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가 낳은 한국문학의 선구자 박화성(朴花城)
목포에는 민족애(民族愛)의 뜨거운 정열을 간직한 문인들이 많았다. 극작가 김우진, 차범석, 평론가 김현, 소설가최인훈, 시인 김지하를 비롯하여 작가 박화성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그중에 목포시 죽동에서 태어난 소영(素影) 박화성(朴花城,1904 ~ 1988)이란 여성 소설가가 있다.
한국 여성문인1세대. 개화기에 목포에서 태어난 한국문학의 선구자 素影 박화성 선생은 개척자의 생애가 그러하듯, 외롭고 어려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도전과 정진으로 우리 문학사에 우뚝선 선구자요, 선각자였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그의 행적은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각가지 화제를 낳게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네 살 때부터 한글을 깨쳐 성경을 읽고 다섯 살에는 한문을, 일곱 살 때부터 소설을 읽어 어머니가 소설책을 빌려다 주었다 한다. 그래서 1년에 몇 번씩 월반을 하여 열한 살에 고등과 4학년인 최고 학년에 오르고 '유랑의 소녀'라는 소설을 써 신동이란 말이 따라 다녔다.
14세 때 '식물원' 소설을 쓰고 15세에 서울 숙명여학교 졸업 후 소학교 선생으로 교단에 선 것으로 아기 선생님이라는 애칭을 받게된다. 18 살 때 영광중학원에서 조 운을 만나 문학수업으로 작가로써의 성숙기에 이르는 계기를 맞아 영광은 그에게 작가로 키워준 문학의 모태가 된다.
1924년에는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 1925년 조선문단 1월호에 이광수의 추천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이광수는 '추석전야'를 "눈물로써 일은 작품이다"라고 평했다.
그는 교사직을 마다하고 최초의 한국여성으로서 일본 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이때 출세작이요 세간에 널리 알리게되는 '백화(白花)'의 초고완성,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탈고하고 1932년 '동아일보'에서 1백 80회가 연재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족적을 남긴다. 이때 "백화는 박화성의 문학에의 굳센 동경과 성의에서 맺혀진 한 꽃송이다" 라고 칭송했다.
1934년 식민지 현실을 빗대어 그린 단편소설 <헐어진 청년회관>은 총 불행이 민족의 불행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역사의식을 뚜렷이 제시한 점에서 역사소설의 문학성을 높여주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일본여대 재학시에는 여성항일구국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이 소설의 소재가 된 청년회관 건물은 1980연대 초까지 남아 있었는데,그 곳이다. 이외에도 <하수도 공사>,<홍수 전후>, <고향 없는 사람들>, <고개를 넘으면>, <사랑>, <내일의 태양> 등 주옥같은 120여편을 남겼다.
우리문단에 등장한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 작가였고, 또한 장편소설을 집필한 최초의 여류작가로 줄곧 선구적 길을 걸었다.
또한 박화성 선생의 문학은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괴로움과 외로움을 일제(日帝)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승화시켜 나갔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25년 문단에 등장한 이후 60여 년의 작가생활을 통해 한국문단 의 대모(大母)로 칭송 받으며 남긴 수많은 역작과 그의 족적은 우리가 지키고 기려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박화성은 초기에 주로 가난한 농민들의 고된 삶을 다룬 사회성 강한 소설을 썼으며,그 중 단편 [초혼]은 일본에 번역소개되기도 했다.
이외에 희곡, 콩트, 기행문, 동화, 수필 등도 썼으며, 1940년경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일본어 사용 강요가 노골화되자 절필하고 낙향하여 후배양성에 전념했는데, 그만큼 그녀의 문학이 민족애에 입각한 문학이었음을 말해준다.
생전에 한국문학상, 예술원상, 3.1문화상을 받은 그는 문학의 피를 가족에게 내려 장남 천승준(문학평론가), 차남 승세(소설.희곡), 3남 승걸(서울대 영문과 교수),맏며느리 이계희(소설)가 그 업을 잇고 있다.
한국현대문학의 1세대로 84세를 누리고 우리 곁에 20편의 장편소설과 1백여편의 단편소설, 5백여편의 수필과 시를 곱게 남겨놓고 정갈스럽게 혼탁한 이 세상을 비우었다.
"황금색의 은행잎이 비처럼 휘날리던 늦가을의 영광중학원이 눈에 선하고, 인생의 고향 광주을 생각하면 북문밖 교회에서 부녀야학 교사로 활동했던 고생스러웠던 나날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回顧)....
그녀를 기리고자 목포시 전남 목포시 용해동 11-28번지(남농로 95) 목포문학관이 건립 목포문화원에서 옮겨온 고인의 육필원고, 저서, 고본과 생활유품 등을 전시해 문학의 산실로서의 모습을 갖추고있다.
한국문단 최초의 여류작가인 그녀의 문학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이 문학관은 후세대에게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민족애에 찬 선구자의 생애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뜻깊은 장소이다.
한 여성이 작가 활동하기 어려운 격동의 시절, 민족애에 찬 선구자의 생애를 이곳 목포지역 목포인으로서 이난영 가수와 함께 추앙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뜻을 기려 많은 이들에게 귀감되는 것을 본받는 것이 후손들이 해야 할 책무일 것이다.
1904. 4월 16일(음) 박운서와 김운선의 막내딸로 목포에서 출생
1915. 목포 정명여학교 고등과 졸업
1918. 숙명여고보 졸업, 천안과 아산의 보통학교에서 교편 잡음
1922. 영광중학교 교사로 부임. 조운(曺雲) 등 文友들과 문학수업
1925. 단편 <추석전야>가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지에 게재되어 문단에 등단
1926. 숙명여고보 신학년제 4년졸업,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 입학
1929. 동대학 영문학부 3년 수료, 단편 <하수도공사> 발표
1932. 한국여성 최초의 장편<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 간행
1933. 이후 중편 <비탈>, 장편 <북극의 여명>, 단편 <조혼> <고향없는 사람들> 등의 발표후 일제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각필
1947. 첫 단편집 <고향없는 사람들> 간행
1955. <고개를 넘으면>(1955)을 시작으로 <사랑>(1956), <벼랑에 피는 꽃>(1957), <내일의 태양>(1958) 등 장편을 잇달아 발표하여 장편시대의 막을 열었음
1958. 목포시 문화상 수상
1960. <타오르는 별> <창공에 그리다> <태양은 날로 새롭다> 등의 장편을 연재
1961. 이화여자대학교 제정 문학선구 공로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이사 피임
1962. 장편<가시밭을 달리다> <너와나의 합창>발표
1963. 국제 P.E.M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피임 장편 <젊은 가로수>연재
1964. 회갑기념으로 <눈보라의 운하>간행
1965. 한국여류문인회 초대 회장에 선임, 자유중국 부인작가협회 초청으로 대만 방문
1966. 한국예술원 회원에 선임, 뉴욕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세계연차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단편 <증언> 으로 제3회 한국문학상 수상
1968. 한국친화회(韓國親和會) 초청으로 일본에서 문학강연회 좌담회를 가짐. 제3단편집 <잔영(殘影)>발표
1970. 제15회 예술원상 수상
1974.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 포장, 고희 기념으로 수상집 <순간에서 영원사이>간행
1977. 제4단편집<휴화산> 간행
1984. 제24회 3·1 문화상 수상 이후 <마지막 편지> <달리는 아침에> 등 단편을 발표, 마지막 임종 직전까지 집필
1988. 1월 30일 상오 6시 永眠
여성문인1세대였던 박화성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박화성 문학 기념관이 현재 국가사적 제289호로 지정된 목포문화원 건물의 2층에 마련되어있다. 이곳에는 선생의 친필원고와 편지, 사진 자료 등이 전시 된 문학실과 예전에 직접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전시한 유품실이 있다.
또한 매년 목포문인협회의 주관으로 고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박화성기념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http://www.hankukmail.com/newshome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