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정약용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 세력에 의해 18년 동안의 유배길에 오른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만약 정약용의 유배가 없었다면, 그의 방대한 저서는 집필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조의 막강한 후원으로 인해 정약용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했고, 당대의 현실에 입각한 다양한 제도를 제안하기도 했었다. 정치적 업적은 정조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의 학문적 성과는 정조 사후 유배지에서 이뤄진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정약용을 일컬어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라는 찬사를 받게하였던 것이다.
지방 수령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목민심서>는 지방행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고 있다. 이 책의 역주자는 <목민심서>가 ‘백성을 구하기 위한 긴급 처방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제목에 보이는 ‘목민(牧民)’이란 표현은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그것을 ‘치민(治民)’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저술한 정약용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방대한 분량의 원문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른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반드시 보고 참고해야할 책이라 하겠다.
역주본의 6권은 <목민심서>의 가장 뒷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진황(賑荒)’이라 하는데, 6권에는 <목민심서>의 ‘제11부 진황 6조’가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조문을 살펴보면 ‘구휼 물자 준비’(1조)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권함’(2조)을 우선적으로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세부계획’(3조)을 세우고, 정책의 ‘시행방법’(4조)을 면밀히 살필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생을 보충하는 방법’(5조)과 정책의 ‘마무리’(6조)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진휼 과정에 대해서 세세하게 적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12조의 ‘해관 6조’는 임지에서 관직를 그만두고 돌아갈 때의 마음가짐과 방법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해관(解官)’이란 관직에서 풀려나는 것이니, 임용될 때만이 아니라 그만 둘 때도 지켜야할 규정이 있다고 본 것이다. 새로 임명된 수령과의 ‘교체’(1조)는 물론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의 행장’(2조)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때로는 지방관의 ‘유임을 청원함’(3조)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으며, 지방민들을 위하다가 잘못된 결과가 나왔을 때 ‘수령을 용서해달라는 청원’(4조)의 방법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수령 재임 중 사망’(5조)에 해당하는 경우의 절차와 수령에 대한 ‘사모하는 뜻을 남김’(6조)이라는 내용까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목민심서>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각각의 항목과 조목의 내용을 통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책이 전라도 강진에서 저술되어 일제 강점기에 출간되었기에, 아마도 조선시대 관리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 조선시대 지방관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약용의 시각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의 관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무원들의 비위가 뉴스에 등장하는 현대에, 정약용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롭게 <목민심서>가 읽혀야 할 필요가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