어코 헌화 안 하더니
그렇게 좋은 거면 일본 원폭 피해자 위령탑 안에 배치하던지
그네들은 위로받았으니 그깟 피해쯤이야 감수해야지!
언제쯤 우리나라에 인상여 같은 외교관이 나오려나……
화씨벽을 안고 쇠기둥에 부딪힐 만한 용기를 가진 자
여름이 확 달아나네
-<여름을 확 베어 문 느낌!> 부분
은 강제된 세계 질서 축에서 침해된 국가 주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시원스럽게 표출한다. 매우 직설적이지만,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시적 발화다. 공허하고 불안한 현실에서 카타르시스를 통한 문학의 실천과 기여를 생각해 본다. 뜨거운 ‘여름을 확 베어 문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이 시를 읽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상상했지만, 그렇지 않다.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성주’에 설치한 ‘고고도 미사일 사드’ 문제를 풀 고금古今을 아우른 ‘인상여’를 통해 수백 권을 능가하는 비책을 들춰보이고 있다. ‘인상여’는 조나라 혜문왕 때 충신이자 책사다. 매번 위기가 닥치지만, 조나라가 아무것도 잃지 않도록 기여한 협상가이자 전략에 능한 충신이다. 그렇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초특급 발설을 통해 시원스럽게 해소하고 있다.
지금껏 왕광옥 시인의 많은 시를 일별 해보았다. 문학적 출발과 과정 그리고 앞으로의 진전될 행로까지 추이를 통해 상상해보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건강한 현재의 시간을 통해 ‘나’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문학적 범주에서 윤리적인 가치의 위중함을 환기했다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모성적 섬세한 감각으로 교차와 확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언어적 상상력을 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언어의 중의성을 통해 왕광옥 시가 가볍지 않다는 확인도 가능했다. 일상 언어를 진술에 그치지 않고 내면의 질서를 재현하여 윤리적 가치로 환원하려는 노력은 시가 관념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변별성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시적인 것으로 드러낸 변별성을 흔치 않은 개별성이라고 본다면 완미함의 즐거움도 큰 것이다. 그런 흐름을 진전시켜 고유성으로 맥락화 해 간다면 저변(민중)에서 생성된 담론도 시 안에서 충분히 주목할만하다는 것이다. 시가 언어유희가 아니란 것을 확인시켜준 왕광옥 시인의 시사성이 강한 시적 출현과 성장의 도래를 긍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