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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편적 진실에 관한 담론
여세주(문학평론가, 수필가)
1.삶을 이해하는 키워드
류재홍의 《밥 한 끼 합시다》는 《그들에게 길을 묻다》(수필미학사, 2014)에 이어 두 번째 수필집이다. 수록된 작품의 문장들이 불순물 하나 없이 매우 정갈하게 정제되어 있다. 순도 높은 문장은 막힘없는 피돌기를 가능하게 하고 작품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수필집은 총 6부로 나누어져 있다. 소제목들은 궁극적으로 삶을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언어들이다. ‘염원·굴레·사랑·소통’은 삶의 보편적 이치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들이며, ‘산다는 것’와 ‘왜 사냐건 웃지요’에서는 삶의 보편적 진실을 종합하고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느끼는 무상無常을 말한다.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신세계를 이렇게 나누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류재홍은 사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고 하면서도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그의 수필들은 메시지가 분명하다. 이 메시지들은 궁극적으로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작품 한편 한편에 담긴 작가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근원적인 의문에 답하려고 한다.
나는 왜 사는가. 이 오랜 질문은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늘 가슴을 죄어왔다. 매일 그게 그거인 생활에 지겨워했던 날도, 들끓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허덕였던 때도, 일인다역에 파김치가 되었던 날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는 문제였다. 생의 이력을 들춰보면 그저 그날을 살아내었을 뿐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데, 뭐 그리 애면글면했는지 모르겠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일진대.
-<왜 사냐 건 웃지요>에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놓아버릴 수 없었지만, 이 질문은 풀 수 없는 숙제였다는 인식에 이른다. 생의 이력은 삶의 반복적 일상성, 끝없는 욕망의 추종, 일인다역의 분주한 생활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고 하니, 도대체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에서 출발하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닿는다. 이 수필집에 수록한 글들의 문면 뒤에는 삶의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곧 삶의 보편적 진실이라는 생각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삶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삶의 진리가 있는 것일까. 서양의 형이상학에서는 삶의 저편에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양의 불교나 도교에서는 삶의 본질이 현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자체에 있다고 본다. 류재홍은 삶의 저편에 있는 불변의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현상 그 자체에서 삶의 보편적 진실을 찾아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밥 한 끼 합시다》는 삶의 보편적 진실을 찾고 삶의 결핍을 극복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끝없는 욕망을 좇으며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다가 막을 내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현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염원을 만들고 염원이 있기에 삶을 버텨낸다. 그 염원이 성취되든 좌절되든 그 자리를 다시 다른 염원으로 채우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 삶을 옥죄는 굴레가 만만치는 않다. 삶의 굴레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 굴레를 삶의 힘으로 삼아 서로 사랑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같이, 수필가 류재홍은 소제목으로 제시한 몇 개의 언어들로 인간의 삶을 정의하고자 한다.
삶에 대한 해석은 ‘왜 사는가’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궁극적으로는 별개가 아니다. 류재홍은 자신의 경험세계에서 삶의 보편적 진실을 추상하고 삶의 결핍을 극복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류재홍이 추상한 삶의 보편적 진실은 무엇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지혜는 또 무엇일까?
2. 공동체적 삶의 염원
인간은 저마다의 염원을 품고 사는 존재들이다. 염원하는 바가 없다면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 제1부에 묶은 작품들은 삶의 보편적 진실 가운데 염원을 다루고 있다. 인간은 각자 다른 염원을 품고 살아가고 또 그때그때 염원도 달라지지만, 류재홍은 특히 공동체적 삶을 향한 염원을 품고 있다. 공동체적 삶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삶의 회복을 염원하는 작품들이 한 무리를 이룬다.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이 일궈낸 작품들이다.
<염원>은 항상 염원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곳에는 침묵의 소리가 있었다. 조용한 외침, 그것은 간절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라는 화두부터 먼저 던져놓는다. 염원에 대해 미리 암시하고 있다. 그런 다음 초례산 언저리에 있는 어느 체육공원 풍경을 묘사한다. 멀리에서 가까이로, 여럿에서 하나로 점차 클로즈업시켜 나가는 기법으로 체육공원의 풍경에 접근한다. 자연환경과 시설물에 관한 풍경에서 시작하여, 코로나19로 인해 평소와 달리 유난히 북적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묵묵히 돌탑을 쌓아 올리는 노신사와 돌탑에 주목하는 것이다. 체육공원에 온 사람들은 무료함을 달래거나 근육을 단련하거나 날씬한 몸매를 가꾸는 등 저마다의 염원을 품고 사는 존재들이라고 해석한다. 매일 조금씩 돌탑을 쌓아 올리는 노신사의 염원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을 펼치기도 한다. 완성된 돌탑 꼭대기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작은 돌들에서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염원도 읽는다. 화자 역시 작은 돌 하나 올려놓고 마음을 모은다. 이처럼 인간은 크든 작든 항상 무언가를 염원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은 전개를 통해 삶의 보편적 진실을 설득력 있고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탑을 쌓은 노신사의 염원을 단정하지는 않지만, 노신사에 대한 작가의 추론적 상상력을 고려해 볼 때 코로나로 인해 멈추어 버린 일상, 즉 공동체적 삶의 회복에 대한 염원으로 읽을 수 있다.
표제작인 <밥 한 끼 합시다>에서는 ‘혼밥’이 유행하는 세태를, 특히 코로나19로 함께 모여서 식사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외롭고 서글픈 일이라고 여긴다. 어머니 기일에 7남매가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눈 경험을 소환하여 ‘함께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경험으로 증명해 보인다. 즉, 이런저런 일들로 몸살이 났고 마음마저 편치 않은 상태여서 제사에 참석할 때만 해도 억지로 서 있었는데 여럿이 수다를 떨며 양푼 속 비빔밥을 실컷 먹고 나니 언제 아팠냐는 듯 속이 후련하고 힘이 솟아 설거지를 신나게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작품 말미에 “밥 한 끼 하고 싶다는 말은 마음의 문을 열고 무슨 일이든 나누고 싶다는 뜻이지 않겠는가”라고 한 문장이 작품 주제를 소통의 문제로 오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코로나의 종식에 따른 공동체 사회의 회복을 염원한다는 주제로 환원된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함께 수다를 떨며 밥 한 끼 먹는 것이 삶일진대, 세상이 그렇지 못하니 ‘밥 한 끼 합시다’란 말이 염원이 아닐 수 없다. <꽃 진 자리>에서도 대구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쏟아져 나올 때 전국에서 달려온 의료진 등의 도움을 기억하며 공동체 의식을 통한 코로나 위기 극복을 염원한다.
<지심도 동백>은 지심도 여행수필이다. 지심도에서 붉은 동백꽃의 강렬함을 기대했으나 동백꽃의 희멀건 색깔에 실망한다. 동백꽃 색깔이 강렬하지 못한 것은 끝물이라 그런 것도 아니고 날씨 탓도 아니었다. 수백 년 이상의 수령을 지닌 고목이기 때문이란다. 늙을 대로 늙은 몸에서 청춘의 힘을 맛보려 한 작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성찰하면서 “희미하거나 선명하거나 다 같은 동백꽃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 지점에 이르러 비로소 함축된 주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늙었다고 해서 외면당하는 일 없는, 늙었으나 그 존재감을 인정받는 사회에 대한 염원이 바로 그것이다. <첨성대와 핑크뮬리>는 상생의 공동체를 염원하는 작품이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정치적 목소리를 핑크뮬리와 첨성대의 이미지와 유비시켜 진보와 보수, 새로운 것과 옛것,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이 상생의 원천이라고 한다.
류재홍에게 공동체란 가족과 사회를 넘어 더욱 확장된다. 생태적 공동체에까지 작가의 문제의식은 범위를 넓힌다. <손님은 왕이 아니다>에서는 지구 환경의 회복, 즉 지구촌 전체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염원을 다룬다. 지구는 인간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큰 공동체다. 필요한 것을 지나치게 퍼다 쓰고 편의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인간들로 인해 지구 공동체는 망가지고 파괴되어 지속가능성을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가는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빌려 쓰다가 돌아가는 손님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을 가질 때, 지구에서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진짜 손님으로 살아 볼 일이다”라는 성찰적 고백체를 끝 문장으로 가져와 독자들의 생태적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공생한다.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는 것은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염원은 삶의 보편적 진실이다.
3.관습이라는 굴레의 역설
제2부에서는 ‘굴레’라는 제목을 붙였다. ‘굴레’는 작품 제목이기도 하지만, 삶의 굴레에 관한 글들을 한데 모은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이 부분에 수록된 작품들로 볼 때, 굴레란 공동체가 오랫동안 지켜온 관습이나 예법을 뜻한다. 주로 가정사와 관련한 예법이나 관습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사 가운데 시부모 봉양의 어려움을 토로한 작품이 여러 편이다. 수필가들은 부모 봉양과 관련한 작품들을 적지 않게 써왔다. 이들 대다수는 부모를 요양원에 의탁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인해 불거지는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 또는 요양원에 보낼 수밖에 없는 사정을 토로하면서 스스로 위안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내용이다. 이 시대의 형편을 진솔하게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류재홍이 다루는 문제는 이들과 다르다. 그의 작품에서 시부모를 집에서 봉양하는 데 대한 갈등은 찾아볼 수 없다. 시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마땅히 지켜야 할 예법이나 관습으로 미리 전제되어 있다. 시부모를 봉양 과정에서 봉착하는 어려움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힘겨운 하루하루를 이야기하면서도 시부모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연민할 뿐이다. <녹두죽 한 그릇>은 평소 깔끔하던 시아버지가 어느 때부터 목욕하지 않으려고 목욕 말만 나오면 아프다며 드러눕는데 그런 시아버지를 달래어 목욕시키는 사연을 내용으로 삼은 작품이다. 그럴 때마다 시아버지를 나무라기보다 시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목욕이 아니라 기운을 낼 수 있는 따뜻한 녹두죽 한 그릇인지도 모른다고 연민한다. <바람>에서는 시아버지가 난 화분의 마사토가 너무 굵은 것 같다며 맷돌에 넣는 바람에 거실을 흙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것에 화가 났으나 내색하지 않는다. 청소 한 번 더 하면 되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독인다. 그 순간에 화가 난 것은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할 일은 많고 몸은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한 신경질이었을 뿐이라며 성찰한다. <마음의 병>은 시어머니가 저지른 실수를 제재로 삼았다. 시어머니가 혼자 잘 수 있도록 조치해 놓고 모임에서 주관하는 여행을 갔는데, 걱정되어 1박을 포기하고 돌아와 보니 시어머니가 실수해 놓았더라는 내용이다. 며느리 오기 전에 혼자 처리한답시고 엉망으로 더럽혀 놓은 욕실을 청소하고 시어머니를 목욕시키는 수고에도 작가는 자신의 미래를 오브랩 시키며 시어머니의 심정부터 헤아린다.
며느리의 제사용 한복을 지어주는 문제로 고민하는 <제사 한복>도 이어져 오던 예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심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해주었듯이 며느리에게 제사용 한복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버티고 있는 내적 갈등을 그리면서 예법을 중시하는 작가의 신념을 드러낸다. <굴레>에서도 작가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명절이나 제사 때 음식을 간소하게 하자는 가족들의 요구에 겉으로는 수긍하면서도 그런 관습을 버릴 생각은 없다. 제삿날만이라도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던, 가난하던 시절의 풍속을 지키려니 음식을 넉넉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런 관습이 “나를 규정해 주고 장식해 주었던 것”이며 “평생을 지켜온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그 신념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나 매한가지”라고까지 하면서 오랜 관습을 고집한다. <시절이 그랬다>는 가문의 뿌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시아버지의 영을 거스를 수 없어 어린 아들을 시어른들 곁에 두고 분가해야 했던 기억을 며느리에게 풀어놓는 대화체 형식의 수필이다. 그 관습이 가슴 아린 삶의 굴레였지만, 그 시절에 흔히 있던 가문의 풍속이라며 수긍한다.
수필가 류재홍은 예법이나 관습을 삶의 굴레라고 하면서도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한다. “굴레라 생각했던 일들이 나를 지탱하게 해준 힘”(<머리말>)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예법이나 관습은 삶의 굴레이면서 힘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지만 진실이다. 역설이 성립된다. 사람들은 예법이나 관습 등 자신의 신념에 갇혀서 그것을 오히려 신봉하며 살아간다. 철학자들은 특정한 신념에 갇힌 종속적 자아를 벗어나 주체적 자아,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서라고 한다. 그러나 주체적이고 진정한 자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삶을 지배하는 예법이나 관습 등을 신봉하면서 자신의 신념이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오히려 삶의 진실일 수 있다. 삶을 이렇게 바라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류재홍의 인생관 또는 세계관은 그래서 특별하다. 철학적 상식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다.
4.사랑과 소통의 사회적 실체
인간이 더불어 살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 소통은 물론이고 사랑도 사회적 실체가 되었다. 사랑과 소통 없이는 더불어 살 수 없다. 사랑과 소통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그것이 삶의 진실임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소통의 결핍은 심각하다. 류재홍의 수필집 제3부와 제4부에서는 사랑과 소통의 부재 현상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랑과 소통의 사회적 역할을 통해 삶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사랑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다. 어떤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감정을 사랑이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일 것이다. 서로 아끼고 귀하게 여기며 예뻐하는 마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보살핀다거나 베푸는 마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고 공경하는 마음도 포괄적으로 사랑이라 일컫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에서 사랑과 정은 동의어에 가깝다. 사랑은 남녀 사이, 가족 사이, 이웃 사이의 정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물 사이의 정까지 망라한다. 사랑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주로 종교의 몫이었다. 석가모니는 자비를, 공자는 인을, 예수는 사랑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사랑>에서는 매끼 식후마다 십여 분이 넘도록 화초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며 말벗을 삼고 있는 시어른이 주인공이다. 작가는 시어른의 모습에서 사랑과 소통의 문제를 통찰한다. 사랑은 상대를 알려고 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제가끔 자기 일에 빠져 있는 식구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아버지의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무엇엔가 애착을 갖거나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것이 살아가는 데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에서도 사물을 대하는 따스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아집과 욕심으로 오염된 몸속에 CT촬영을 위해 넣은 조영제를 씻어내려고 먹는 물의 고통,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의 우둔함을 지적한다.
사물을 대할 때도 사랑하는 마음을 베풀어야 하거늘, 사랑은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인자因子다. <주거니 받거니>는 어느 초등학교 동기생 모임 풍경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어버이날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주요 화제다. 장인 장모 산소에 가서 풀을 뽑고, 대리기사로 부인이 달려온 이가 부러움과 시샘을 한몸에 받는다. 사랑이 두터운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메시지로 전한다. 이 작품과는 달리 <봄날은 간다>는 어느 부부 사이의 사랑싸움 목격담이다. 이 광경을 보며 나이가 들면 각자의 성질도 풀기를 잃게 되고 상대의 욕망도 품을 줄 아는 아량이 생긴다는 인생 경륜을 풀어놓지만, 결국 부부라는 인간관계의 기반은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자식과 부모 사이도 다르지 않다.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작가의 이와 같은 생각이 <봄이니까>에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길거리에서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여남은 살 된 아이를 꾸짖는 모습을 포착한다. 닦달하지 않아도 저절로 피어나는 봄꽃처럼 다 때가 있다는 것을 귀결로 삼지만, 그 이면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숨겨 놓고 있다.
소통은 인간이 협동하기 위해 갖추게 된 사회적 능력이다. 소통하면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을 타인과 대화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의 언어 중에서 가장 유연한 언어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에는 언어를 교환하는 소통 도구도 넘쳐난다. 그런데도 정작 소통이 목마른 시대다.
류재홍은 소통하며 더불어 사는 삶이 온전한 삶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고 소통을 위해서는 낯선 이에게도 마음을 열어 말을 걸고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통>에서 독자에게 내보내는 메시지가 그러하다. 시외버스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네는 중년 여인과의 만남, 산책로 가장자리에 돗자리 하나 펴 놓고 커피와 달걀과 컵라면을 파는 곳에 아침 운동 나온 사람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는 풍경에서 작가는 소통하는 삶의 지혜를 읽는다. <감로행>에서는 감로수 같은 사람이 되라는 자신의 불명佛名에서 성찰적 사유를 시작한다. 폐암으로 입원한 시어머니의 병 수발과 시아버지 밥상 차리는 일로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일상조차 허물어졌다는 이웃 새댁, 그 딱한 사정을 들어준 경험을 내용으로 삼았다. 이웃 새댁이 속내를 털어놓는 소통을 통해 삶의 기운을 충전했다는 말에 상쾌함을 느낀 작가는, 이웃 새댁이 곧 ‘감로행’이라고 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속내를 이웃에게 드러내어 이야기하고 이웃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소통이 모두 ‘감로행’이라는 것을 읽게 된다. <늦기 전에>는 가족 사이에 오가는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한 소통 방식을 해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또한 소통의 사회적 실체에 대한 텍스트로 해석할 수 있다.
5.산다는 것, 무상無常의 위안
인간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공동체적 삶의 염원, 삶의 굴레이면서 힘인 예법이나 관습, 삶의 필요조건인 사랑이나 소통만으로 규명될 수 없다. 삶에 대한 정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루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수필집 제5부와 제6부에서 류재홍은 삶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내려고 한다.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행운이 따라오기도 한다. <산다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삶의 진실이 이러한데도 인간은 욕망과 이성,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들 간다고 말한다. <몽돌>에서는 반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의 삶을 회고한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을 연민으로 바꾸어가는 것, 서로의 각을 인정해 주는 것, 아니 어쩌면 바닷가 몽돌처럼 서로를 지워가는 것”. 그 과정에는 아픔과 눈물뿐만 아니라 환희와 기쁨도 적지 않았으므로 종착역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 부부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살아간다고 했다. 이는 부부로 살아가면서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인생은 어느덧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육체는 병들고 정신은 희미해진다. 더듬거리지 않고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내려가는 길>, <백내장>, <회색과 쪽빛 사이> 등은 작가의 이러한 심경을 드러낸 작품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는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느끼는 삶의 무상無常을 주제로 삼고 있다. 매일 똑같은 날들을 습관처럼 살아오면서도 오늘을 기대하게 되고 꿈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뎌 보지만, 삶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고 요약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사는 일에 무기력해져 있을 때 들른 곳이 환성사였고 그곳에서 무상의 이치를 생각한다. 환성사는 한때 큰 절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주춧돌만 남아있는 건물지, 한지를 제조하여 관아에 공납하던 때 사용한 석조를 바라보며 존재의 생멸을 깨닫는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이 마지막 부분에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즉 존재의 무상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이다.
어디 인생뿐이랴. 변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 세상도 변한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는 이러한 불교적 인 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웃집 그녀나 오랜 세월 다니던 절과 같이 개발로 인해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의 상처를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이치를 통해 위안하려는 내용이다. 여기서 작가는 불교의 무상을 통찰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공空의 형식, 즉 무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기는 것이든 없어지는 것이든 그것이 실체는 아니다. 있는 것은 원래 없었던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생기고 있는 것에서 없어진다는 말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 보이지 않다가 드러나고 드러나 있다가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상실에서 오는 세입자들의 상처는 자신이 정한 것이다. 이 세상에 깃든 우리의 삶도 세입자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언젠가는 비워주고 떠나야 한다. 삶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닫는 데서 수필가 류재홍의 인생 탐구 여정은 마무리된다.
6.존재론적 고뇌
류재홍의 첫 수필집 《그들에게 길을 묻다》에 보이는 특징은 수필의 형식 실험이었다. 희곡적 대화나 독백, 사물의 화자화話者化, 자아의 타자화他者化 등을 통해 매우 다양한 수필 쓰기를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 실험은 세계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바라보고 그 존재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기법들이었다. 보는 대로 보이는 주관적 세계는 그것의 본질이 아니라는 입장에 서면,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의 본질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시도가 첫 수필집에서는 다양한 형식 실험으로 나타난 것이다. 객관화의 방법은 ‘삶의 진실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하는 인식론적 고뇌였다.
이번의 두 번째 수필집에서는 작가의 관심이 달라졌다. 교술 장르의 고유성을 회복하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고뇌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의 ‘기호 삼각형’에 기대어 수필을 정의해 보면, 수필은 현실의 경험(지시 대상)을 형상화(기호화)하여 의미를 드러내는 언어체계다. 류재홍의 첫 수필집에서는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수필집에서는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정성을 쏟았다.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이 그 의미이다.
그렇기에 《밥 한 끼 합시다》는 이러한 근원적 질문을 염두에 새겨둔 채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현실의 삶에 지쳐 있거나 회의를 느낄 때, 류재홍의 수필들은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올 것이다.
-류재홍 수필집 《밥 한 끼 합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