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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캐나다 캘거리 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 교수인 Brent Davis가 2004년도에 저술한 『Inventions of Teaching : A Genealogy』를 완역한 것이다. 당시 Davis는 앨버타 대학교에 있었다. Davis는 이 책 외에도 현재 캘거리 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인 Dennis Sumara와 함께 『Complexity and Education』(2006)을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복잡성 교육을 선도적으로 제안하고 개발하여 전문적으로 다루는 온라인 국제 학회지인 『Complicity: An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lexity and Education』(http://ejournals.library.ualberta.ca/index.php/complicity)을 창설하여 지금까지 복잡성 교육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복잡성 교육에 관한 실천과 연구를 이끌어온 권위자 중 하나이다.
내가 Davis의 주저서인 『Inventions of Teaching』을 번역하게 된 원인遠因은 ‘탈근대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이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로부터 온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 본격적으로 탈근대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한 1990년대와 그 이후 21세기 초엽에 우리 교육은 여전히 근대성에 발목이 잡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근대성이라는 유령은 정부의 정책으로는 1995년 이른바 5.31 교육개혁이라는 신자유주의 형태로 화려하게 변신하여 지금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교사 운동은 산업 노조주의Industrial Unionism의 관행을 고수하려는 입장과 이에서 벗어나 전문직 노조주의Professional Unionism, 나아가 Bob Peterson(Rethinking School 1997)이 제시한 사회정의 조합주의Social Justice Unionism와 같은 방식을 시도하고자 하는 입장과 흐름이 서로 갈등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현실감의 부족, 극단적인 비타협, 유연하고 창조적인 의제 설정 및 도전의 부재 등으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글로발라이제이션과 함께 진행된 탈근대사회에서 OECD의 PISA 담론이나 이른바 3대 핵심역량 담론 등이 국가나 교육청의 교육정책보다 더 집요하게 실제 교육 현장을 구석구석 지배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IMF와 그 이후 전개된 주주자본주의의 전반적 실현은 사회양극화를 가져왔고 이는 경쟁과 차별화를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과 상승작용하면서 입시위주의 경쟁 교육을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파시즘적 상황까지 몰고 갔다.
이러한 와중에 자기주도학습 담론, 기초학력담론, 핵심역량․핵심성취 담론 등은 근대성 담론의 형태로 마치 새로운 개혁 담론인 것처럼 학교 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경쟁, 시험, 통제 등 근대성 강박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하나인 표준화 검사standardized test는 수많은 부작용과 비판으로 이른바 일제고사 파동을 불러왔음에도 진행 중이고,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 실현의 핵심적 방식인 목록화․세분화․수치화를 통한 통제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학교 평가를 비롯한 다양한 평가가 학교 현장을 숨 가쁘게 만들고 있다.
한편 학교 현장에서는 이러한 근대성 강박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생성적 실천,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와 같은 생명력이 마치 새순이 돋는 것과 같이 약동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분명히 근대성은 균열되고 있었다. 물론 근대성과 탈근대성은 이분법적이 아닌 착종된 상태로 진행된다.
과거, 적어도 1980년대까지 학교의 거의 모든 일은 국가, 교육청, 학교 관리자에서 교사로 이어지는 폐쇄적인 관료주의적 위계질서와 그 속의 학교에 의해 결정되었다. 1990년대에 등장한 학교 붕괴 또는 교실 붕괴라고 하는 현상은 다름 아닌 이러한 질서의 교란이고 균열이었던 것이다. 질서의 교란과 균열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바람직한 형태건 왜곡된 형태건 학교가 제도 또는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 면에서 외부를 향해 열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학교운영위원회가 구성되고, 학교의 운영이나 재정면에서 지자체 및 지역사회, 학부모의 선택과 주장이 이전과는 다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래의 소비자, 미래의 주권자, 미래의 생활인으로 현재가 끊임없이 유보되어야 했던 학생들은 삶 자체가 자본주의적 상품 시장에 포섭되면서 현재의 소비자, 현재의 생활인, 현재의 인격인이 되기 시작했다. 두발, 복장 규제나 체벌 등을 포함하는 학교 교칙이나 학생 인권 조례를 놓고 학교가 갈등하기 시작했다. 알바를 하는 학생들의 노동권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는 언제부턴가 학교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곳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하고 듣고 터득한 것을 수업시간에 질문하거나, 이미 재미없고 공허하게 된 수업시간을 알게 모르게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생의 삶과 분리된 문서화된 국가 교육과정과 칸막이식 교과 체제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학교는 체험 학습이나 수행 평가, 블록 수업, 프로젝트 수업, 팀티칭, 수업공개, 탈북자와 다문화 가정의 자녀 등 소수자 관련 교육과정 운영, 7차 교육과정 및 교육과정의 재구성, 교사 평가, 자율학교제도나 교장공모제의 도입, 융합 과학이나 최근의 융복합 교육과정의 검토 등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와 같은 현상들이 다름 아닌 학교의 탈근대적 변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학력고사에서 수능, 수능에서 스펙, 스펙에서 삶의 창조성을 알아보고자 하는 스토리로 입학 전형의 중심축을 변화 시키고자 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과 21세기의 첫 10년을 전후한 우리 교육의 상황은 이와 같았다. 물론 이러한 현상들은 학교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에 따라 때로는 사회적으로 때로는 학교 안에서 엄청난 갈등을 유발하며 진행되기도 한다. 탈근대 대한민국의 21세기에 대한 교육희망은 여전히 산고를 겪고 있는 중이다.
나는 교사로서, 학교 현장에서 이러한 현상들을 접하고 실천적으로 맞서는 한편, 2004년 대통령자문교육혁신위원회 전문위원, 2005년 (사)한국교육연구소 소장, 2006년 「새로운 학교 연구 모임」 활동, 2007년 참교육연구소 교육담론실장, 2009년 핀란드 등 북유럽 학교탐방, 2010년 서울시교육청 학교혁신추진자문단 연수분과 전문위원 활동, 2011년부터 시민교육철학 연구회 활동 등을 통해 몇몇 뜻을 같이하는 교사들과 함께 복잡성 교육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육 담론에 대한 모색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한 모색의 일환으로 최근까지 탈근대 철학 및 사회학 그리고 이와 관련된 교육학에 대해 천착했다. 이러한 공부는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손, 들뢰즈,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한편 네그리와 하트, 듀이와 비고츠키, 마뚜라나와 바렐라 그리고 결국에는 복잡성 과학에서 복잡성 교육 및 생태주의 교육으로 이어져 갔다. 이 책을 번역, 출간하게 된 것도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우리의 교육 현실 및 그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활동의 결과 중 하나인 것이다.
이상 나와 내가 접한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역자로서 Davis의 이 책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Davis는 수많은 교육 철학 입장 중에서 자신은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의 입장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입장에서 교육 철학이 계보학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매우 명쾌하고 간명하면서도 깊은 수준으로 논하고 있다. 분명히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한편, 수많은 입장들의 뿌리 및 갈래 즉 연관성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요체이며 강점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많은 모순된 사고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주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근대성, 즉 형이상학적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이다. 이것이야 말로 지금까지 학교를 지탱하고 있는 철학적 인식론적 기둥인 것이다. Davis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성주의 담론을 넘어선 간객관적 인식론과 복잡성 교육 및 생태주의 교육이라는 비전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원 저서에서 Davis는 간주관적 인식론인 구성주의에 대해 마뚜라나처럼 분명히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William Doll Jr.(2008)나 David Kirshner와 David Kellogg(2009) 등과 같이 삐아제나 비고츠키를 복잡성 과학 내지는 간객관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여전히 구성주의자로 보고 있다. 왜 그랬는지는 역자도 의문으로 남는다. 이러한 역자의 생각과 이 책에서 Davis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간객관적 인식론의 제창자인 마뚜라나의 입장으로 번안․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은데, 이는 다름 아닌 교육에 있어 근대성의 지양 및 간객관적 인식론으로의 변화이다.
현 정부조차도 ‘창조경제’를 부르짖고 있듯이, 21세기는 개인의 삶이나 국가, 기업 활동 등에서 ‘창조성creativity'이 화두로 떠오르는 시대이다. 각 학교 현장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창조성 교육(흔히 창의성으로 표현되거나 창의성에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이 강조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그 창조성 또는 창의성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7차교육과정이나 개정2009교육과정의 기본 원리라고 주장되는 구성주의의 한계에 머무르고 있다.
구성주의는 개인적 구성주의든 사회적 구성주의든 철학적으로 간주관성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객관성이 ‘소통과 네트워크에 의한 지식과 삶의 창조’를 말하는 것인 반면, 구성주의는 어디까지나 그 창의성이 주로 ‘학습자의 몸 안에서 구성되는 아이디어 등’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인식론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서방 세계의 교육과정 원리를 지배하며 맹위를 떨친 구성주의는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7차교육과정의 기본 원리가 되었는데, 교육과정을 편성하는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인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것이 구성주의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견 긍정적 의미로 보이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학교에서 배우는 진리 내지는 지식은 이미 완벽하게 체계화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서방 세계의 철학사에서 플라톤주의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또는 흄이나 베이컨의 경험주의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즉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지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the World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상정한 저 세상out of the World에 있다고 본다. 공부라는 것은 저 세상에 있는 완벽한 지식으로부터 엄밀한 논리적 과정을 거쳐 연역된 체계화된 지식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생각한 합리주의이고 그러한 지식에 딱 들어맞는 것이 수학 과목이고, 그래서 학교에서 여전히 수학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밀한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도 도저히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명제들이 집합론 등 수학에서 발견되면서 합리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경험주의 입장에서 보면 저 세상에 있는 완벽한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같은 경험을 반복하여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교과에서 강조되어온 과학적 실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수많은 변인은 통제 되어야 하고 그럴수록 학교 공부는 실제 삶과는 동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 세상out of the World’을 제거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완벽한 저 세상의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저 세상이 제거된 구성주의 학습이론의 인식론 모형을 나타낸 그림과 같이 이 세상에는 주체로서 학습하는 인간이 있고, 인간 밖에 인간이 배워야 할 지식의 근원으로 객관적인 세상이 있다. 학습이라는 것은 객관the Object을 주체the Subject가 구성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급진적 구성주의이고, 사회적으로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사회적 구성주의이다. 삐아제 등 걸출한 교육학 이론가 들이 이러한 구성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적으로 구성되었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건 주체 안에 구성된 그것이 제대로 구성된 지식인지 누가 판단하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은 판단하는 인식론적인 권력자가 필요한 것이고, 권력자에 의해 창조성은 왜곡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주체 밖에 ‘객관’을 상정하는 이상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는 필연적인 것이다. 마뚜라나 등은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 ‘간객관적 인식론’을 제기한다.
마뚜라나는 아래 그림과 같은 모형을 제시한다. 우선 존재론적으로 주체the Subject도 객관the Objective, 객체the Object도 객관the Objective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객관은 구성주의에서 말하는 객관과는 다르다. 마뚜라나는 구성주의의 객관과 구별하기 위해 ‘괄호친 객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두 객관은 구조적으로 접속structural coupling되어 있다. 주체는 삶을 통해 다양한 여러 객관들과 접속하고 소통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변하지만 그를 둘러싼 다른 객관들도 변하고 진화한다. 여기서 주체가 변하고 학습하고 진화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structurally determined system. 즉 학습자는 구조화되는 구조화된 구조structuring structured structure이다. 학습을 통해 주체도 변하고 객체도 변하며, 우주 전체가 변한다. 학습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객관과 객관의 관계이다. 그래서 간객관적이다interobjectivity. 학습은 이제 삶이 된다. 학습은 단순히 학습자의 뇌나 신체에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되고 삶이 된다(Learning is Doing is Being).
이러한 간객관적 사고로의 인식론적 변화에는 두 개의 큰 흐름이 있다. Davis는 이를 복잡성 사고complexity thinking와 생태주의ecology로 보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물리학과 생물학의 일부 연구에서 시작된 복잡성 사고의 역사는 인공두뇌학, 정보 과학, 체계 이론system theory, 인공지능, 지각변동 이론, 심리학에서의 결합설, 프랙탈 기하학, 비선형 동역학 등으로 이루어져 왔다. 최근에는 소련의 붕괴, 주식 시장의 경향, 지구에서 생명의 탄생, 눈의 진화, 마음의 창발 등, 그리고 세포, 기관, 개인, 사회 집단, 문화, 사회, 종, 생물권 등 포개진nested 조직인 살아있는 적응체제adaptive system들에 대한 연구 등으로 발전되어왔다.
복잡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complexivist은 그러한 적응하고 자기조직화하는 현상을 학습하는 체제learning system로 본다. 즉 학습이란 지속되는 회귀적인 적응 노력으로 역동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체제의 응집력(일관성, 통일성, 생명coherences)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다. 새들의 무리, 생각의 확산, 문화운동의 전개 등 스스로 유지되는 현상self-maintaining phenomena들은 그 부분들을 초월transcend한다. 그들은 개별 인자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집단적 가능성을 나타낸다. 자기 조직적이고 자기스스로 유지되는 체제는 목표나 계획이나 지도자 없이 만들어지고 진화한다.
또 하나의 흐름인 생태주의 담론은 윤리적 노우하우를 추구한다. 생태주의는 복잡성complexity을 넘어 연관성complicity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생태계에서 인간의 역할, 유전공학에서 의지의 문제, 의식에서 생물학적 진화의 문제, 지구 행성에 충격을 주는 기술의 등장 등에 따른 것이다. 특히 교육에서 윤리적 행위는, 펼쳐지는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생물권적 공간에서 마음충만하게 참여하는 태도an attitude of mindful participation이다. Sylvia Ashton-Warner가 말한 대화conversing나, Nel Noddings가 말한 배려caring의 윤리, Max van Manen's의 교육학적 심사숙고, Chet Bowers의 생태 정의eco-justice, 해석학적 듣기hermeneutic listening 등이 생태주의 담론과 관련된 교수teaching의 개념이다.
간객관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복잡성 사고에 의한 수업을 실제 교실 수업에서 구현하고자 할 때, 요체는 학습 집단에서 어떤 지향점을 향하면서 지식을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 지성의 발현을 실제 수업에서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제 학습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라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업의 원리는 어떠해야 하는지 알아보자(Davis, Sumara, Sullivan 등).
인간의 삶이 예측 불가능하고 수많은 변인이 작용하듯이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최근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비고츠키나, 복잡성 사고 이론, 적시 학습이론, 집단지성이론에서 제기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때의 지식은 학습자와 분리된 외부에서 만들어진 체계화된 지식이 아닌 학습자의 삶과 결합된 지식이다. 선형적이고 논리적이며 결과가 예측 가능하게 전개되는 기존의 학습이론과는 달리 이러한 학습이론에서는
□ 예측 가능한 학습 목표를 상정하지 않는다. 다만 지향점이 있을 뿐이다.
□ 아울러 학생들은 고정 불변의 지식을 내면화하기 보다는 각자의 삶에 기반한 각자의 지식을 창조해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창조성이다.
□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각자의 지식은 존중되고 소통과 네트워크를 통해 집단 지성으로 발전하면서 또 다른 지식을 만들어간다.
□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전개되며 동일한 일은 반복되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해서 학습 과정이 제멋대로이거나 통제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과정 그 자체를 통해서 통제가 되는데 이른바 탈중심화된 통제decentralized control이다.
복잡성 교육에서 수업은 교사가 미리 작성된 교육과정의 주제를 통해 학생들을 집단적 인지 단위로 만들어 복잡성이 창발되도록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다양성diversity, 중복성redundancy, 작동시키는 통제liberating constraints, 탈중심화된 통제decentralized control 등이다.
□ 다양성 : 개별 학습자의 가능성을 능가하는 복잡한 상호 작용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느 수준의 다양성diversity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다양한 변이는 혁신적인 반응의 원천이 된다. 예를 들어 엄청난 양의 표현되지 않은 DNA의 양( DNA 염기서열 중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아미노산으로 번역되는 엑손Exon은 5%도 안되고, 나머지 95% 이상은 유전정보가 없는 인트론Intron 등이다), 공동체가 성립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직업 능력들, 지구의 생물학적 다양성 등이다. 복잡성 체계가 어려움에 부딪히면 이러한 다양성을 통해 적절한 해결책이 모색된다.
□ 중복성 : 그러한 다양성은 그 시스템 내의 다른 인자들에 의해 이해․인식․감지될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 이는 두 번째의 중요한 조건, 중복성redundancy을 가리킨다. 결합된 행위 즉 구조 접속이 일어나려면, 인자들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충분한 공통된 기반을 가져야 한다. 일부 인자들이 제 기능을 못하더라도 다른 인자들이 역할을 하여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려면 인자들이 서로 달라야하기 보다는 같은 점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학급에서 다양성이 만들어진다 해도 적당한 중복성 또한 갖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세계 정치에 대한 생산적 토론이나 분수 개념에 대한 탐구 등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슈에 대한 어떤 친숙함이나 공통된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배경 또는 그러한 배경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회의 준비가 교육적 의사 결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범주이다.
□ 작동시키는 통제 : 그러한 중복성으로부터 나오고 적절한 다양성들이 분출되도록 하는 수업을 개발하는 것이야 말로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분수의 덧셈에서 조각들이나 종이를 자르고, 접고, 맞추는 작업을 통해 공통된 경험의 기반을 마련하고, 학습자의 관심과 이해에 맞는 행위들을 하도록 하는 공통된 어휘의 기반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통제의 부과, 정확히는 작동시키는 통제liberating constraints를 수반한다. 이는 어떤 학습 집단에서도 나타나는 경험과 능력과 흥미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한 충분한 개방성을 허용하면서 학생들이 행동하게끔 충분한 조직을 제공하도록 하는 행위의 지침이며 제한이다. 작동시키는 통제는 과도하게 미리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창발되는 복잡 현상의 결과는 완전히 예측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작동시키는 통제는 아무렇게나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든 제한을 없애 버리면 복잡성은 창발되지 않는다.
□ 탈중심화된 통제 : 최소한 부분적으로, 행위가 창발되어야 하는데 즉 행위는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여기서 나오는 것이, 복잡성이 창발하기 위한 네 번째 조건인 탈중심화된 통제decentralized control이다. 수업 장면에서 발생하는 이해와 해석은 미리 완전히 기술될 수 없다. 즉 어는 정도까지 학습은 미리 결정된 학습 목표나 선형적 학습 계획 또는 경직된 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공유된 과제를 통해 창발되고 유지된다. 복잡성은 예측할 수 없다. 탈중심화된 통제의 조건이 교사 중심의 수업에 대한 비난이나 학생 중심의 수업에 대한 지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탈중심화된 통제는 양자에 대한 비판 즉 학습이 개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복잡성 과학이 주장하듯이 학습 능력은 복잡계의 특질이다. 그렇다면 수업이라는 복잡계의 성질은 지식을 만들고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점이 학생이나 교사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의 집단적 가능성에 맞춰져야 한다.
Senge(2000)는 근대 학교가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 즉 학교 근대성의 전제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1. 학생은 뭔가 부족한 존재이고 교사는 그 부족함을 바로 잡는다.
2. 학습은 몸 전체가 아니라 머리에서 이루어진다.
3. 모든 사람은 당연히 같은 방식으로 배워야 한다.
4. 학습은 학교 밖 세상이 아닌 교실에서 이루어진다.
5. 학생들은 똑똑한 아이와 바보 같은 아이로 나누어진다.
나아가 이러한 전제가 가능했기에 학교가 다음과 같은 원리와 내용으로 운영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1. 전문가에 의한 학교 통제
2. 분할 가능한 지식
3.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진리라는 확신
4.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습 및 학습을 증진시키기 위한 경쟁
원 저자인 Davis와 역자인 내가 저술과 번역이라는 방식으로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에 공감을 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근대성의 강박 내지는 허구성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