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나의 섬, 나의 영토는 어디인가?(박선주)
고전작품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의미이며, 사고의 힘을 키우고, 언어능력을 성장시키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보면, 고전 명작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의무감으로 읽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아이들은 그것이 왜 위대한 작품성을 지녔다고 하는지, 왜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시대를 뛰어넘어 권장되고 있는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의 범주와 내용, 사유의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낯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 위주로 내용을 파악하고, 작품의 주제를 정리하고, 나름의 교훈을 얻는 정도의 독서 활동에 그치고 만다. 이럴 때 작품은 그 에너지를 잃고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무르는 `낡음’이 되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 성취감도 없이 죽어 있는 책읽기를 하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전이 과연 `낡음’이기만 할까?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내려앉은 그래서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고루하게 느껴지는 오래된 작품들이지만 세대를 거듭하며 많은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고전을 가리켜 흔히 `오래된 미래’라고 한다. 고전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우리 내면의 근원은 무엇인지, 인간 삶의 다양한 본질은 무엇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또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따라서 아이들이 고전을 만날 때 작품의 표면에 떠다니는 의미나 작가의 생각을 재해석해보고, 그것이 출현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을 읽어내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재 나의 삶에 어떻게 유의미할 수 있는지 연결 지어 보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책읽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섬(김수영)
섬은 더 멀리 있는지도 모른다
톡톡 끊어진 수평선
바다를 건너는 새들에게는 쉴 곳이 없는가
긴 여행 끝에
제 무게를 허공에 던지는 순간
추락하는 빛 속에서 섬을 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로빈슨 크루소는 다시 섬으로 갔다
한때 그를 가두었던 무인도
새들보다 더 먼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한 번 가슴속의 새들을 풀어놓기 위해
수평선 너머의 수많은 섬들 중
그리워할수록 얼룩지는 것들
(늙은 로빈슨 크루소는 섬을 찾을 수 있을까)
`섬’은 고립과 단절, 외로움의 공간이다.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들, 군중 속에서 고독한 현대인들을 자기만의 섬에 갇혀 사는 존재로 빗대기도 한다. 하지만 `섬’은 참 다양한 의미의 겹을 지닌 낱말이기도 하는 것 같다. 외부의 어떤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만의 고유한 공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섬, 나의 영토! 이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영토는 과연 어디일까? 영토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자기 주도성, 주인 의식이 아이들의 삶 어디쯤에 출현할 수 있을까?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섬, 무인도는 절망의 공간에서 희망의 공간으로 변신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곳에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 영토라는 것은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꾸어가는 건설의 공간이다. 작품 속에 그려진 로빈슨 크루소의 행동, 로빈슨 크루소의 성격은 한 개인을 넘어서 그 시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섬은 로빈슨 크루소의 물적인 영토이자, 사유의 영토이며, 시대가 구현된 영토이다. 작품은 작가의 영토이며, 섬은 로빈슨 크루소의 영토인 셈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영토를 탐색해보는 것은 `로빈슨 크루소’라는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유 활동이 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표류하다 만난 그 섬은 지구상의 어디쯤에 있을까? 실제로 칠레의 남태평양 해상에 `로빈슨 크루소의 섬’이 있다고 한다.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스코틀랜드 선원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으로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작품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브라질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농장주였고, 노예를 구하러 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으니 아마도 서인도제도의 어디쯤이 아니었을까?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영토에서 28년 2개월 동안 처절하게 혼자 살아간다. 외로움을 이기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낯선 침입자들에 대해 두려워하며, 원시의 섬을 개척해 나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회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 하지만 난파 직전의 배에서 실어온 온갖 문명의 도구들이며, 자신의 세계에서 구축된 지식과 문화적 틀을 고스란히 섬에 구현시키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는 사회를 온전히 떠나온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규칙적인 일과표 안에서 노동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당시 신대륙 개척에 앞장 선 프로테스탄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난파선에 쌓여 있는 쓸모없는 금화들을 비웃고, 농장을 꾸리고 생산물을 축적해가는 그의 태도는 당시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있는 유럽의 시대적 분위기를 보는 듯하다. 잠시의 절망을 딛고 시종일관 합리적인 이성으로 자연을 이용해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은 서구 근대인의 자신감을 담고 있다. 원주민을 구조해주고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을 주인이라고 부르게 하는 데서는 타자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관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영토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개척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18세기 유럽의 시대적 문제를 보게 한다. 애당초 로빈슨 크루소가 바다로 나간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 그 시대에는 항해의 이야기가 많았는가?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이 구축시킨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가? <로빈슨 크루소>는 서구 제국주의가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현장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영토는 30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세계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유럽과 백인들에 의해 재편된 근대의 세계질서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중심과 주변의 획을 그어놓았다. 중심과 주변에 대한 획긋기는 국가와 민족, 인종을 바라보는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의식 안에도 존재한다.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건설하고자 했던 그 시대인들의 의지는 산업화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의 문제, 시대의 문제는 역사성을 지닌다. 우리의 섬은 홀로 고립되어 점점이 흩어져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홀로 떨어진 섬이 아니며, 누구나 대륙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빈슨 크루소’의 섬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나를 성찰하고 더 큰 변화를 꿈꾸는 이에게 멋진 질문을 던진다. 나의 몸이 머물고 있는 섬은 어디까지일까? 나의 사유의 섬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무엇과 관계맺음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과연 그 섬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나의 섬에는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을까?
매일 학교와 학원으로 쳇바퀴 돌듯 반복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위해 지금의 시간을 몽땅 저당 잡히듯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한 권의 책이 자신만의 `영토’를 꿈꾸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일 것이다.
갇힘의 섬이 아닌 관계 속에서, 나의 주체적 의지로, 반성적 성찰로 무한히 확장해 가는 나의 영토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선주 원장 <봉선 지혜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