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7)
◇ 큰 창피
가난한 선비 이초시
영리하고 착한 외동딸 시집 보내고…보고싶은 마음에 사돈댁으로…
가난한 선비 이 초시는 동네 학동들 훈장 노릇에 남의 제사에 지방을 써주고 초상집 비문도 써주며 입에 풀칠을 해왔다. 늘 쪼들리지만 부인과 단 두식구라 먹고사는 데는 큰 걱정 없지만 자나 깨나 마음 쓰이는 게 시집보낸 무남독녀다.
부인이 딸 하나 낳고 단산을 하는 바람에 이 초시는 어린 딸을 한시도 떼놓지 않고 업고 안고 다녔다. 사람들은 딸 때문에 공부에 소홀했다고 입방아를 찧지만 이 초시의 끔찍한 딸 사랑은 말릴 도리가 없었다. 딸아이도 제 어미한테서는 젖만 빨아먹고는 쪼르르 제 아비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이 초시 딸 설이는 자라면서 인물도 옥골이었지만 머리가 영리하기 짝이 없어 다섯살 때 천자문을 떼고 일곱살 때 벌써 사서삼경에 몰입했다. 어디 그뿐인가. 타고난 효녀라 까막눈 농사꾼 집에 불려가 편지를 써주고 동전 몇닢을 받으면 주막에 가서 막걸리를 한 호리병 사서 집에 와 제 아비 이 초시 상에 올렸다. 열살도 안된 게 집안 빨래를 다 하고 밥상까지 차렸다. 열다섯살이 되자 혼처가 쇄도했다. 이 초시는 딸 시집보낼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다.
그러던 차 좋은 혼처가 들어왔다. 삼십리 밖 대처의 부잣집 김 진사네가 청혼을 한 것이다. 사돈 될 김 진사는 점잖은 양반이라 이 초시네 형편을 알고 누님을 몰래 보내 이 초시 부인에게 혼수 비용을 전했다. 성대하게 혼례를 치르고 설이는 김 진사 며느리가 되었다. 인물 좋고 싹싹하고 일 잘하고 시부모 잘 모시고 신랑을 하늘처럼 받드는 데다 시집온 지 넉달도 안돼 벌써 헛구역질을 해대니 김 진사 내외는 보물을 얻었다고 며느리를 귀여워했다.
김 진사는 입이 찢어지는데 문제는 삼십리 밖 초가삼간의 이 초시다. 딸이 보고 싶어 허구한 날 눈물을 훔치던 이 초시가 지난가을 손수 깎아 말린 곶감 한접을 보자기에 싸들고 집을 나섰다. “여보, 설이 다녀간 지 한달도 되지 않았잖아요.” 눈이 펄펄 오는 날 가로막는 부인을 밀치고 똑바로 사돈댁으로 향했다.
김 진사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이 초시 두손을 잡으며 반겼다. 술상을 두고 사돈끼리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돌아가고 육회접시가 들어오고 너비아니가 차려지고 닭백숙이 상에 올랐다. 김 진사는 이 초시의 마음을 꿰뚫어 며느리를 이 초시 옆에 앉혔다.
김 진사의 며느리 자랑을 권주가 삼아 이 초시는 마시고 먹었다. 허구한 날 시래깃국에 보리밥만 먹던 이 초시가 기름진 육식에 술이 과해 곯아떨어졌다가 일어나보니 바지에 큰 것을 조금 싸버렸다. 낭패를 당한 것을 알았지만 워낙 술이 취해 바지를 벗어 둘둘 말아 문밖에 내놓고 두루마기를 걸치고 또 잠이 들었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 뒷간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문밖에 내놓았던 바지는 개가 물고 갔는지 없다. 이 초시는 두리번두리번 찾다가 어둠 속에서 빨랫줄에 걸린 바지 하나를 걸쳐 입었다.
어느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 초시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다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을 요량으로 처마 밑에서 펄쩍 뛰었는데 그만 안마당 잔설에 미끄러져 벌러덩 나자빠져 머리를 찧고 잠시 혼절했다. 빨랫줄에 걸렸던 안사돈의 고쟁이 사이로 이 초시의 시커먼 물건이 나왔다. 사돈이 나오고 안사돈이 나오고 하인들이 나오고 사위와 딸도 나왔다. 이 초시 딸이 달려와 제 아비를 안고 울면서 하는 말.
“아버지,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흑흑흑…. 보셨잖아요,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제게 얼마나 잘 해주시는지. 사돈댁에서 큰 창피를 당해야 딸이 구박 안 받고 잘 산다는 그 점쟁이 말을 믿고, 으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