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유행하는 포켓몬 빵을 사려고
하루종일 편의점 20군데를 찾아다녔다는 얘기,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2시간 반을 줄서서 기다려 번호표를 받고 6개들이 빵을 샀다는
정근이의 얘길 들으며
나는 꼭 이래야만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가
가슴속이 답답해져서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나만큼이나 몸이 지치고 허리아픈 사람이 두시간 넘게 서성이는 건,
필수품이어서 꼭 사야할 것도 아닌 빵을 사려고 그러는 건 미친짓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서 애들에게 빵을 사줬어야 했냐고
한숨섞인 내 질문에 정근이는
본인도 너털웃음을 웃었다.
'애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아빠의 희생에 대한 대답은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다빈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다.
이 친구에 비해 엄마는 그럴 수 있는 몸도 안되거니와
내겐 엄두가 안 나는 일이라고,
부모의 한없는 희생을 보여주는 일도 물론 아이 성장에 있어
훌륭한 일이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희생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진 않는다는 얘기였다.
다빈이도 대답이 쿨했다.
아니, 뭐하러 그렇게까지?
그 빵 하나가 뭐그리 중요하다고
아픈데도 나가서 그리 해야해요?
엄마가 만일 그렇게 힘들게 사왔다면 저는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아요.
그러니 그렇게까지 하지는 마세요.
나는 어느 선까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걸 다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나와 내 자식 사이에도
엄연히 다른 타인의 거리가 있으니
그 거리를 현실적으로 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정근이가 훗날에
본전타령을 하며
내가 옛날에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라고 호소할 타입은 아니지만
부모니까 내 아이들에게
모든걸 다 해주고 싶다는 마음속엔 정작 나 자신을 위한 돌봄이
너무도 결여됐다는 생각에
아쉬웠던 것이다.
단지 아이들의 웃음을 보는 것으로도 족하다?
그러나 이 친구의 몸은
악화되고 있음을 왜 잊어버리는가.
아이들에게 대단한 아빠였다는 기억을 남겨주는 것이
큰 유산이 되겠지만
내가 나로서의 적절한 보호막 라인을 정해놓고 나서
타인을 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심신이 아파봤던 나로서는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