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 [李箱과 1930년대 경성의 '모던 뽀이'들] 중에서
'모던 뽀이'들은 상징적 아버지(조선·전통·과거)를 살해하고 스스로 부왕(父王)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은 미개한 '원주민', 전근대의 '낙후'와 '봉건'의 잔재들이었다. 그것은 '모던'으로 나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데 아버지의 상징적 살해가 필요했다. 이상은 '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시 〈오감도〉 제2호)가 되는 것이냐고 탄식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대신에 '모던'을 손에 쥔 '13인의 아해들'은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들이며,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상)들이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의 김기림 시인. 동료 문인이자 문학기자로서 이상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시인 김기림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가까운 학성군 출신이었다. 1908년생이니 이상보다 두 살 연상이다. 주로 종로서를 외근 구역으로 맡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기림은 '북구(北歐)적인 선이 굵고 축구감독 같은 풍모'를 지녔고, '근심·우울·센티멘털리즘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명랑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신문사 안에서의 별명은 '김모범 청년'이었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는 염상섭·현진건·김동인·채만식·홍기문·함대훈·이원조 등 문인들이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이익상·주요섭·윤백남·이무영·홍효민·주요한·이은상·변영로·심훈 등이 있었다. 당시 문단의 헤게모니는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 문인기자들이 쥐고 있었고, 그 중심에 김기림이 있었다.
김기림과 이상의 우정은 호혜평등 관계이기보다는 이상이 자신의 지지자이자 멘토였던 김기림에게 일방으로 기대는 형국이었다. 일찍이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김기림은 이상에게 "파리 가서 3년간 공부하고 오자. 파리에 있는 슈르 리얼리스트들하고 싸워서 누가 이기나 내기하자"고 제의했다. 이상은 김기림에게 편지를 보내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일 저일 의논하고 싶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쓰면 김기림에게 보냈다. "졸작 〈날개〉에 대한 형의 다정한 말씀 골수에 숨이오. 방금은 문학청년이 회로(灰爐)에 돌아갈 지상최종의 걸작 〈종생기〉를 쓰는 중이오. 형이나 부디 억울한 이 내출혈을 알아주기 바라오!"
그 무렵 이상은 거듭되는 카페 경영의 실패, 금홍과의 이별,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몸과 의식이 퇴락하고 있었다. 구인회 멤버인 정인택과 윤태영이 황금정 뒷골목의 어두컴컴한 셋방에 숨어 지내던 이상을 찾아 "지금까지 걸어오던 불건강한 악취미는 청산하고 건강한 생활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이상은 얼마 뒤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에 교정부 직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김유정이 가끔 나타나 이상의 책상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갔다. 김유정이 "해경, 그건 뭐하라는 표시요?"라고 물으면 이상은 "이건 거꾸로 박힌 활자를 바로 세우라는 표시요"라고 답했다.
1936년 7월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가 나왔을 때 동북제대에 유학 중인 김기림의 부탁으로 이상이 본문 편집과 표지 장정을 떠맡았다. 책에 쪽수 표기를 하지 말자는 이상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김기림은 "책인데 어떻게 쪽수 표시를 안 하느냐"고 난색을 표했다. 구본웅은 "한 1000부 박아서 팔자"고 했고, 이상은 100부만 찍자고 했다. 결국 200부를 찍고자 했던 김기림의 뜻대로 되었다.
이상은 그해 10월경 동경행을 감행하면서 김기림에게 편지를 썼다. "골맹에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 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火)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한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 문단 풍경
1920년대가 서구시와 문학이론의 도입으로 자유시의 형식을 실험한 시기라면 30년대는 이를 바탕으로 또 한 번의 전환을 시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적 전환은 시문학동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30년대 시인들은 서구시적 체험과 그 전대의 시적 성과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그 예술적 세련성을 확충해 갔다. 1930년대에 이르러 많은 시인들이 동인지와 일간신문을 통해 등단하게 된다.김학동 외 1인,『현대시론』, 새문사, 1997, 345쪽. 창작품이 상품의 하나로서 저널리즘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문학의 사회적인 가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 등의 중요 신문들은 학예면을 두고 신춘현상문예모집을 실시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문학을 보는 시각이 변모하게 되고, 문학 활동을 점차적으로 사회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문학 창작에 뜻을 둔 신인들이 동인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문단에 등장할 수 있는 문호가 전국적으로 개방되기에 이르며 이러한 자각들은 1930년대의 한국 현대 문학을 일정한 수준에 끌어올린 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김혜니, 앞의 책, 195-196쪽.)
파시즘과 군국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1930년대는 한국 문예비평사에 있어서 전형기로서,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시대의 중심사상이 모색되는 주조 탐색의 시기로 1910년대에 맹아를 보이고 발전해 온 근대시론이 본격적인 현대시론으로 정립되어 이후의 흐름을 선도하는 중요한 문학사적 위상을 지닌다. 순수문학의 등장과 더불어 1930년대에는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으로 문학에 있어서의 근대성의 인식이 본격화된다. 서구의 현대적 사조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이 수용되어, 카프가 붕괴되며 생겨난 공백을 메우고 모더니티 지향의 문학사적 흐름을 더 선명히 한다^
첫댓글 우리 글마루방이 앞으로 문학박사들도 들어와 울고가는 방이 되겠소.^^
와! 헤이쥬님! 김기림논에 강사로 나서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소이다. 기대합니다.
글마루 글쟁이학도들을 평론가로 맹길려 드나.
뭘요, 제가 쓴 글도 아닌 걸요.
다만, 이참에 김기림을 제대로 구경하고 가길 바라는 거죠.
어쩜 여기 자료들에 비해서 우리의 토론은 턱 없이 가볍고, 산뜻하게 외양만 만지게 될 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미 뱃속 가득 김기림이라는 식량을 채워놓았으니, 간결한 토론 또한 어떨라구요.
그저 재미나게 이바구를 한 판 나누어 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