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羅世家上
許 穆
新羅는 本辰韓之地로 宜五穀하고 饒蠶桑之利라 其俗儉嗇하며 男女有別이라 新羅는 出於赫居世하니 原史曰 赫居世ㅣ 化生하여 爲生民之祖라 其生也에 六部長이 以爲神하여 立爲君이라 號는 居西干이요 國號는 徐羅伐이라하고 以朴爲姓이라 當西漢孝宣五鳳元年(紀元前 57年)에 立閼英氏爲妃한데 有二龍見而閼英生하여 號曰 二聖이라
신라는 본래 진한(辰韓) 지역으로 오곡에 알맞고 양잠(養蠶)의 이익이 넉넉하였다.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였으며, 남녀가 유별하였다. 신라는 혁거세(赫居世)로부터 출발하니, 원사(原史)에 이르기를 “혁거세가 화생(化生)하여 생민(生民)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가 태어나자 육부(六部)의 촌장(村長)들이 신으로 여겨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으며,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시기는 서한(西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해당한다. 알영씨(閼英氏)를 세워 비(妃)로 삼았는데,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는 현상이 있고서 알영이 태어났으므로 호를 ‘이성(二聖)’이라고 하였다.
* 혁거세(赫居世): 기원전 69년경, 한반도의 남동쪽에는 여러 부족 국가들이 모여 연맹을 이룬 진한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한 중에서 경주 지방에는 모두 여섯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알천의 양산촌, 돌산의 고허촌, 무산의 대수촌, 취산의 진지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촌 등이었다. 여섯 마을의 촌장들은 회의를 열고 나라를 세우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려면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셔야 했다. 촌장들은 먼저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촌장들의 눈에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흰말이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흰말은 크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고, 흰말이 있던 자리에는 자줏빛 알이 있었다. 촌장들이 조심스럽게 알을 건드리자 껍질이 갈라지면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촌장들은 하늘에서 임금을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사내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혁거세란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이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으니 성은 박 씨가 되었다. 박혁거세는 촌장들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 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라고 지었는데, 서라벌은 신라의 옛 이름이다. 박혁거세는 약 61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 화생(化生): 생물(生物)의 몸이나 그 조직(組織)의 일부(一部)가 형상(形狀)이나 기능(機能)을 바꾸어 달리 되는 일. 몸이나 의탁(依託)할 곳이 없이 홀연히(忽然-) 생겨나는 일. 또는 그렇게 생겨난 귀신(鬼神).
* 육부(六部):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 삼한〉에 “진한은 처음에 6국이 있었으니, 양산(楊山), 고허(高墟), 진지(珍支), 대수(大樹), 가리(加利), 고야(高耶) 등의 6촌(村)이며, 이를 진한(辰韓) 육부라고 이른다.” 하였다.
樂浪이 來侵伐이라가 見國人門不夜扄하고 以爲有道之國하여 乃引歸라 赫居世ㅣ 遣瓠公하여 聘于馬韓한데 其國君이 留欲劫之하니 瓠公曰 寡君이 修德以治하니 天道順而五穀穰熟하고 人民敬讓하니 傍國多歸之니이다 寡君ㅣ 修禮與國하여 遣下臣來聘이라 禮甚厚而欲劫之者는 何也오 其國老ㅣ 慙하여 言於其君하니 乃還瓠公이라
낙랑(樂浪)이 쳐들어왔다가 나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을 보고는 도가 있는 나라라고 여겨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혁거세가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빙문(聘問)하였는데, 그 나라 임금이 그를 억류하여 위협하고자 하였다. 호공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덕을 닦아 나라를 다스리니, 천도(天道)가 순조로워 오곡이 잘 여물고 백성이 공경하고 양보합니다. 이에 근방의 나라들이 많이 귀의하였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예를 닦아 귀국과 동맹을 맺으려고 신을 보내 빙문하게 하였습니다. 예가 매우 두터운데 위협하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였다. 그 나라의 장로가 부끄러워하여 자기 임금에게 말하니, 마침내 호공을 돌려보냈다.
其明年에 馬韓國君死라 或曰 西韓이 前辱我使ㅣ 甚無道하니 不如因其喪伐之라하니 赫居世曰 幸人之喪은 不仁이라하고 不聽하다
그 이듬해에 馬韓國의 임금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한(西韓)이 전에 우리 사신을 욕보인 것이 매우 무도하였으니, 그들의 상사(喪事)를 틈타 정벌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혁거세가 말하기를, “남의 상사를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하고, 듣지 않았다.
* 서한(西韓): 마한을 말한다. 《기언》 권32 〈삼한(三韓) 마한(馬韓)〉에 “마한을 신라 사람들은 서한이라고 하였다.” 하였고, 《국역 동사강목》 제1상 계해년(3) 11월 조에 “마한은 신라국의 서쪽에 있으므로 신라인들이 서한이라고 일컬었다.” 하였다.
東沃沮ㅣ 獻良馬曰 聞南韓有聖人하고 來獻云이라 弁韓降하다 赫居世卒하고 子南解立하여 號次次雄이라 立始祖廟라
동옥저(東沃沮)가 양마(良馬)를 바치며 말하기를, “남한(南韓)에 성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 바칩니다.” 하였다. 변한이 항복하였다. 혁거세가 졸하고, 아들 남해(南解)가 즉위하여 호를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하였다.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 남한(南韓): 신라를 말한다. 《국역 동사강목》 제1상 계해년(3) 11월 조에 “신라는 남쪽에 있으므로 동옥저(東沃沮)가 남한이라고 일컬었다.” 하였다.
* 차차웅(次次雄: 신라 박혁거세의 맏아들이며, 제2대 왕인 남해왕(南解王)의 칭호. 신라에서는 제22대 지증왕 이전까지 최고 통치자(왕)를 거서간(居西干) ·차차웅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불렀다. 차차웅이라는 칭호는 남해왕 1대에만 사용한 무당을 뜻하는 말로, 자충(慈充)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모셨으므로 두려워하고 공경하면서, 존장자를 부르기를 이 말로써 하였다. 남해왕을 차차웅이라고 부른 것은 제사적 측면에서 칭한 위호로, 신라 초기의 신정정치적 성격을 나타내주는 칭호이다.
昔脫解는 本婆那(婆那는 在日本東一千里라)國人으로 力學이라 家貧漁釣라 南解ㅣ 聞其賢하고 妻以女하고 以爲大輔하여 任國政이라 南解卒에 遺命立脫解하여 太子儒理ㅣ 讓於脫解나 脫解不肯立而立儒理하니 號尼師今이라
석탈해(昔脫解)는 본래 파나국(婆那國) 사람으로 학문에 힘썼다. 집이 가난하여 물고기를 낚아 생활하였다. 남해는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딸을 시집보내고 대보(大輔)로 삼아 국정(國政)을 맡겼다. 남해가 졸할 때에 탈해(脫解)를 세우라는 명을 남겼으므로 태자 유리(儒理)가 탈해에게 양보하였으나, 탈해가 즉위하려고 하지 않고 유리를 세우니, 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고 하였다.
* 석탈해(昔脫解):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의 시조. 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 재위 57~80.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생으로, 처음에 그 국왕이 여국왕의 딸을 데려다 아내로 삼았더니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왕이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왕비는 그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그 궤가 금관국 해변에 가서 닿으니, 금관국인이 이를 이상히 여겨 내버려 두었다. 궤는 다시 진한의 아진포구에 다다랐으며, 한 노파의 눈에 발견되어 노파가 궤를 열어본즉 거기에는 아이가 있었다. 이 노파가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9척 장신에 총명한 아이로 자랐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에게, 성을 알지 못하니 궤짝이 해변에 와 닿았을 때 까치가 따라다닌 것을 따라 까치작(鵲)의 한 편만 떼어내어 석씨로 성을 삼게 했다. 학문을 익혀 이름이 나게 되었고 마침내 제2대 왕 남해왕의 눈에 띄어 남해왕이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으며, 대보라는 관직을 주어 정사를 맡게 했다. 유리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儒理ㅣ 立하여 六部大人에 皆賜姓하여 爲貴臣하니 曰李 曰崔 曰孫 曰鄭 曰裵 曰薛이라 初置官十七等하니 曰伊伐飡 曰伊尺飡 曰匝飡 曰波珍飡 曰大阿飡 曰阿飡(阿飡은 自重阿飡으로 至四重阿飡이라) 曰一吉飡 曰沙飡 曰級伐飡 曰大奈麻(大奈麻는 自重大奈麻로 至九重大奈麻라) 曰奈麻(奈麻는 自重奈麻로 至七重奈麻라) 曰大舍 曰舍知 曰吉士 曰大烏 曰小烏 曰造位라 問鰥寡孤獨廢疾者하니 四方歸之라 百姓富樂이라 有兜率之歌라
유리가 즉위하여 육부의 대인(大人)에게 모두 성(姓)을 하사하고 귀신(貴臣)으로 삼으니, 성은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이다. 처음으로 17등의 관직을 설치하니, 이벌찬(伊伐湌), 이척찬(伊尺湌), 잡찬(匝湌), 파진찬(波珍湌), 대아찬(大阿湌), 아찬(阿湌), 일길찬(一吉湌), 사찬(沙湌), 급벌찬(級伐湌), 대내마(大奈麻), 내마(奈麻), 대사(大舍), 사지(舍知), 길사(吉士), 대오(大烏), 소오(小烏), 조위(造位)이다.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지내는 노인, 병든 자를 위문하니, 사방에서 귀의하였다. 백성이 부유하고 즐거워하였다. 도솔가(兜率歌)가 있다.
* 유리왕(儒理王): 신라3대 왕(재위:24~57년).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라고도 부른다. 남해왕의 태자. 어머니는 운제 부인(雲帝夫人), 비는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남해왕이 죽은 후 대보탈해(大輔脫解)가 덕망이 있음으로 왕위를 서로 양보하였으나 나이가 많아 먼저 즉위했다. 이사금은 고유한 말인 치리(齒理)를 뜻하는 것으로 그후 박ㆍ석ㆍ김 3성의 치장(齒長: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고쳐 성(姓)을 내렸고, 관위 17등을 정하였다. 신라 가악(歌樂)의 기원인 《도솔가(兜率歌)》ㆍ《회소곡(會蘇曲)》을 제정하였다. 37년(유리왕 14) 낙랑이 고구려에게 망하고 낙랑 사람 5000여명이 투항하여 오자 이를 4부로 나누어 넣었으며, 유명(遺命)으로 탈해가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 도솔가(兜率歌): 《국역 동사강목》 제1하 무자년(28) 11월 조에 “이해에 비로소 도솔가를 지으니, 이것이 신라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하였다.
駕洛始祖는 金首露니 立爲附庸之國이라 於是에 有五伽倻하니 曰阿羅伽倻 曰古寧伽倻 曰大伽倻 曰伽倻 曰小伽倻라 儒理卒에 國人皆曰 先君之命也라하고 立昔脫解라
가락(駕洛)의 시조는 김수로(金首露)이니, 세워서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이에 다섯 가야(伽倻)가 있었으니,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대가야(大伽倻), 가야, 소가야(小伽倻)이다. 유리가 졸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군(先君)의 명이다.” 하고, 석탈해(昔脫解)를 세웠다.
昔脫解立하여 以瓠公으로 爲大輔라 脫解ㅣ 得閼智於始林이라 閼智之生에 有鷄瑞한데 脫解以爲天祚我以胤嗣라하고 改始林曰 鷄林이라하고 因以爲有國之號하고 賜其姓曰金이라 脫解卒하고 立儒理子婆娑라
석탈해가 즉위하여 호공을 대보로 삼았다. 탈해가 시림(始林)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 알지가 태어날 때 계서(鷄瑞)가 있었는데, 탈해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대를 이을 자손으로 복을 내린 것이다.” 하고,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인하여 계림을 국호로 삼았으며, 그에게 김씨(金氏) 성을 내려 주었다. 탈해가 졸하고, 유리의 아들 파사(婆娑)를 세웠다.
* 알지(閼智): 《국역 동사강목》 제1하 을축년(65) 3월 조에 알지는 방언으로 ‘어린아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알지는 장성한 뒤에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대보(大輔)가 되었으며, 6세손 미추(味鄒)에 이르러 신라의 왕이 되었다.
* 계서(鷄瑞): 닭의 길조라는 뜻으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알지를 얻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위 자료에 ‘금독백계(金櫝白鷄)의 이적(異蹟)’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금독이란 황금 상자로 이 안에 알지가 있었고, 흰 닭이 황금 상자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 경주부》
* 파사왕(婆娑王): 신라 5대 왕(재위 : 80~112). 왕을 이사금(尼師今)이라 하여 파사 이사금 이라고도 한다. 유리왕(儒理王)의 둘째아들, 혹은 유리왕의 아우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金氏). 유리왕의 태자가 파사왕 만큼 현명하지 못해서 파사왕을 옹립하였으며 즉위하자 검소 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현군이었다. 94년(왕 15) 가야가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자 이를 물리쳤고, 96년 남비(南鄙)를 습격하였다. 101년 월성(月城 :재성(在城))을 쌓고 옮겨 살았으며, 102년 음집벌(音汁伐)ㆍ실직(悉直)ㆍ압독(押督) 세 나라를 병합하고 106년 가야를 공격, 108년 비지(比只)ㆍ다벌(多伐)ㆍ초팔(草八)을 합병하는 등 국위를 떨쳤다. 능은 사릉(蛇陵 : 경주 5릉)이다.)
婆娑立하여 勸農桑하고 修城池하고 治器械하며 黜不勤職者하니 國大治有年하여 行者不齎糧이라
婆娑卒하고 祗摩立하다 祗摩卒에 無子하여 儒理子逸聖立하다
파사가 즉위하여 농사와 길쌈을 권면하고 성곽과 해자를 보수하고 기구를 손질하였으며, 직무에 부지런하지 않은 자를 내쫓으니, 나라가 크게 다스려지고 풍년이 들어 길 떠나는 자들이 식량을 싸 들고 다니지 않았다.
파사가 졸하고 지마(祗摩)가 즉위하였다. 지마가 졸하고 아들이 없어 유리의 아들 일성(逸聖)이 즉위하였다.
* 지마(祗摩): 신라 제6대 왕(재왕 : 112~134). 지마 이사금(祗摩尼師今)이라고도 부른다. 전왕 사파왕(娑婆王)의 적자로 비(妃)는 김씨 애례부인(愛禮夫人)이다. 115년(지마왕 4)에 가야가 내구(來寇)하여 황산(黃山)에서 싸웠는데 이때부터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121년(지마왕 10)에는 동변(東邊)에 왜구(倭寇)가 넘나들어 123년(지마왕 12)에 왜국과 강화를 맺었고 125년에는 말갈(靺鞨)의 북변 침입이 있어 백제의 구원(救援)을 얻어 이를 물리쳤다. 왕이 승하(昇遐)하자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이 왕위(王位)에 올랐다.
* 일성(逸聖): 신라 제7대왕. 재위 134~154년.
令郡縣하여 大修堤坊하고 禁民毋用金銀珠玉이라 逸聖卒하고 長子阿達羅立하다 三年에 開鷄立嶺하고 明年에 置迎日縣하고 又明年에 開竹嶺하다 阿飡吉宣이 謀叛이라가 事覺에 奔百濟라 阿達羅ㅣ 遺書蓋婁曰 宣不還이면 無相好也라한데 蓋婁不聽이라 阿達羅ㅣ 遣兵伐百濟라 阿達羅卒에 無子하여 國人이 立脫解之孫伐休하다
군현(郡縣)에 영을 내려 제방(堤防)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백성에게 금은과 주옥(珠玉)을 사용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다. 일성이 졸하고 맏아들 아달라(阿達羅)가 즉위하였다. 3년에 계립령(鷄立嶺)을 개척하고, 이듬해에 영일현(迎日縣)을 설치하였으며, 또 이듬해에 죽령(竹嶺)을 개척하였다.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백제(百濟)로 달아났다. 아달라가 백제 왕 개루(蓋婁)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길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국가 간의 우호는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개루가 듣지 않았다. 아달라가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쳤다. 아달라가 졸하고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탈해의 손자 벌휴(伐休)를 세웠다.
* 아달라(阿達羅): 신라 8대 왕(재위 : 154~184). 원래 칭호는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성은 박(朴). 일성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朴氏), 비는 지마왕의 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 즉위 후 감물(甘物)ㆍ마산(馬山) 등의 도로를 개통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썼다. 165년 모반하다가 백제에 망명한 아찬(阿飡) 길선(吉宣)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불응하자 백제와 사이가 나빠져 자주 싸움을 벌였다. 173년 왜(倭)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파견하여 수호를 청하므로 사신을 교환했다.
* 계립령(鷄立嶺): 충청도 연풍현(延豐縣)과 경상도 문경현(聞慶縣)에 걸쳐 있는 고개로 마골재〔麻骨岾〕라고도 한다. 마골은 껍질을 벗긴 삼대로 우리말로는 겨릅이라고 하니, 겨릅과 계립이 소리가 비슷하여 생긴 이름이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연풍현, 제29권 경상도 문경현》
* 벌휴(伐休): 신라의 9대 왕(재위 : 184~195). 성은 석씨(昔氏). 발휘왕(發暉王)이라고도 한다. 탈해왕(脫解王)의 손자. 어머니는 내례 부인(內禮夫人) 김씨(金氏). 아달왕(阿達王)의 사후에 왕위에 올랐으며, 185년(왕 2) 처음으로 좌우군주(左右君主)를 두어 소문국(召文國)을 평정, 군주의 이름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재위 중 백제와의 국경 분쟁이 치열하였으며, 186년(왕 3)에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풍속을 시찰했다.
伐休立하여 巡行郡縣하며 問謠俗하고 下令毋作土木하고 毋奪民時라 伐休卒한데 太子骨正이 早死하고 太子之子助賁幼하여 立次子之子奈解하다 奈解卒하고 故太子之子助賁立하다 遣伊飡昔于老하여 滅甘文國爲郡하다 助賁卒하고 母弟沾解立하다
벌휴가 즉위하여 군현을 순행하고 가요와 풍속을 물었으며, 영을 내려 토목 공사를 일으키지 말고 백성의 농사짓는 시기를 빼앗지 말도록 하였다. 벌휴가 졸하였다. 태자 골정(骨正)이 일찍 죽고 태자의 아들 조분(助賁)이 어렸으므로 둘째 아들의 아들 내해(奈解)를 세웠다. 내해가 졸하고, 죽은 태자의 아들 조분이 즉위하였다. 이찬(伊湌) 석우로(昔于老)를 파견하여 감문국(甘文國)을 멸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조분이 졸하고 동모제(同母弟) 첨해(沾解)가 즉위하였다.
* 차자(次子): 벌휴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이매(伊買)이다. 역시 일찍 죽었다. 《국역 동사강목 제2상 병자년 4월》
* 내해(奈解): 신라의 제10대 왕(재위 : 195~230). 즉위 후 진충(眞忠)을 일벌찬(一伐湌)으로 삼아 국정(國政)을 돕게 하고, 왕자 이음(利音)을 이벌찬(伊伐湌)에 임명, 군사(軍事)를 다스리게 했다. 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은 가락국(駕洛國)의 요청으로 원병을 파견, 이들을 물리쳤다. 재위 기간 중 자주 백제의 침입을 받았으나 214년 이벌찬 이음을 시켜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공략하고, 218년에는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친히 격퇴했다.
* 조분(助賁): 신라 제11대 왕(재위 : 230~247). 본래의 칭호는 조분 이사금(助賁尼師今), 또는 제귀왕(諸貴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 벌휴왕의 손자, 갈문왕(葛文王) 골정(骨正)의 아들. 어머니는 갈문왕 김구도(金仇道)의 딸 옥모부인(玉帽夫人), 비는 내해왕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선왕 내해왕의 유언으로 왕위를 계승, 231년 이찬(伊飡) 우로(于老)를 시켜 감문국(甘文國)을 정벌, 233년 왜구의 침입에 또 이찬 우로에게 군사를 주어 격퇴케 했으며, 236년 골벌국(骨伐國)의 항복을 받았다.
* 첨해(沾解): 신라의 12대 왕(재위 : 247~261). 조분왕(助賁王)의 아우. 249년(첨해왕 3)에 사량벌국(沙梁伐國)을 쳐서 신라에 통합시켰다. 이해 왜구(倭寇)의 침공을 받았고, 248년(첨해왕 2)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화친(和親)하였다. 255년(첨해왕 9)에는 백제의 침공을 받았고, 달벌성(達伐城)을 축조하였다.
自阿達羅之世로 與百濟相攻伐五世라 新羅ㅣ 自儒理滅伊西之國으로 脫解ㅣ 滅干尸․居漆하고 婆娑ㅣ 降悉直․押督․比只․多伐․草八․音汁伐하고 沾解ㅣ 連克甘文․沙伐하여 幷國十一하여 國益強하니 百濟ㅣ 遣使求和라 倭ㅣ 遣兵來侵하고 燒殺貴臣于老라 後倭使者至한데 于老之妻ㅣ 請享이라 使者ㅣ 飮醉而燒殺之曰 所以報之也라하다
아달라 세대부터 백제와 서로 공격하여 정벌한 지가 5대째이다. 신라가 유리 때부터 이서국(伊西國)을 멸하기 시작하여 탈해가 간시(干尸), 거칠(居漆)을 멸하고, 파사가 실직(悉直), 압독(押督), 비지(比只), 다벌(多伐), 초팔(草八), 음즙벌(音汁伐)을 항복시키고, 첨해가 감문, 사벌(沙伐)을 연달아 이겨 11국을 병합하자 나라가 더욱 강대해졌다. 이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를 요구하였다. 왜(倭)가 군사를 보내와 침략하고 귀신(貴臣) 우로(于老)를 불태워 죽였다. 후에 왜의 사신이 오자 우로의 처가 사신을 대접하겠다고 청하였다. 사신이 술에 취하자 불태워 죽이고 말하기를, “원수를 갚은 것이다.”
하였다.
沾解卒한데 無子하여 國人이 立味鄒하니 閼智之七世孫也라 味鄒卒하니 助賁子儒禮立하다 築城沙道하고 徙沙伐州豪富於沙道라 賜印觀․署調二人爵이라 二人者ㅣ 鬻綿에 相讓하여 不相取한데 儒禮聞之하고 賢而爵之라
첨해가 졸하고,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미추(味鄒)를 세웠다. 미추는 알지의 7세손이다. 미추가 졸하고 조분의 아들 유례(儒禮)가 즉위하였다. 사도(沙道)에 성을 쌓고 사벌주(沙伐州)의 세력 있고 부유한 사람들을 사도로 이주시켰다. 인관(印觀), 서조(署調) 두 사람에게 벼슬을 내렸다. 두 사람이 솜을 사고팔면서 서로 양보하여 서로 취하지 않았는데, 유례(儒禮)가 이 이야기를 듣고 어질게 여겨 벼슬을 내린 것이다.
* 미추(味鄒): 신라의 13대 왕(재위 : 262~283). 호는 미추(未鄒)ㆍ미조(味照 : 未祖)ㆍ미소(未召), 성은 김(金). 알지(閼知)의 후손. 비는 석(昔)씨, 조분왕(助墳王)의 딸. 김씨 왕의 시조(始祖)로 첨해왕(沾解王)이 아들 없이 죽자 왕이 되었다. 백제의 봉산성(熢山城)ㆍ괴산성(槐山城) 침략을 격퇴시키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 유례(儒禮): 신라의 제14대 왕 (재위 284∼298).
* 二人者 鬻綿 相讓 不相取: 인관(印觀)이 시장에서 솜을 팔자 서조(署調)가 곡식을 주고 솜을 샀는데, 돌아올 때 갑자기 소리개가 나타나 솜을 낚아채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다. 인관이 서조에게 솜을 도로 돌려주었으나 서조가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받지 않자, 인관이 솜 값으로 받은 곡식을 돌려주었으나 곡식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서로 양보하다가 결국 곡식을 장거리에 놔두고 돌아간 일을 말한다. 《국역 동사강목 제2상 무오년 10월》
儒禮卒하고 助賁孫基臨立이라 問高年하고 賑窮乏하고 望祠太白하니 樂浪․帶方이 來朝라 基臨卒에 無子하니 國人이 立于老之子訖解하다 訖解卒에 無子하여 立味鄒之從子奈勿하다 奈勿母 曰休禮로 味鄒之女也라
유례가 졸하고 조분의 손자 기림(基臨)이 즉위하였다. 나이 많은 노인들을 문안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망사(望祠)를 지내니,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이 와서 조회하였다. 기림이 졸하고,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우로의 아들 흘해(訖解)를 세웠다. 흘해가 졸하고, 아들이 없어 미추의 조카 내물(奈勿)을 세웠다. 내물의 어머니는 휴례(休禮)로 미추의 딸이다.
* 기림(基臨): 신라의 제15대 왕(재위 : 298~309). 일명 기립니사금(基立尼師今)ㆍ기립(基立)왕. 조분왕(助賁王)의 손자, 혹은 증손이라고도 한다. 300년 낙랑(樂浪)ㆍ대방(帶方)이 내항(來降)하고, 동년 왜국과 교빙(交聘), 307년 덕업(德業) 일신(日新), 사방망라(四方罔羅)의 뜻에서 국호를 신라로 개칭했다. 삼국사에는 기림이 기구(基丘)로도 되어 있다.
* 망사(望祠): 제사 명칭으로 망사(望祀)와 같다. 멀리서 산천에 지내는 제사인데, 오악(五嶽), 사진(四鎭), 사독(四瀆)에 지낸다.
* 흘해(訖解): 신라 16대 왕(재위 : 310~356).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내해왕(奈解王)의 손자. 각간(角干) 우로(于老)의 아들. 어머니는 조분왕(助賁王)의 딸 원명(元命) 부인. 기림왕(基臨王)이 돌아가고 후손이 없어 왕위에 추대되었다. 일본과 교섭을 펴서 서로 혼인을 청했으며 330년(왕 21) 벽골제(碧骨堤)를 쌓았다 하며, 후사가 없었다.
* 味鄒之從子奈勿: 내물의 아버지는 말구(末仇)로 미추와 형제간인데, 충정(忠貞)하고 지략이 있어 왕이 늘 찾아가 정치의 요강을 물었다고 한다. 말구가 미추의 딸과 결혼하여 내물을 낳았으니, 내물은 미추의 조카이자 외손자이다. 《국역 동사강목 제2상 신해년 1월, 제2하 병진년 4월》
奈勿이 立하여 問鰥寡孤獨하고 賜穀人三斛하며 擧孝弟異等이라 百濟禿山城主ㅣ 以其民來附하니 令分居六部하다 其國君近肖古ㅣ 遣使責還하니 奈勿曰 民無常懷라 懷則歸之하고 不懷則去之하니 不患民之不懷하고 而責寡人乎아하니 濟使大慙이라
내물이 즉위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지내는 노인을 위문하고 곡식 3곡(斛)씩을 사람들에게 내려 주었으며, 효제(孝悌)가 남다른 사람을 등용하였다.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자기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귀의하자,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 나라 임금 근초고(近肖古)가 사신을 보내 그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니, 내물(奈勿)이 말하기를, “백성이란 항상 귀의하는 마음이 없는 존재이다. 은혜로 품어 주면 귀의하고 품어 주지 않으면 떠나니, 백성을 은혜로 품어 주지 못한 것은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책하는가?” 하자, 백제의 사신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 내물(奈勿): 신라의 제17대왕(재위 : 356~402). 각간(角干) 김말구(金末仇)의 아들. 어머니는 휴례 부인(休禮夫人) 김씨(金氏), 비는 미추왕의 딸 보반 부인(保反夫人). 364년 왜병(倭兵)이 침입하자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허수아비를 세워 두고 복병 작전으로 부현(斧峴) 동쪽에서 이를 물리쳤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 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자 이를 받아 6부에서 살게 했다. 381년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에게 보내어 통호(通好)하고 중국 문물 수입에 힘썼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고, 이듬해 일본의 침입으로 서울을 포위당했으나 이를 물리쳤다. 395년 말갈병(靺鞨兵)이 침입하자 실직(悉直)에서 격파했고,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해 주었다.
奈勿卒한데 子幼하여 國人이 立實聖한데 閼智之後也라 奈勿時에 實聖이 質於句麗하여 深怨之러니 旣立爲君에 欲殺訥祗하여 釋憾於其子나 謀泄하여 訥祗ㅣ 弑實聖而自立하여 號摩立干이라
내물이 졸하였는데, 아들이 어려서 나라 사람들이 실성(實聖)을 세웠다. 실성은 알지의 후손이다. 내물(奈勿)이 왕으로 在任時에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가서 내물을 깊이 원망하더니, 즉위하여 임금이 된 뒤에 눌지(訥祗)를 죽여서 내물의 아들에게 감정을 풀고자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호를 마립간(摩立干)이라고 하였다.
* 실성(實聖): 신라의 제18대 왕 (재위 402~417). 성은 김(金), 이름[諱]는 실성(實聖)이다. 왕호(王號)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사금(尼師今),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마립간(麻立干)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전대인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 때부터 마립간의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실성마립간이라 한다.
* 欲殺訥祗 釋憾於其子: 눌지는 내물의 아들이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죽이려고 하였다. 내물의 아들이란 눌지의 두 동생인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을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낸 사실은 아래 단락에 나온다. 《국역 동사강목 제2하 정사년 5월》
* 눌지(訥祗): 신라 제19대 왕(재위 : 417~458). 내물왕의 아들. 왕호는 마립간(麻立干). 실성왕의 딸을 비(妃)로 맞이했다.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 418년(눌지왕 2)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卜好)를 데려왔으며, 또한 박제상을 일본에 보내어 볼모로 가 있던 미사흔(未斯欣) 역시 귀국시켰다. 429년 시제(矢提)를 수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였고 신라 기악 《우식악(禹息樂)》을 지었다. 431년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438년에는 우차법(牛車法)을 제정,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 동맹(攻守同盟)을 맺어 백제에 원병을 보냈다.
訥祗二弟에 卜好는 質於句麗하고 未斯欣은 質於倭라 訥祗ㅣ 思欲還歸而無計策이라 問歃良州干堤上하니 堤上曰 忠臣은 事不辭難하고 義不辭死라하고 請行이라 往說麗君曰 賢王은 尙信하니 質子는 五霸之所不爲라 卜好는 寡君之愛弟也온 質於大國이 今十年이라 寡君이 思相見하여 日望大王之推愛也라 大王許之면 寡君은 德大王之高義니 修好는 不在於質子也라하니 麗王從之라
눌지의 두 동생 중에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고 미사흔(未斯欣)은 왜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눌지가 그들을 돌아오게 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삽량주간(歃良州干) 박제상(朴堤上)에게 계책을 묻자, 박제상이 말하기를, “충신은 일에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고, 의리에는 죽음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고, 가기를 청하였다.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의 임금을 달래기를, “어진 임금은 신의를 높이 치니, 볼모를 두는 것은 오패(五霸)도 하지 않았습니다. 복호는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동생인데, 대국에 볼모로 잡혀 온 지 지금 1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보고 싶어 하여 날마다 대왕께서 사랑을 미루어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허락해 주시면 우리 임금은 대왕의 높은 의리를 덕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호를 닦는 것은 볼모를 두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니, 고구려의 왕이 이 말을 따랐다.
旣還卜好에 堤上曰 倭는 難諭以義니 僞得罪亡者면 可紿而歸라하고 語王曰 我旣行에 卽囚妻子하고 使聞於倭라하다
복호가 돌아온 뒤에 박제상이 말하기를, “왜는 의리로 깨우치기 어려우니, 거짓으로 죄를 지어 망명한다면 그들을 속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왕에게 말하기를, “제가 떠난 뒤에 즉시 저의 처자식을 옥에 가두고, 이 소문이 왜에 들리게 하십시오.” 하였다.
至倭하여 紿言得罪亡狀이라 先有百濟亡人이 言新羅與句麗謀伐倭하고 又聞未斯欣堤上妻與子ㅣ 皆已係累하니 以爲兩人深怨於新羅하여 乃擧兵伐之하며 令兩人前導라
왜국에 도착하여 죄를 짓고 망명하게 된 상황을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에서 망명해 온 사람이 신라와 고구려가 왜를 칠 계획이라는 정보를 말하였고, 또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식이 모두 이미 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들리자 두 사람이 신라를 깊이 원망할 것이라고 여겨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면서 두 사람으로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堤上이 陰遣未斯欣逃歸而身不去하고 以聽倭라 倭酋長이 怒其賣己也하여 召堤上具五刑以待로되 堤上이 終不屈하니 乃燒殺堤上하다 堤上妻及其二女ㅣ 登鴟述之嶺하여 哭望悲號乃死하니 國人哀之하여 立祠以祀之하며 命曰 神母祠라
박제상이 몰래 미사흔을 보내 도망하여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떠나지 않고 남아서 왜의 명을 들었다. 왜의 추장이 자기를 속인 것에 화가 나 박제상을 불러 놓고 오형(五刑)을 갖추어 다루었으나 박제상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였다. 박제상의 처와 두 딸이 치술령(鵄述嶺)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곡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애도하여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 사당을 ‘신모사(神母祠)’라고 명명하였다.
晉太元元年(376年)에 遣使入貢于晉이라 行養老禮하여 執饋以養하고 賜穀帛이라 始用牛車라 倭圍金城十日이라가 解歸라 訥祗ㅣ 親帥輕騎하고 追擊之大敗라 倭ㅣ 圍王數重이나 忽有大霧하니 倭以爲有神助라하여 乃解而去라
진(晉)나라 태원(太元) 1년에 사신을 보내 진나라에 입공(入貢)하였다. 양로(養老)의 예를 행하여 음식을 마련해 봉양하고 곡식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처음으로 우거(牛車)를 사용하였다. 왜(倭)가 금성(金城)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눌지가 직접 날랜 기마병을 거느리고 왜를 추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倭가 왕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니, 왜가 신의 도움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 마침내 포위를 풀고 떠났다.
地震하여 金城城門壞라 其年에 訥祗卒하고 長子慈悲立하다 倭ㅣ 攻歃良州하니 命代智․德智하여 大破之하다 慈悲卒하고 子炤智立하다 初置郵定列肆하여 通百貨라 百濟饑하니 流民至者六百戶라
지진이 일어 금성의 성문이 무너졌다. 그해에 눌지가 졸하고 맏아들 자비(慈悲)가 즉위하였다. 왜가 삽량주를 공격하자 대지(代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자비가 졸하고 아들 소지(炤智)가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우정(郵定)과 열사(列肆)를 설치하여 온갖 물화를 교역하게 하였다. 백제에 기근이 들자 유민(流民) 600가호가 신라로 왔다.
* 자비(慈悲): 신라의 제20대 왕 (재위 458~479).
* 소지(炤智): 신라의 제21대 왕 (재위 479~500).
* 우정열사(郵定列肆): 우정은 곧 우정(郵亭)으로 역관(驛館)을 말하고, 열사는 가게가 죽 늘어선 시장을 말한다.
王之妻에 有外私라 謀殺王이나 適有烏報하여 事發覺에 誅之라 立報日하여 以正歲十五日에 祭烏하고 立愼日하여 以龍致雨하고 馬服勞하고 豕鼠耗百穀이라하여 每正歲에 各以其辰祈禳하며 禁百事하다 炤智卒에 無子하여 智大路立하니 奈勿四世孫也라 是爲智證王이라
왕의 아내 중에 외간 남자와 사사로이 정을 통한 자가 있었다. 왕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으나, 마침 까마귀의 보징(報徵)으로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에 ‘보답하는 날〔報日〕’을 정하여 1월 15일에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고, ‘삼가는 날〔愼日〕’을 정하여 용은 비를 오게 하고, 말은 사람을 위해 수고롭게 일하고, 돼지와 쥐는 온갖 곡식을 소모한다고 하여 매년 정월 각각 해당하는 일진(日辰)에 기도하고 빌며 모든 일을 금하고 하지 않았다. 소지가 졸하고 아들이 없어 지대로(智大路)가 즉위하니, 내물의 4세손이다. 이 사람이 지증왕(智證王)이다.
* 외사(外私): 外間男子와 사사로이 情을 통함.
* 오보(烏報): 이에 대한 내용이 《국역 동사강목》 부록 상권 중 〈괴설변증(怪說辨證)〉에 자세히 나온다. 정월 15일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쥐가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라는 말을 전하므로 기사(騎士)가 까마귀를 뒤쫓다가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까마귀를 놓쳤는데, 그때 노인이 나와 글을 올려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까마귀, 쥐, 노인을 상징하는 용, 기사를 상징하는 말, 돼지를 정하여 정월 15일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제사 지내고, 정월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자일(子日), 진일(辰日), 오일(午日), 해일(亥日)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모든 일을 삼가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 지증왕(智證王): 신라 22대 왕(재위 : 500~514).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부른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ㆍ지도로(智度路)ㆍ지철로(智哲路). 502년(왕 3)에 순장법(殉葬法)을 금하고, 주군(州郡)에 명하여 농사에 우경(牛耕)을 사용하게 하였으며, 503년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504년에 상복법(喪服法)을 제정, 505년 주군현(州郡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 군주(君主)를 두었으며,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고, 512년 우산국(于山國)에게서 항복을 받았다. 지증(智證)이란 시호를 받았으니 이것이 신라 시법(諡法)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