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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 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끈데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한 그는
감상 :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깃발이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깃발이건 그것들엔 하나의 공통성이 있다. 각자가 지향하는 <이상 혹은 이념의 표상>으로서 그것들은 공중에 높이 나부끼게 된다. 그러므로 깃발은 그 모습으로서 표상된 그 이상과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깃발에 대하여 가지는 본질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이 작자는 이러한 깃발의 본질적 개념을 자신의 독특한 주관으로 해석하여 아무리 실현하려 하여도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펄럭이는 운동태의 표상으로서 깃발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또는 <이렇게도 슬프고 애달픈 마음>과 같은 표현이 자주 나오게 된다. 사실 인간의 이상이 실현되어 버리면 그것은 벌써 이상은 아니다.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곳에 이상의 매력은 언제나 존속될 수 있고 그 이상을 좆으려는 인간의 보람은 끝없이 유지되어 갈 것이다.
이 시는 시상도 훌륭하지만, 그 표현의 미도 매우 훌륭하다. 제5행의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와 제6행의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의 대조와 조화의 표현은 더욱 미감을 자아내게 하고, 맨 마지막에서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그 자체를 직접 공중에 단 것같이 압축한 것은 매우 효과적인 싯적 표현이다. 또 이 마지막 3행의 표현에 나타난 감정은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이나 너무도 놀랍고 새롭고 훌륭하면 감탄하는 나머지 그것을 맨 처음 누가 창시하였는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 이곳에 잘 나타나 있다.
주제 : 이념을 위한 낭만적 향수.
울 릉 도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apt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공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감상 : 창망한 동해 위에 떠 있는, 조국의 한 점 혈육과도 같은, 작은 섬 울릉도의 외로움과 근심스러움과 귀여움을, 쾌적한 상상력과 세련된 언어로 표현해 낸 작품이다.
특히 이 시에서 이 작은 한 점 섬을 실감나게 또 아름답게 표현한 곳을 지적하면, 제 1연의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와 같은 곳들이다.
그리고 제5연에서 이 섬을 국가의 현실과 결부시킨 것은 이러한 작은 섬도 국토의 귀중한 일부로서 국가의 운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 애국적인 시상으로서, 이 시의 무게를 더하게 하고 있다.
주제 : 국토에 대한 낭만과 애정.
내 감상 : 실제 지명이나 실물을 내세우고 쓰는 글에서 흔히 보이는 감정을 내보이는 표현을 볼 수가 있다. 애국적인 모습을 보여야 시의 무게가 더해진다는 식의 평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춘 신 (春信)
꽃등인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끈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위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적은 길이여.
감상 : 유치환의 시는, 그 대부분이 관념과 의지의 표현으로서 선이 굵고 거칠기까지 하여 섬세한 맛이 적다. 그러한 결점을 한편으로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이, 가장 섬세한 감각과 언어로 이 시는 되어 있다.
특히 제2연의 제1,2 행의 표현도 좋지만, 제3연의 제1,2 행의 표현은 섬세하기론 실로 감각의 극치를 이룬 느낌이 들게 한다.
생 명 의 서
아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 ㅎ 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감상 : 이 작품은 이 시인의 초기의 시로서, 생명의 본연의 자태에 대한 추구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추구의 밑바닥에는 허무가 깔려 있다. 이 허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의 의의를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을 보면 이 생명의 추구는 끝내 해결되지 못하고, 생명의 본연의 자태야말로 허무임을 <드디어 알리라>와 ‘바위’ 같은 작품들에서도 고백하고 있다.
이 시는 그 사상면에 있어서는 매우 독자적이고 심각한 바가 있으나 그 표현면에서는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이 시뿐 아니라 이 시인의 대부분의 시가 보여 주는 약점이기도 하다. 그 약점이란 시의 표현이 너무 진술에 치우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의 표현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몇 곳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등등이다. 이러한 표현을 가리켜 진술적이라 지적할 수 있고 이러한 표현은 논설문에 적합하고 시의 표현으로서는 구체성이 없어 막연하게 되어 버린다.
주제 : 생명 추구의 몸부림.
내 감상 : 진술적의 표현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사상을 깊게 짚어낸 시라고 본다.
바 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감상 : 시작품에서는 그 작품 자체만을 분석하여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있으나, 그것 외에도 그 작품의 배후가 되는 그 시인의 사상 체계까지를 미리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아니 될 때가 있다. 가령 유치환의 작품들 가운데도 ‘깃발’이나 ‘춘신’ 같은 것은 단순히 그들 작품의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그 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시 ‘바위’는 서정이나 감각 위주의 그렇게 단순한 세계는 아니다. 이 시는 이 시인이 일생을 통하여 특수하게 포지하고 있는 ‘허무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다.
유치환의 시에는, 여러 가지 서정풍이나 감각적 색채의 작품들도 없지는 않으나, 그러나 이 시인의 중요한 시적 활동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독특하게 견지한 그의 허무주의를 표현 강조하는 데 있었다. 그가 발표한 ‘생명의 서’ ‘일월’ ‘드디어 알리라’ ‘바위’ 등 일련의 대표 작품들은 모두 이 허무주의의 인생관을 구상화한 작품들이다. 그 중에서도 ‘드디어 알리라’ 와 같은 작품은 이러한 그의 사상을 가장 솔직하고 명백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결론으로 그는 마지막 행에서 ‘드디어 허무 있음을 알리’라고 매듭지고 있다. 그러나 이 ‘드디어 알리라’를 읽어 보면 너무도 진술적 표현으로 산만하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바위’는 바로 그 소재인 바위와 같이 압축되고 견고하게 형상화 된 시다. 그러므로 이 시는 바위를 노래한 시라고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이 시에서 바위는 허무의 의지를 상징하는 적절한 사물 즉 소재로서 취급된 것뿐이다.
이 시 ‘바위’는 단순한 ‘허무’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허무의 의지 화’를 보여준 한층 강력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특히 이 시의 마지막 2행과 4,5,6,7행의 표현들에서 허무 사상의 응결체로서의 바위를 실감하게 된다. 눈물이 날 만큼 철저하고 견고한 허무 의지에 부닥치게 된다.
주제 : 허무에의 의지.
청마 유치환 1908 ~ 1967
호는 청마(靑馬)
1908 7월 14일 경남 충무시 태평동 출생
1922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도일하여 도오야마중학(豊山中學) 입학.
박명국,김거주,최두춘, 유치진과 함께 동인회 <토성>조직
1926 동래고보 편입
1927 연희전문 입학
1931 시 <정적>을 <문예월간>2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1937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장응두, 최상규 등과 함께 발행
1946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0 한국전쟁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조직
1957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에 피선
1967 2월 13일 윤화(輪禍)로 사망
* 의지의 시인, 생명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서정주와 쌍벽을 이루어 온 의지적 낭만주의 시인이었음.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청마시초> 청색지사 1939
시집 <울릉도> 행문사 1947
시집 <생명의 서> 행문사 1947
시집 <청령일기> 백자사, 행문사 1949
시집 <현대시집 II>(공저)정음사 1950
시집 <보병과 더불어> 문예사 1951
시집 <예루살렘의 닭> 산호장 1953
시집 <청마시집> 문성당 1954
시집 <제9시집> 한국출판사 1957
시집 <유치환시선> 정음사 1958
시집 <유치환시초> 신구문화사 1958
수필집 <동방의 느티> 신구문화사 1959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동서문화사 1960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평화사 1962
시집 <미루나무의 남풍> 평화사 1964
시집 <청마시선> 민음사 1974
시집 <깃발> 삼중당 1975
수필집 <나의 창에 마지막 겨울 달빛이> 문학세계사 1978
시집 <유치환> 한국현대시문학대계 지식산업사 1981
시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정음사 1984
시집 <기(旗)빨> 정음사 1984
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정음사 1984
시집 <깃발> 자유문학사 1987
시집 <마침내 사랑은 이렇게 오더니라> 문학세계사 1987
시집 <청마시집> 문학세계사 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