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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일
또 4월이다. 잔인하다는 것은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가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구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로 악명높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나도 바로 생각나는 것이 2003년 4월에 생을 마감한 큰형이고 현재는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이다. 7시30분 식사를 마치고 학교에 가는 아들과 영어를 배우러 동사무소에 오르는 아내가 아무 소리도 없이 동시에 나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인터폰으로 다시 보았다. 현재의 내 심정을 하소연 할 길이 없고 또한 혼자라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체육관으로 나갔고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한 후에는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와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은 나를 알아보시어 행복의 시간으로 이어갔지만 생의 끝지점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녁에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10시에 평소처럼 들어온 4월의 첫 날, 내일도 긍정의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2일 지난달에는 목요일만 되면 비가 오더니 오늘은 화창한 날씨로 변하여 있고 아침에 엊그제 사 온 고슴도치의 꿈이란 책을 읽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엄청난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주인공의 삶이 감동적이었는데 보통의 삶보다는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누구나 인생의 깊이와 의미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0시경 광화문 한글회관에 아내를 내려주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친 후에 다시 아내를 만나 대우회관 중국식당에서 삼선자장과 잡채밥을 먹었다. 아내의 수업이 오후에 있어 함께 요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와 1시간을 보낸 후에 내부순환도로를 거쳐 집에 돌아왔다. 차를 아파트에 두고 등산화와 등산복을 사려고 오랜만에 종로 5가에 나갔는데 물가가 많이 올라 등산품의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찬바람만 매섭게 부는 등산점 골목을 나와 신설동에서 따뜻한 칼국수를 먹고 집에 왔더니 아침 한글회관 수업부터 저녁 논술강의까지 피곤한 모습의 아내가 앉아 있고 12시에는 학원에서 아들이 돌아왔다.
3일 아침 7시30분까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풀이 죽은 아내를 생각하니 수업도 그렇지만 평소에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나 때문에 그런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아침식사를 하고 11시가 되어 아내와 안산에 올랐더니 구청에서 새로운 생태공원을 중턱에 만들어 놓아 신선했고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봄꽃들이 활짝 피어 작은 무릉도원이 만들어져 있다. 특히 가까이서 본 매화는 그 색깔이 아름답고 향기 또한 근심을 잊기에 충분하여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알만도 했다. 정상을 거쳐 내려오면서 아파트 주변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었는데 원가에 비하여 양푼보리밥이 기본 2인분 1만2천원으로 비싼 가격이다. 오늘 은행에서 대출금 3천만 원이 입금되어 형에게 투자금 전체를 미리 송금하고 오후에는 세일기간이라서 신세계 백화점으로 카메라도 고치고 등산화도 사러 아내와 나갔다가 결국 아들과 딸에게 줄 빵만 사 가지고 돌아온 저녁이다.
4일 토요일이기는 하지만 아들은 학교에 가고 딸은 친구들 하고 잠실 롯데월드에 간다고 준비를 한다. 딸이 벌써 자라서 지하철로 외출을 하다니 물가에 내 놓는 심정이었지만 조심히 다니고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일렀다. 오전에 아내와 안산을 올랐다가 내려와 점심을 하고 해답도 없는 특례입학 문제를 정리하면서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오후에 차를 몰고 어머니한테 갔더니 오늘도 장루의 캡이 빠져 간병인들이 고생을 하고 있어 대책없이 멍하니 서 있기만 한 미안한 시간이었다. 저녁식사 하시는 것을 보고 수업을 하러 이동하면서 근처에 있는 sLs학원에 들어가니 중등부 수강생이 약 30여명 된다고 2천만 원에 매입하라는 의견을 원장이 제시한다. 양심껏 이야기를 하여 고마웠지만 금전적인 부분도 어렵고 어머니의 상태까지 현재가 불안정하여 다음으로 미루었다. 친구 동선이 전화가 와서 생태탕에 저녁을 먹었고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여 걱정을 많이 하기에 힘을 내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라고 일렀다. 부산에서 배 사업은 잘 되어 간다는 영식이 전화가 왔고 동선이와 광화문에서 헤어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5일 일요일 아침 봄의 기운이 거실과 안방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눈을 떠 창문을 열고 안산을 바라보니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나리와 그 사이로 우뚝 솟은 큰 나뭇가지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요일이라 여행 겸 산에 가려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니 차가운 공기에 비해서는 햇살이 따뜻하다. 영식이는 도봉산에 간다고 하고 나는 회기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가까운 팔당역에 내려 680미터 예봉산에 올랐다. 높이가 북한산 대남문 정도 되지만 처음부터 경사가 심하여 힘들었고 90분 이상을 걸어서 정상에는 12시 지나서 도착했다. 발 아래로 팔당댐과 한강 상류가 손에 잡힐 듯 하지만 안개가 자욱하여 물줄기만 흐리게 보일 뿐이었다. 태극기가 있는 정상에는 사람들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고 율리봉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여 컵라면과 누룽지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율리봉에서 내려오는 하산길은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친근하고 독특한 경관이 많아 언제라도 다시 오리라 생각하며 팔당역 근처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버리고 167번 시내버스에 올라 청량리까지 이동했고 시간이 늦어 요양원은 못 가고 핸드폰 A/S만 받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에게 전화하니 오후부터 밤 9시까지 긴 시간 수업을 한다고 해서 내가 저녁식사로 꽁치찌개를 성의껏 준비하였다.
6일 숨가쁘게 초순을 지나는 월요일, 밤새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에 TV만 보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마음을 잡고 4월을 살어름 건너 듯 살아가야 할텐데 불안하고 막막한 기분이 날마다 밀려온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있으니 밥도 먹지 않은 아들이 오늘도 인사는 고사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학교에 간다. 어느 순간 아들에게 불편하고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나는 통탄하고 싶은 심정으로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일어났다.이발을 하러 밖으로 나왔더니 기온이 15도를 넘어 봄날씨로 변해 있고 아파트 화단에 화사하게 핀 하얀 목련이 소외된 나를 편안한 마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머리 손질을 하고 체육관으로 가서 오늘은 기구운동만 하고 집에 돌아오니 영어를 배우는 동료들과 약속이 있다고 아내는 외출을 한다. 혼자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요양원에 갔더니 어제도 어머니의 장루가 빠져 3번씩 케이스를 바꾸었다고 간병인들이 고충을 토로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대처할 어떤 방법도 없어 쩔쩔매기만 하다가 6시에 요양원을 나와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멸치젓을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7일 어제 저녁에 식사를 잘 했는데 새벽에 두 번씩이나 화장실에 갔다. 곰삭은 젓갈이 소화를 잘 시킨 것인지 아니면 식중독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토막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은 당연 정신이 멍하고 식사를 하는 중에는 아들이 어제처럼 인상을 쓰고 허공만 바라보며 학교에 등교한다. 아침마다 반목과 분노가 심하여 이제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아들을 위해서도 좋고 나도 오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오전에 아내는 북한산에 간다고 하고 나는 논술교실에 올라가 특례학생 1시까지 수업을 하고 내려왔다. 경기학원에 함께 다녔던 영어선생이 내일까지만 강의를 한다기에 일품향 중국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친하게 지낸 사이라 아쉬움이 있지만 학원의 사정을 감안하면 뭐라고 말할 수도 없다. 3시가 되어 북한산 사모바위까지 다녀왔다는 아내가 기분이 좋은지 횡설수설하며 들어오고 반대로 나는 밖으로 나가 안산을 올랐다. 봄기운을 맞으며 산을 돌고 영식이와 약속으로 남영동에 나가서 살아있는 쭈꾸미와 술을 마시며 배 사업을 이야기 했고 2차로 미성회관 2층에 가서 팔보채 중국음식도 먹었다.
8일 어제 음식을 늦게까지 먹었는데도 습관이 되어 그런지 아침에 콩나물 국으로 식사를 많이 했다. 식사 후에 아내는 동사무소 영어교육으로 나가고 나는 안산으로 올라갔더니 엊그제와 다르게 꽃이 만발하여 더 아름답고 장관이다. 1시경 집에 들어오니 학교에 간 딸이 철쭉이 꽃인지 나무인지 전화를 하여 묻기에 자신있게 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점심을 먹고 논술교실에 들러 집에 두고 간 핸드폰을 아내에게 전달하고 요양원으로 가다가 중랑교 코너에서 안전띠 미착용으로 과태료 용지를 받았다. 숨어서 불시에 단속하여 꼼짝없이 걸려들었는데 어제 술값에 이어 오늘 과태료 3만원까지 기분도 좋지 않지만 지출도 생겼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벚꽃이 하늘을 가릴 만큼 피었고 젊은 간호사는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꽃구경을 시킨다고 하는데 고마웠고 어쩌면 이승에서 마지막 어머니의 외출이 될 것 같아서 나로서는 여러 장면의 사진을 찍어 두었다. 휠체어에 앉아 30여분을 계시는데도 몸을 가누지 못해 시종일관 목을 감싸며 이동을 하였고 빨리 들어가 눕고만 싶다는 어머니를 가까스로 병실에 모셔드리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9일 잠을 잘 못 잤는지 목이 뻐근하다. 오늘은 낮 기온이 서울 23도까지 오른다니 4월 초순으로는 고온현상이고 바로 여름이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침에 식사도 거르고 빤히 쳐다만 보면서 학교에 가는 아들과 그런 아들에 대응도 못하는 부모라는 사람들, 분명히 미래가 없는 불투명한 가족이다. 식사 후에 아내를 한글회관에 내려주고 운동을 마치고 다시 나가서 태우고 돌아와 식당에서 갈비탕과 냉면을 각각 사 먹었다. 땀까지 흘리며 점심을 맛있게 먹고 스위스 그랜드호텔 입구에서 열리는 세일시장에 들어가 나의 양복 등산복 등산화 그리고 아내의 등산복과 바지 등을 구입했다. 50만원 정도의 비용을 카드로 지불하고 모자와 장갑을 덤으로 받았더니 아내는 흡족한지 싱글벙글 좋아한다. 오늘처럼 외식도 하고 옷도 사며 긴 시간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살면서 흔하지는 않았다. 옷 수선을 맡기고 세피아 브레이크를 교환하는 중에 어머니의 체온이 38도를 넘었다고 다급하게 여동생 전화가 와서 초조한 시간으로 변해간 저녁이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밤 12시 아들이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는 바람에 잠을 깼는데 목이 따가워 소금물로 소독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10일 아침이 오면서 이미 감기가 접근하여 몸이 무거운 상태다. 식사를 마치고 수업이 늦게 있다는 아내를 태우고 요양원에 가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니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휠체어에 모시고 복도를 다니면서 이야기를 하고 노래도 불러 드렸지만 지난 주와 달리 오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아내의 수업으로 바로 집으로 왔다가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점심을 한 후에는 학원에 나가 장원장과 미팅을 했다. 고등부 수강료에 대하여 언급을 했더니 다음 주로 미루어 난감했고 학원의 현실을 모르는 선생들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당연 불만이 많아 앞으로는 나를 거치지 않고 개별적으로 장원장과 직접 만나서 강사료를 지급받기로 했다. 밤 10시에 밖으로 나왔더니 나이가 많은 수학과 최선생이 수고했다고 칵테일을 사 주어 고맙게 마시고 돌아왔다.
11일 감기에 걸려 밤새 기침을 하는 딸이 늦게까지 잠을 자고 나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주말 아침이다. 일찍 도서관에 가는 아들을 보고 집에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아내는 말을 하는데 어디서든 공부를 안 한다는 소리로 들려 한심스럽기만 했다. 사실 선생님이나 부모의 면전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꺼리는 중학생들은 자율학습이 어렵기 때문에 집에서 관리나 규제가 더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 친구 동선이와 관악산에서 보기로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사당역으로 방향을 잡아 지하철로 이동하니 산행하는 사람들로 시장을 이루었다. 친구가 안양에 살아 정상에서 만나기로 하고 올랐는데 나중에 삼막사 근처로 장소를 변경하여 힘들어서 더 가지를 못했다. 12시30분 정상에 올라 가져간 컵라면을 먹고 연주대를 둘러보니 명칭대로 주군을 그리워하는 고려 충신의 설화가 남아 있다. 서울과 경기 남부를 조망하고 오후 4시에 다시 사당역으로 내려온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지하철로 경기학원에 갔다가 어제 두고 온 차를 몰고 요양원으로 가서 어머니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12일 어제 관악산 등반을 무리하게 했더니 피곤하여 오후에 안산이나 산책할까 싶었는데 동료와 선약이 있어 무거운 눈꺼풀을 붙들고 집을 나섰다. 10시에 회기역 도착하여 팔당역에서 지난 주에 왔던 예봉산 건너편에 위치한 예빈산에 올랐더니 여기도 경사가 급하고 능선을 놓여 있어 12시30분 정상에 도착했다. 예빈산은 귀빈을 예우한다는 뜻으로 예봉산과 나란히 서 있는 진달래와 소나무까지 어우러져 귀족스러움을 뽐내는 산의 형세이다. 네모난 공터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멀리 팔당댐 근처를 바라보니 한강 상류의 물줄기가 흰 비단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예봉산 방향 율리고개 쪽으로 부지런히 내려와 팔당역 근처에 다다르니 5시가 되었다. 여기는 과거에 강의를 하면서 선생들과 회식을 하러 여러 번 온 곳인데 현재는 고가도로가 생겨 번화했던 음식거리가 먼지만 가득하다. 시내버스를 타고 제기동을 거쳐 바로 집에 왔고 10시에 수업을 마친 아내도 지친 모습으로 들어왔다.
13일 월요일 아침 남쪽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나오고 서울도 흐리고 어둡다. 어제부터 어머니께서는 식사를 안 하시고 장루로 나와야 할 대변이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아름다운 봄의 정취와는 대조적으로 불안한 하루를 보낸다.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설악산 2박 3일 수학여행을 간다는 아들은 이틀이나 떠나는 오늘도 다녀온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거실을 도망치듯 나간다. 식사 후 서류를 정리하다가 11시에 운동을 하러 갔는데 건강하고 편안한 사람보다 나같은 답답한 사람이 체육관에 더 많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오늘 어머니 삼육의료원 외과과장 미팅이 내일로 연기되었다는 형수의 전화가 와서 집으로 들어가 아침에 아들이 먹고 남은 김밥으로 점심을 했다. 오후 3시에 요양원에 들어서니 젊은 간병인이 임종을 준비해야 될 것 같다고 하여 덜컥 놀랐고 복도끝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마음으로 이별의 인사를 올렸다. 오늘 열은 없고 체온은 정상이지만 엊그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약해져 대답도 못하시는 어머니가 되었다. 학원에 6시에 도착하여 수업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영식이 전화가 와서 무교동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14일 새벽 1시에 자고 3시경 일어났다. 어제 늦게 먹은 청진옥 설렁탕이 문제가 있었는지 속이 좋지가 않고 어머니 때문에도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다. 아침에 아내는 민정이 엄마를 만나 불광동에서 영화보고 쇼핑한다고 나름대로 스카프로 멋을 부리고 나가고 궁싯거리던 나도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지하철로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오늘은 아침과 점심은 잘 드셨다고 하고 위생병원 외과에 예약이 되어 있어 휠체어에 모시고 검사를 하러 가는 중에 형수님과 여동생이 도착하여 함께 이동했다. 외과 면담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통보를 하는데 거동도 못하고 임종이 왔다는 사람한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설명이다. 저녁식사 시간에 형과 조카 현주도 유자원에 와서 가족이 모였고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하셨는지 식사를 하시는 중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려 어쩔 줄을 몰랐다.
15일 수요일 아침 비가 내린다. 모처럼 내리는 비일지라도 마음은 복잡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6년 전 오늘 4월 15일 갑자기 자신의 아들 치오와 딸인 조카들을 잘 부탁한다는 큰형의 당부가 있어 놀라서 도곡동 형의 사무실로 달려간 일이 있다. 사업이 어려워 금전적인 도움을 이야기 한 줄 알았는데 결국 형은 세상을 떠났고 비장했던 그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다. 오전에 영어를 배우고 동료들과 산으로 간 아내는 다행히 비가 거세지기 전에 내려왔고 나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중에도 식사를 못 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 후에 서둘러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고 미음을 억지로 입에 넣어 드렸더니 힘이 없어 그대로 밖으로 흘려 보낸다. 늦은 오후에 요양원을 나서 학원강의를 마치고 10시에 집에 들어서자 미국 시카코에 산다는 중학교 친구의 전화가 와서 통화를 했다. 10년 전에 한국을 떠나 현재는 선교사가 되었다며 언제든 미국으로 오라는 현재의 내 사정이나 입장을 전혀 모르고 이야기를 한다.
16일 새벽 4시에 깨어 잠이 오지 않아 아침까지 그대로 시간을 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조만간 생길지 모르는 어머니의 운명, 생생하게 기억되는 떠나간 형과의 약속 등으로 머리가 무겁고 식사조차 탐탁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다. 방으로 들어가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꿈을 꾸었는데 어머님이 여동생과 현관에 들어서며 고통을 호소하여 붙들면서 꿈을 깼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오셨는지 불길함만 생긴다. 오전에 수업을 논술교실에서 하고 12시30분에 거실에 들어서니 컴퓨터를 하던 아들은 당황했는지 황급히 일어났고 그러더니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청소하는 시늉을 하여 어안이 벙벙했다. 점심을 먹고 체육관에 가려다가 시간이 어중간하여 아파트 옆에 위치한 연세의원에 들어가 혈액검사를 실시했다. 평소에 병원을 싫어하는 내가 50대가 되었고 또한 꾸준하게 운동을 하여 자신감도 있어 심장박동까지 점검하는 건강검진을 한 것이다. 오후에 수업을 하러 학원으로 갔다가 쉬는 시간에 여동생을 통하여 어머니하고 통화를 시도했는데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학원을 나서 노량진 한샘학원 문준 부원장 부친상이라 흑석동 중앙대 병원에 가서 조문하고 용산으로 나와 영식이를 만났다.
17일 낮이나 밤이나 컴퓨터만 하는 아들 때문에 어제 거실에 있는 컴퓨터를 안방으로 옮겼더니 아침에 그 자리가 지저분하고 휑하다. 오늘도 아들에 대한 반감으로 아침식사도 안하고 누워만 있었고 아내도 남편이나 아들이나 탐탐하지 않은지 말없이 집을 나간다. 11시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점심을 한 뒤에 혈액검사 결과를 보러 연세의원에 갔다. 운동은 꾸준히 하지만 술을 자주 마셔 걱정이 되었는데 간 심장 전립선에 문제가 없고 호르몬이나 콜레스트롤 함유량도 정상이라고 한다. 걸어서 체육관에 갔다가 지하철로 요양원에 갔더니 생과 사의 갈림길에 다다른 어머니께서는 4월을 넘어서기 힘들어 보였다. 3월부터 초등학교 동창들이 고향모임을 한다고 연락이 와서 거절을 했는데 번갈아 가면서 여러 명이 요청을 하여 어쩔 수 없이 다녀오기로 했다.
18일 초등학교 동창생들 37년 만의 모임으로 기대감도 있지만 꼭 오늘이나 내일 운명하실 것 같은 어머니의 상황으로 걱정이 더 앞선다. 아침식사 후에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12시에 어머니를 뵈었더니 역시 식사도 못 하시고 의식도 없는 상태로 잠만 주무시고 계신다. 마침 들어온 형한테 고향에 갔다가 내일 오겠으니 위독하시면 연락하라고 당부를 하고 운전하여 안양으로 가서 영복이와 동선이를 태우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모임 장소인 전북에 들어섰다. 친구들 20여명이 서울에서 온 나를 기다리고 있고 간장게장과 갑오징어 복분자술 등 성대하게 자리를 마련하여 반가움으로 맞이한다. 밥과 국은 고향에서 농사를 직접 지은 것이라 맛도 특별하여 시간이 가는 줄 몰랐지만 어머니의 위중함으로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19일 바닷가로 나와 새벽을 보내다가 일정이 바쁘다는 친구 일부를 보내고 남은 사람들끼리 어제 먹던 맛있는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회칙도 정하고 옛날도 이야기하며 오전을 보내고 부안을 나오면서 읍내 근처에서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식사 후에 친구들과 헤어져 고향의 산소로 이동했고 이 4월이 가기 전에 어머니의 관을 들고 다시 와야 할 곳이라는 생각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을로 내려와 아무도 없는 텅빈 집에 들어갔는데 역시나 마음 둘 곳이 없어 바로 나왔고 대문 앞을 나서면서는 이웃집 형을 만났다. 어릴 때부터 다정한 용완이 형인데 오늘도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여기고 힘을 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준다. 서울로 가는 길에 청주에 들렀다가 시동도 끄지 않은 채 장인 장모님께 인사만 하고 서둘러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차량 정체가 극심한 일요일 오후 조마조마 하면서 이천을 지나는 중에 어머니 위독하다는 형의 전화가 왔고 달리지 못하는 차 속에서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냈다. 가까스로 저녁 7시에 요양원에 도착하여 차를 버리듯 하고 달려 들어가니 한 고비를 넘겼다며 주무시고 계시고 체온과 맥박은 변함이 없다.
20일 어제는 덥더니 오늘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전라도 격포까지 먼 여행을 했지만 촌각을 다투는 어머니 때문에 오히려 몸과 마음만 지쳐서 돌아왔다. 생명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행여나 오늘이 어머니의 장례일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심난한 마음으로 오전에 아내와 요양원에 도착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식사는 물론 물도 못 드시고 의식없이 계시어 보는 것조차 처량하기만 했다. 얼굴을 맞대고 어머니를 여러 번 불렀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종곤이'라고 불러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목소리인가 싶었다. 음료수 한 스푼을 간신히 입에 넣어 드렸더니 그대로 밖으로 흘려 보내 아들인 내 마음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여동생은 영양제나 수액을 놓아 기력 회복을 돕자고 이야기 하지만 잠시 연명에 불과한 미봉책에 불과할 것으로 아무튼 오후에 가족이 모여 결정하기로 하고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되었다. 점심을 조금 먹고 체력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할머니 보겠다고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 온 딸을 태우고 다시 요양원으로 향했다. 2시30분에 가족이 합의하여 수액과 영양제를 사다가 요양원 간호팀장의 도움으로 처방을 하는데 초반에 혈관을 찾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고 주사바늘 자국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는 어머니를 보살폈다. 5시에 그나마 수액이고 영양제라고 하니 어머니께서 오늘은 편안하게 주무실 것 같아 마음을 놓고 요양원을 나왔다. 안국역에 딸을 내려주고 학원으로 돌아가 강의를 마친 늦은 밤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길을 달려 집에 왔다. 마음이 극도로 혼란한 상태인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예술고 학생 시험대비를 해 주라고 아내가 선약을 해 두어 거절도 못한 짜증나고 피곤한 하루였다.
21일 불안감으로 요양원에 아내를 일찍 보내고 누워서 시간을 보내다가 거실에 나와 창문을 열어보니 안산의 꽃들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허망했다. 동창모임 그리고 어머니의 위중함으로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더니 그 사이에 사라져 버린 우리의 인생사와 다르지 않은 이치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과외수업을 하고 서둘러 요양원에 갔는데 아내와 여동생 그리고 형수까지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는 양 어머니 주변에 모여 있다. 앙상한 모습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5일째 식음을 전폐한 어머님과 거의 마지막으로 가는 수액과 영양제를 보고 있노라니 슬픔이 체념으로 변하여 간다. 10여분이 지나자 반포에 사는 조카 윤희가 불쑥 요양원에 들어와 반가움이 컷지만 임종을 앞두고 의식도 없는 할머니를 뵈러 6년 만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 원망스러움도 생겼다. 조카에게 할머니의 상태를 설명하고 지금이라도 잊지 않고 와서 고맙고 가족들은 모두 잘 있는지 안부부터 물었다. 지난 날 큰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신내동 형네와 반포의 감정으로 방금까지 옆에 있던 형수가 밖으로 나가버려 양쪽을 바라보는 나의 괴로움과 당혹감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어머니 그리고 계속되는 가족 간의 갈등 이러한 현실을 꿈에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조카와 함께 나와서 할머니 돌아가시면 연락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지하철 동대문 근처에 내려주었다. 집에 돌아와 여동생한테 전화를 하여 윤희를 외면한 신내동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가족의 우애와 화합을 위해 현명하게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22일 “떠나시는 어머님 앞에 슬픔과 비통함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모실 것이고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의 모습과 사랑을 간직하겠습니다“
어제 조카 윤희가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먼저 떠난 큰형이 마지막 어머니 가시는 길을 인도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내동 형조차 과거의 감정으로 윤희를 외면했는데 어른의 감정을 조카에게까지 전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한 운명하시는 어머니 앞에서까지 반목의 행동을 보인 것은 불행한 가족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 큰 형의 죽음으로 회사에서 나온 위로금 2억 원을 두고 남편의 죽음으로 자신의 몫이라는 반포 형수의 입장과 일부는 유족인 어머니 몫이라는 신내동 형과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에 어린 조카 4명을 두고 남편을 잃은 형수를 먼저 생각하자는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전액이 반포 형수한테로 가게 되었다. 이 일로 혈육을 나눈 형과의 사이가 소원해졌지만 어느 판단이 현명했는지는 세월이 흐르면 주변인 누구나 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20도에 비하면 10도까지 오른다는 오늘은 차가운 날씨지만 어머니의 생명을 가름할 4월이 나에게 또 잔인한 달이 될 것인가 형이 떠난 4월 28일을 목전에 두고 운명은 겹쳐서 오는 것인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침이다. 안산을 바라보니 진록색의 푸름이 평소와 다르게 걱정스럽고 을씨년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위축되는 현재의 내 심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 때문에 엊그제부터 참가 여부를 고심했던 딸이 오늘 경주로 수련회를 떠난다고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틀 전에는 딸의 생일이었지만 그것도 모르고 선물은커녕 어머니 병환으로 축하 노래도 부르지 못하였다.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 수련회 가는 딸이 3일간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애교 있는 엄포를 놓자 동생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학교에 간다.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수련회 떠나는 딸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했더니 할머니한테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당부를 하며 내려갔다. 오전에 영식이가 요양원에 온다기에 아내와 함께 도착을 하니 먼저 와 있고 의식이 없는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친구, 2007년 9월 입원할 때부터 매월 거르지 않고 왔던 사람이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의 손을 만지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더니 새벽에 일어나 여러 생각을 했다면서 어머니 작고 후 준비상황을 자신의 일처럼 설명을 한다. 2시간이나 이야기를 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진정되었고 아내의 수업으로 집에 태우고 왔다가 점심을 하고 오후에 다시 어머니한테 갔더니 이제는 의식도 완전히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바쁘게 오가는 간병인들의 정성에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했고 길지 않을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그들은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꺼져가는 어머니를 붙들고 나와 여동생은 필사적으로 입에 물을 적시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더 이상 없고 오히려 재채기나 기침소리만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오후 4시에 온 신내동 형수, 변함없이 어머니에게 헌신을 하여 감사함이 많았지만 가족을 향한 양보와 배려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윤희를 외면한 어제의 아쉬움이 남았다. 6시경 학원으로 들어가 현재 어머니의 상황을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걱정을 하는 중에 장원장은 엉뚱하게 세무서에서 통장을 압류했다고 허탈하게 서 있다. 9시에 학원을 나서 집에 10시에 들어와 식사를 했고 경주에 간 딸이 염려되어 연락을 하니 늦은 시간인가 통화가 되지 않았다.
23일 새벽에 눈을 떠 전화를 보니 어제 늦은 시간에 걱정이 되었던지 영식이 전화가 와 있고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는 집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모든 것이 휑하다. 오늘이나 내일이 어머니에게 고비가 될 것 같은데 오전에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요양원에 아내를 일찍 보내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컴퓨터를 수리하여 집으로 왔다. 점심을 먹고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어머님께서 일반병실에서 임종실로 내려오셨다고 하여 마음이 무너졌고 장례식을 준비한다고 운동화 추리링 속옷 등을 배낭에 준비하면서는 더 잘하지 못한 죄송함으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요양원에 가면서 점심도 먹지 못한 아내를 주려고 우유와 영양갱을 사 가지고 임종실에 들어서니 어머니 옆에서 아내는 성경찬송가를 들고 있다. 오후 4시가 되어 당황하고 놀란 표정으로 들어온 여동생도 황망하게 어머니만 바라보더니 말라가는 입술을 축이며 마지막 이별을 준비한다. 오늘 밤을 어머니와 지내려고 6시경 병원 앞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니 엊그제 윤희에 이어 큰 조카 효정이가 와 있다. 그 동안 무관심했던 작은 아버지로서 미안함이 많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신내동 형네는 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울고 있는 효정이를 달래어 할머니를 잊지 말고 오래 기억하라 당부하며 보냈고 밤 10시에는 마지막으로 매제가 와서 인생의 인연을 마무리하고 떠났다. 텅빈 그리고 적막한 임종실, 초등학교 1학년 나를 업고 학교에 가시던 기억과 도시 중학교로 보내며 코스모스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까지 지난 날을 그리다 보니 시간은 0시를 지난다.
24일-26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30분마다 혈압과 맥박 체온을 체크해 보니 혈압 50/40 맥박70 그리고 체온만 36도 정상이다. 입에 물을 적시기를 반복하며 새벽이 올 때까지 서성거리며 보냈고 어머니께서는 어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상태로 주무시는 모습이다. 수십 명의 요양원 환자들이 잠자는 유자원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정적을 가르는 사이로 밤새 운전을 마친 형이 유령처럼 들어선다. 과거에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동고동락을 많이 한 형이기에 특별히 슬픔과 회한이 많을 것인데 소파에 누워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애처롭다. 어제부터 새벽까지 어머니의 숨소리에 변화가 없고 형이 옆에 있어 출근시간 전에 빨리 집에 다녀올 생각으로 임종실을 나섰다. 나오면서 뒤를 돌아 잠깐 다녀오겠으니 더 주무시고 계시라 마음으로 인사를 올리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고 서둘러 아내를 먼저 병원으로 보냈다. 혼자 장례준비를 점검하고 식사를 조금 하려는데 새벽에 도착했다는 여동생이 어머니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다. 평소 겁이 많은 동생이고 밤을 새우며 1시간 전까지 나와 함께 계셨는데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가볍게 무시하고 식탁을 일어서려는데 임종실에 도착했다는 아내가 어머니의 운명 소식을 알린다. 냉정하신 어머니께서 마지막에도 이렇게 자식인 나를 버리나 싶어서 서운함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담담하게 마음을 잡았다. 금요일 아침 내부순환도로를 질주하듯 달렸고 이 잔인한 4월을 나는 기어이 벗어나지 못함을 탄식하며 위생병원 정문을 통과했다. 차를 버리고 달려간 정적이 감도는 임종실 앞에는 영안실로 모셔갈 낯익은 병원 구급차가 서 있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새벽에 본 그대로 눈을 반쯤 뜨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을 떨구고 눈을 감겨 얼굴을 쓰다듬었더니 아직도 새벽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왔다. 77년 인생의 종착점,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6.25참전 용사 아버지를 만나 3남 1녀를 두셨다. 보잘 것 없는 농사일에 온갖 고생을 하셨고 마흔 두 살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우리를 위하여 꼿꼿한 자세로 삶을 사셨다. 35년 전 12월 마지막 날 어머니와 따사한 겨울 햇볕을 쬐며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마을 이장의 방송으로 황급히 읍네 병원으로 나가셨다. 놀라서 떨며 서 있는 나를 별일 아닐 것이라고 안심을 시켰던 어머니께서 초저녁이 되어 아버지의 시신과 함께 들어와 나를 붙들고 통곡하시던 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러 아무런 걱정이 없다시던 인생의 후반에 어머니의 장남(큰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가슴을 자르는 아픔과 고통은 어머니의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극명하게 수명을 단축시켜 오늘의 이별을 만들어 놓았다. 흰 천에 쌓인 어머니를 근처에 있는 삼육의료원 응급실로 이동하여 최종사망을 확인받고 장례식장 추모관에 안치를 하였다. 살아가면서 아버지, 할머니, 큰형과 어머니까지 가족과의 이별로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눈물처럼 내린다. 미리 준비한 지인들에게 문자로 부고를 알리자 가까이 사는 형의 주변 사람들이 먼저 조문을 왔고 오후에 대일원우회 고목회 경자회 등 나의 친구들과 여동생과 매제의 주변인들도 많이 왔다. 특히 어머니 입원부터 매달 빼놓지 않고 병문안을 왔던 영식이는 밤늦게까지 손님 접대와 영안실 분위기에 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25일 장례식장 이틀 째, 9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10시에 입관식을 했다. 어머니 얼굴을 감싸기 전 창 너머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생전 마지막 모습이라며 모두 들어와 인사를 하라고 관계자가 유리문을 열어준다. 어제와는 다르게 마르고 굳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에 손을 얹으니 체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싸늘하고 차가운 화석으로 변하여 있다. 50대 초반의 장례사는 땀을 흘리며 순서대로 염습의 의식을 진행하고 1시간이 지난 11시에 관을 닫는 입관식을 슬픔 속에 마쳤다. 어제에 이어 토요일 오늘도 하루 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점심 이후에 또다시 조문객들이 찾아왔는데 오후 3시에 초등학교 친구들과 어제 밤을 샌 영식이와 형준이가 다시 왔다. 살아계실 때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흥겨운 잔치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반가운 사람들을 가장 슬픈 시간에 만나다 보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늦은 밤까지 조문객은 이어졌고 여러 사람들이 날을 새며 어머니의 밤을 지켰는데 특히 매제의 지인들이 많아 아침까지 쓸쓸하지 않았다.
26일 고향의 산소까지 4시간은 가야 해서 새벽 5시30분 발인식을 거행하고 어머니의 관을 싣고 약 10개월 머물렀던 유자원과 추모관을 떠난다. 거의 날마다 찾아와 어머니를 뵈었고 어머니의 복막염 수술까지 희비가 엇갈린 이 곳을 나도 어머니도 이제는 다시 올 수가 없다. 친지들과 친구들 약 30여명을 태운 영구차는 의료원 정문을 빠져 나왔고 이틀이나 내린 봄비로 인하여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영구차는 강변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빠르게 들어섰고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몇 번을 확인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차는 어느 새 천안 논산 구간을 지나 호남선 구간을 달리고 있고 멀리 눈이 시리게 푸르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부터 3시간을 넘게 달려 김제 톨게이트를 지났고 정든 고향 마을에는 10시에 도착하여 산으로 가기 전 마을 어귀에서 노제를 지낸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누구나 가는 길을 어머님이 가시는 것이라 나를 위로하며 끝없는 들판으로 시선을 돌렸고 어머니와 직접 농사를 함께 했던 형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린다. 바쁜 와중에도 함께 살았던 주민들이 나왔고 어제 서울에 온 청주 큰 처남 내외도 멀리까지 발걸음을 했다. 선산에 10시30분 도착하니 일찍 나온 동네 주민 10여명은 하관 준비에 여념이 없고 고향에 올 때마다 어머니와 이 곳에 함께 왔었는데 오늘은 바로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가신다. 11시 하관에 이어 헌토를 하고 나머지 복잡한 장례절차는 이웃에서 친하게 지낸 성무 아저씨가 간소하게 마친다. 깨끗한 수의와 석관으로 단장한 어머님은 이제 영면에 들어가셨고 고통이 없는 또 다른 안식처로 이동하였다. 12시 지나 아버님 묘 옆에 또 하나의 봉분이 생겼는데 결국 이승과 저승은 어제와 오늘의 차이일 뿐이다. 12시30분 고향 집으로 돌아와 마당부터 안방까지 어머니의 발길과 숨결이 남아 있는 곳곳을 돌았고 안방을 나올 때는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바라볼 때마다 지난날의 사랑에 목이 메어 왔고 고향에 왔다가 돌아갈 때 대문에 기대어 손을 흔들던 어머니의 모습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의 애도 속에 점심을 마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까지 받으며 영구차는 왔던 길 서울로 출발했다. 1시간30분을 달려 도달한 천안 휴게소에는 나들이 객들로 붐비고 상주 완장을 두른 나에게 친구 정식이는 이제는 달아 볼 수 없는 완장과 리본이라며 수고했다고 격려를 한다. 서울에 접근하면서 차량 정체가 심하여 일부를 양재동 인터체인지에 내려주고 곧장 처음 출발한 삼육의료원에 도착했다. 효정이와 윤희를 먼저 보내고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병원을 나와 신내동 아파트 근처 식당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저녁을 먹었다. 형은 이제부터 마음을 비우고 동생들을 같은 동급으로 이해하고 살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나 또한 모두 고생 많았고 우리 가족이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진심을 전했다. 특별히 매제한테는 평소 인간관계가 대단하여 외롭고 초라하지 않은 장례식이었다고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27일 어머님이 세상에 안 계시는 허전한 아침을 맞이했다. 안산의 푸름이 진녹색으로 변하여 베란다 문을 열고 큰 심호흡을 했다. 오전에 부조금 정리도 할 겸 신내동 집에서 모인다고 여동생 전화가 와서 시간을 맞추어 갔더니 조의금 총액은 4천4백만 원이고 그 중에서 매제의 몫은 2천7백만원 형과 나는 각각 8백5십만 원 정도다. 약속대로 장례비용부터 내일 삼우제까지 전체비용 1천5백만원을 매제가 7백만원 형과 내가 각 4백만원씩 지출하여 무리 없이 마무리를 하였다. 장례 후에는 가족 간의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법인데 우리는 일처리를 잘하여 모두에게 감사했고 이제 남은 가족들끼리 우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일만 남아 있다고 생각을 했다. 금전 처리를 마무리 한 뒤에 형이 순대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여 마음도 슬프고 내일은 삼우제로 고향에도 가야해서 고사했지만 거듭되는 요청으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식사 마지막 무렵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공증한 고향 논 2400평(2필지)을 이미 팔았다고 하여 무슨 소리인지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가져가는 것으로 살아계시는 동안은 모든 가족의 몫이고 만약 금전이 필요하여 매매를 하려 했다면 사전에 상의를 했어야 한다. 말 한마디 없이 의식도 없는 어머니의 도장을 이용하여 처리하고 장례식까지 마치고 통보를 하다니 어이가 없어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 금전적인 문제로 반포 큰형수와 갈등을 일으켜 가족이 분열되고 그로 인하여 나와 여동생은 고통 속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또한 상가를 버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형과의 약속을 지키며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결국 욕심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마무리가 최악의 상황으로 바뀌어 버렸다. 집 근처로 와서 영식이를 만나 밤새 푸념을 하는 중에 형과 형수의 미안하다는 사과의 문자가 왔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일 삼우제 가는 일정도 포기하였다.
28일 어머니 삼우제와 큰형의 6주기 기일이 겹쳐 있다. 6년 전에는 큰형으로 인하여 고통이었고 오늘은 작은 형으로 인하여 어려운 하루가 시작되는 날인데 아내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방에만 누워 있다. 어린 시절에 한 이불을 덮고 가깝게 지내온 형제가 오늘은 각자의 길을 가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삶이고 인생이다. 젊은 날 백 번도 넘게 꿈꾸었던 나의 삶 중에 돈을 많이 벌어 3,4층 되는 집을 마련하여 어머니 모시고 형제가 각 층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오늘 첫 번째 목표는 사라져 버렸다. 현재 내 나이가 50살이니 오늘부터는 큰형이나 아버지께서도 가보지 못한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데 모든 지난 일들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오늘이 행복의 정점이고 삶의 끝지점도 될 수 있으니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초연하게 살아가야 할 일이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학원으로 이동하여 단골로 가는 해장국집에서 식사를 했다. 오늘부터는 당장 요양원에 갈 일이 없으니 가던 길을 멈춘 것처럼 허전하고 한가롭다. 신설동에 갔다가 종로를 거쳐 집으로 오는 중에는 엊그제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고 문자가 와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변하여 갔다.
29일 식사를 마치고 오전에 어머니 장례식에 온 고마운 사람들한테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어제 삼우제를 못 갔으니 어머니한테 다녀오려고 집을 나서 강남역 근처에서 점심을 산다는 영식이를 만나러 갔더니 우리나라 해산물이 온통 모여 있는 해물 뷔페집이다. 음식이 깨끗하고 다양하여 맛있게 먹고 용산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로 김제역까지 가서 선산에 도착했더니 엊그제 유자원의 어머니께서는 붉은 황토 아래로 장소를 옮기어 계신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 또한 어머니를 여러 번 불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고 사방을 둘러보면 텅 빈 하늘만 눈에 들어온다. 어머님은 이 자리에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할 것인데 누구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안색을 살피고 대화를 자주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일 수 있다. 인생의 허망함을 뒤로하고 산소를 나와 친구 상가에 들렀다가 늦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는 새벽이 되어서 들어왔는데 슬픔 속에서 허우적댄 일주일의 시간 때문에 바로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30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다시 12시까지 쉬면서 보내다가 체육관으로 가면서 냉면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운동을 하고 신설동에 가서 2층 세입자를 만났더니 장사도 못하는데 월세만 나가서 힘들다고 계약기간을 오늘로 마치고 그 대신 세입자를 구하여 시설비든 권리금이든 나보고 받아 가지라는 결정을 내린다. 늦은 오후에는 나를 사랑한다며 힘내고 슬픔을 이기라는 매제의 격려의 전화가 왔고 영식이는 형제는 손과 발이라며 형을 이해하고 가족이 긴장하고 힘들어하니 모두를 위해 용서하라는 문자가 왔다. 그러면서 사람은 누구나 아집과 편견에 쌓여 있어 그 속에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것이니 자기반성과 함께 어머님이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집안의 어두음이 걷히길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눈물을 많이 흘린 4월이 가고 슬픔을 이기고 다시 서는 내 모습을 이 밤이 새는 5월 가정의 달에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