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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世家中
許 穆
智證王立하여 建國號曰新羅라하고 始稱王이라 立喪服制하고 除殉葬이라
지증왕이 즉위하여 국호를 정하여 신라라 하고, 처음으로 왕이라고 일컬었다. 喪服制度를 확립하고 殉葬을 없앴다.
定州郡縣이라 命有司하여 以時藏氷하고 敎牛耕하고 作舟楫이라 于山國降하고 獻土物이라 于山․悉直谷은 東海中小國으로 曰鬱陵이라 王卒하고 太子原宗立하니 是爲法興王이라
州·郡·縣의 제도를 정하였다. 有司에게 명하여 때맞추어 얼음을 보관하게 하고, 소를 이용해 밭 가는 법을 가르치고, 배를 만들게 하였다. 우산국이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과 실직곡은 동해 가운데의 작은 나라로 울릉이라고 한다. 왕이 졸하고, 태자 원종이 즉위하니, 이는 법흥왕이다.
* 실직곡(悉直谷): 《국역 동사강목》 제1하 임인년 8월 조에 지금의 삼척부(三陟府)라고 되어 있다. 옛날에 우산국이었던 울릉도와 관련이 없고 섬도 아니므로 기록상의 오류로 보인다.
* 법흥왕(法興王): 신라의 제23대 왕으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재위 514∼540).
王立하여 初置兵部令하며 頒律令하고 立官制하고 定服色七等이라 角干․大阿飡은 紫衣요 阿飡․級飡은 緋衣牙笏이요 靑黃衣․錦冠․緋冠․纓組에 有次라
왕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병부령을 두었으며, 율령을 반포하고, 관제를 확립하고, 복색을 7등급으로 정하였다. 각간과 대아찬은 ‘자주색 옷〔紫衣〕’, 아찬과 급찬은 ‘붉은색 옷〔緋衣〕’에 ‘상아홀〔牙笏〕’이고, ‘청색 옷〔靑衣〕’, ‘황색 옷〔黃衣〕’, ‘비단 관〔錦冠〕’, ‘붉은색 관〔緋冠〕’, ‘실로 짠 갓끈〔纓組〕’에 차등을 두었다.
* 角干․大阿飡 紫衣 阿飡․級飡 緋衣牙笏 靑黃衣․錦冠․緋冠․纓組 有次: 《국역 동사강목》 제3상 경자년 1월 조를 보면 각간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주색 옷에 상아홀이고 아찬부터 급찬까지는 붉은색 옷에 상아홀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상아홀은 각간부터 급찬까지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청색 옷은 대내마부터 내마까지, 황색 옷은 대사(大舍)부터 선저지(先沮知)까지, 비단 관은 이찬과 잡찬, 붉은색 관은 파진찬과 대아찬, 실로 짠 갓끈은 상당대내마(上堂大奈麻)와 적위대사(赤位大舍)가 착용한다고 되어 있다.
梁普通元年(520年)에 遣使通于梁하며 於是佛法始行이라 群臣皆曰 浮屠는 其言詭異하니 從其法이면 恐後悔라하되 王不聽하고 乃下令禁屠殺하다
양나라 보통 1년에 사신을 보내 양나라와 통교하면서 佛法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부도는 그 말이 괴이하니, 그 법을 따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마침내 令을 내려 도살을 금하였다.
駕洛國君仇衡降하니 駕洛亡이라 時天下分裂로 始稱年號曰 建元이라 王薨하고 弟立宗之子彡麥宗立하니 是爲眞興王이라 方七歲로 母太后聽政이라 改元開國하다
가락국의 군주 구형이 항복하니, 가락이 망하였다. 이때는 천하가 분열된 시기로 비로소 연호를 칭하여 ‘건원(建元)’이라고 하였다. 왕이 훙(薨)하고, 동생 입종의 아들 삼맥종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진흥왕이다. 나이가 겨우 7세였으므로 모태후가 聽政하였다. 연호를 ‘開國’으로 고쳤다.
* 時天下分裂: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말한다.
* 진흥왕(眞興王): 신라의 제24대 왕 (재위 540~576). 진흥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한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다. 북한산(北漢山, 555년)·창녕(昌寧, 561년)·황초령(黃草嶺, 568년)·마운령(摩雲嶺, 568년)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와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등은 당시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직제도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選童男良善하여 學孝弟忠信이라 以異斯夫로 爲兵部令하여 治兵事라 遣居漆夫하여 伐取句麗十郡하다 作浮屠百座하여 講會하고 立八關法이라
어질고 착한 어린 남자아이를 뽑아 효제와 충신을 가르쳤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거칠부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여 10개 고을을 취하였다. 부도 100좌를 만들어 강회를 열고, 팔관법(八關法)을 세웠다.
百濟ㅣ 與新羅로 謀伐句麗로되 王不聽하다 句麗ㅣ 德之하여 與新羅連和하니 百濟王明禯ㅣ 親帥衆하여 攻新羅管山이라 軍主武力이 擊殺王하고 斬佐平四人하다 卒二萬九千六百에 士卒無還者라
백제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모의를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가 덕이 있다고 여겨 신라와 연합하니, 백제 왕 명농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의 관산을 공격하였다.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백제 왕을 격살(擊殺)하고 좌평 4인을 참살(斬殺)하였다. 졸병 2만 9600명 중에 살아서 돌아간 사졸이 없었다.
* 이사부(異斯夫):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정치가. 병부령(兵部令)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국사 편찬을 제안하여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강 상류지역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신라의 국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 팔관법(八關法): 진흥왕(眞興王) 초, 지금으로부터 1360여 년 전에는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다가 법사 혜량(惠亮)을 귀화시켜 승통(僧統)으로 삼고,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음란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음주하지 말 것,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 것, 몸에 꽃 장식을 하거나 향을 바르지 말 것,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스스로 즐겨 보거나 듣지 말 것. 관(關)은 폐(閉)니 여덟 가지 죄를 금한다는 것이다.)을 베풀었다. 또한 승려 각덕(覺德)을 양(梁)나라에 보내 부처의 사리를 구해 오니 이후부터 진(陳)나라, 수(隋)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하는 자가 많아졌다.
異斯夫ㅣ 又滅大伽倻라 先是伽倻政ㅣ 亂하니 樂師于勒이 以樂器來奔이라 館於國原하여 命知法․階古․萬德하여 傳伽倻十二曲하고 于勤은 作十二絃琴하고 又作玄琴이라 於是에 徙貴戚大姓六部豪傑於國原하고 以爲小京이라
이사부가 또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에 앞서 가야의 정치가 혼란해지니, 악사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도망 왔다. 국원에 관사를 정하여 머물게 하고, 지법(知法), 계고(階古), 만덕(萬德)에게 명하여 가야 12곡을 전수받게 하였다. 우륵이 12현금을 만들고 또 현금을 만들었다. 이에 귀척(貴戚)의 대성(大姓)과 육부의 호걸들을 국원으로 옮겨 살게 하고, 국원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忠州)이다.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신라에서 빼앗아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충주목》
* 지법(知法): 《국역 동사강목》 제3상 신미년 1월에는 ‘대내마 법지(法知)’로,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충주목〉에는 ‘주지(主知)’로 되어 있어 각각 다르다.
許度僧하고 廣興佛寺하여 作皇龍寺하고 鑄鐘重三萬五千斤이라 改元弘濟하다 異斯夫ㅣ 言於王하여 命大阿飡居漆夫하여 招文學하여 作國史라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불사를 널리 일으켜 황룡사를 짓고, 3만 5000근의 무게가 나가는 종을 주조하였다. 연호를 ‘홍제’로 고쳤다. 이사부의 건의로 왕이 대아찬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학하는 사람들을 초빙하여 국사를 저술하게 하였다.
* 허도승(許度僧): 국가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한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도(度)는 ‘건너다〔渡〕’는 뜻으로,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 바라밀(波羅蜜) 즉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데, 세속을 떠나 출가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관에서 출가한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지급하여 승려의 자격을 인정하였는데, 도첩을 받아 인정된 승려를 도승이라고 한다.
* 거칠부(居柒夫, 居漆夫, 거칠마로): 6세기 중엽 신라의 학자ㆍ장군. 성은 김씨, 내물왕의 5대손. 처음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유랑하다가 고구려에 입국, 혜량(惠亮)께 불경을 드렸다. 귀국 후 왕명을 받고 신라의 《국사(國史)》를 편찬(545 : 진흥왕 6)했다(인멸됨). 551년(진흥왕 12) 장군으로서 고구려의 서울 평양을 치고 공을 수립, 576년(진지왕 1) 상대등(上大等)이 된 후, 78세로 사망했다.
王山岳이 得七絃琴하여 變其制하고 命曰玄琴이라 有玉寶高者하여 作三十曲하여 傳之續命得하고 續命得이 傳之貴金하고 貴金이 傳之安長하고 安長이 傳其子克宗하며 克宗이 作七曲이라 克宗之後로 傳羽調․平調共百八十七曲이라 作鄕琵琶한데 宮調․七賢調․鳳凰調ㅣ 共二百一十二曲이라
왕산악이 칠현금을 얻어 그 제도를 변경하고 ‘현금(玄琴)’이라고 명명하였다. 옥보고가 30곡을 지어서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이 귀금(貴金)에게 전하고, 귀금이 안장(安長)에게 전하고, 안장이 자기 아들 극종(克宗)에게 전하였으며, 극종이 7곡을 지었다. 극종 이후로 우조(羽調)와 평조(平調)를 합하여 모두 187곡이 전한다. 향비파(鄕琵琶)를 만들었는데, 궁조(宮調), 칠현조(七賢調), 봉황조(鳳凰調)를 합하여 모두 212곡이다.
* 王山岳이 得七絃琴: 왕산악은 당시에 제2상(第二相)으로, 진(晉)나라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개조하여 육현금으로 만들어서 연주하였는데,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그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고, ‘학’ 자를 생략하여 ‘현금’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국역 동사강목 제5상 병술년 10월》
* 향비파(鄕琵琶): 신라 삼현, 즉 거문고, 가야금, 비파의 하나이다. 향비파는 울림통 위에 5개의 줄이 12개의 괘에 얹혀 있다.
王ㅣ 幼而立하여 尊信浮屠한데 立三十七年에 剃髮爲僧하여 號法雲하고 妃爲尼라 立其子金輪하니 是爲眞智王이라 薨하고 故太子銅輪之子伯淨立하니 是爲眞平王이라 改元建福하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부도를 존숭하고 믿었는데, 즉위한 지 37년에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법호(法號)를 법운(法雲)이라고 하고, 왕비는 비구니가 되었다. 아들 금륜(金輪)을 세우니, 이 사람이 진지왕(眞智王)이다. 훙하고, 죽은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伯淨)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진평왕(眞平王)이다.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고쳤다.
* 진지왕(眞智王): 신라의 제25대(재위:576~579) 왕.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며,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 진평왕(眞平王): 신라의 제26대 왕(재위 579∼632). 성은 김(金)이고 이름[諱]은 백정(白淨)이다. 시호는 진평(眞平)이며, 건복(建福, 584~633)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따서 ‘백정왕(白淨王)’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王好獵이라 伊飡后稷諫이나 王不聽이라 后稷死에 謂其子曰 葬我於田獵之途하라 冀王之悟心이라한데 後에 王ㅣ 問其塚泣曰 生而諫하고 死而不忘君하니 忠臣義也라하고 終王之世히 不復出獵이라
왕이 수렵을 좋아하였다. 이찬 후직(后稷)이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기 전에 자기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사냥하는 길가에 장례하라. 이렇게라도 해서 왕이 마음을 깨우치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나중에 왕이 누구의 무덤인가를 묻고, 울며 말하기를, “살아서 간하고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충직한 신하의 의리이다.” 하고, 왕이 종신토록 다시 수렵을 나가지 않았다.
置禮部하여 令掌禮式하고 調府하여 令掌貢賦하고 乘府하여 令掌車乘이라 大水하여 沒民戶三萬三百六十이라 發粟賑之하다
예부(禮部)를 두어 예식(禮式)을 관장하게 하고, 조부(調府)를 두어 공부(貢賦)를 관장하게 하고, 승부(乘府)를 두어 거승(車乘)을 관장하게 하였다. 큰 홍수가 나 민호(民戶) 3만 360호가 잠겼다. 곡식을 풀어 진휼하였다.
隋開皇十四年(594年)에 冊王爲樂浪郡公新羅王이라 唐武德元年(618年)에 遣使入貢于唐하니 帝ㅣ 勞問使者하고 遣使報聘하여 賜璽書․彩錦三百純(돈)하고 冊封爲王이라
수나라 개황 14년에 왕을 책봉(冊封)하여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당나라 무덕 1년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니, 황제가 사신의 노고를 치하하고, 답례로 사신을 보내 새서와 채색 비단 300돈을 하사하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百濟ㅣ 攻西鄙하여 拔二城하고 大出兵屯熊津이라 遣使如唐乞救한데 百濟使者ㅣ 適至하니 帝以璽書責諭하고 令毋相侵伐이라 百濟乃止라 然相仇如故矣라
백제가 서쪽 변방을 공격하여 두 성을 함락하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출동하여 웅진(熊津)에 주둔하였다. 사신을 보내 당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백제의 사신이 마침 이르자 황제가 새서로 꾸짖어 유시(諭示)하고 서로 침략하지 말도록 하였다. 백제가 이에 공격을 멈추었으나 서로 원수로 지내는 것은 여전하였다.
王이 遣末利․舒玄하여 伐句麗라가 不利에 舒玄子庾信이 率精兵擊破之하여 拔狼臂하다
왕이 말리(末利)와 서현(舒玄)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형세가 이롭지 못하자 서현의 아들 유신(庾信)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격파하여 낭비(狼臂)를 함락하였다.
* 말리서현(末利舒玄): 《국역 동사강목》 제3하 기축년 8월 조에 “왕이 이찬(伊湌) 임말리(任末里)ㆍ소판(蘇判)ㆍ대인(大因),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ㆍ백룡(白龍)ㆍ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말리는 이찬 임말리이고, 서현은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이다.
貞觀六年(632年)에 王薨이라 無子하여 國人立其長女德曼하니 是爲善德王이라 改元仁平하다 問國內鰥寡孤獨하다 唐冊命女主하여 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이라
貞觀6년에 왕이 훙하였다.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장녀 덕만(德曼)을 세웠으니, 이 사람이 선덕왕(善德王)이다.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쳤다. 나라 안의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지내는 노인을 위문하였다. 당나라가 여주(女主)를 책봉하여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삼았다.
* 선덕왕(善德王): 신라 제27대 임금. 재위 기간 632년~647년. 성(姓)은 김(金), 휘(諱)는 덕만(德曼), 호는 성조황고(聖祖皇姑)임. 진평왕의 맏딸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함.
王宮西玉門池에 有蝦蟆大集하니 主曰 蝦蟆는 兵像也라 南邊谷玉門에 意有兵하리니 遣兵擊之라한데 果有百濟潛師하여 欲襲邊邑이라 急擊盡殺之하니 七重南大石이 自移라 遣子弟入學於唐하다
왕궁 서쪽에 있는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잔뜩 모여들었다. 여주가 말하기를, “개구리는 전쟁을 상징한다. 남쪽 변방 골짜기의 옥문에 아마도 병사가 있을 것이니, 군사를 보내 그곳을 치라.” 하였는데, 과연 백제의 매복한 군사가 있어 변방 고을을 습격하려고 하므로 급히 쳐서 모두 죽였다. 칠중(七重) 남쪽에 있는 큰 돌이 저절로 옮겨졌다. 자제들을 당나라로 보내 입학시켰다.
* 칠중(七重): 지명으로, 《국역 동사강목》 제3하 무술년 3월 조에 ‘칠중성(七重城)’으로 되어 있고,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라고 주가 달려 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 적성현〉에는 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중성(重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적성현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百濟王義慈ㅣ 親率兵하여 伐取獮猴四十餘城하고 又與句麗로 伐取黨項하여 以絶唐路라 主告急於唐하고 欲伐百濟하여 遣伊飡春秋하여 乞師於句麗라
백제 왕 의자(義慈)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미후성(獮猴城) 등 40여 개의 성을 쳐서 취하고, 또 고구려와 함께 당항(黨項)을 쳐서 취하여 당나라와 교역하는 길을 끊었다. 여주가 당나라에 급보(急報)를 고하는 한편, 백제를 치려고 이찬 춘추(春秋)를 보내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게 하였다.
初大野之役에 品釋死而其妻從而死한데 春秋女也라 春秋將行에 誓庾信曰 六十日不還이면 請於王하여 伐句麗라한데 至則無出兵意하여 迺曰 二嶺之地는 本我地라 地不還이면 兵不出이라 春秋曰 百濟無道하여 寡君仗大國之威하여 欲伐罪하여 使下臣으로 致命於下執事한데 無意出兵하고 劫人還地하시니 臣有死而已라하니 王怒而囚之라 春秋ㅣ 已六十日不還하니 庾信請於王하고 募戰士三千人하여 將伐句麗하니 句麗聞之하고 厚禮春秋以歸하다
처음에 대야(大野)의 전투에서 품석(品釋)이 죽고, 그의 처도 따라서 죽었는데, 그의 처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떠나기에 앞서 유신에게 다짐하기를, “60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왕께 청하여 고구려를 치시오.” 하였다. 고구려에 도착하고 보니, 출병(出兵)할 뜻은 없고 도리어 말하기를, “두 고개의 땅은 본래 우리 땅이다.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출병하지 않겠다.” 하였다. 춘추가 말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우리 임금께서 대국의 위세에 의지하여 그 죄를 정벌하고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하집사(下執事)에게 명을 드리게 한 것인데, 출병할 뜻은 없고 사람을 겁주어 땅을 돌려 달라 하시니, 신은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자,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춘추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이 왕에게 청하고 전사(戰士) 3000명을 모집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하자, 고구려가 그 소식을 듣고 춘추를 후하게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使者至唐한데 太宗은 已先有東伐之意라 至是하여 帝ㅣ 親征句麗에 主ㅣ 發三萬衆하여 助攻句麗라 百濟ㅣ 以新羅空國助王師하여 襲取西鄙七城하니 遣庾信하여 伐百濟라 貴臣毗曇․廉宗이 擧兵하여 欲廢女主한데 庾信ㅣ 還擊斬之하다
사신이 당나라에 도착하였는데, 태종(太宗)은 벌써 먼저 동쪽을 정벌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황제가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자 여주가 3만의 무리를 일으켜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신라가 나라를 비우고 왕사(王師)를 도우러 간 틈을 타 서쪽 변방을 습격하여 7개의 성을 취하니, 유신을 보내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귀신(貴臣) 비담(毗曇)ㆍ염종(廉宗)이 거병(擧兵)하여 여주를 폐위하려고 하였는데, 유신이 돌아와 그들을 쳐서 참수하였다.
作瞻星臺라 主薨하고 立其母弟國飯之女勝曼하니 是爲眞德王이라 長七尺이요 垂手過膝이라
첨성대(瞻星臺)를 지었다. 여주가 훙하고, 동모제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을 세우니, 이 사람이 진덕왕(眞德王)이다. 키가 7척(尺)이고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主遣庾信하여 伐百濟라 拔十二城하여 斬首二萬級하고 獲九千人하며 又屠九城하여 斬首九千級하고 獲六百人하고 曰報大野之役也라 百濟ㅣ 歸品釋及品釋之妻之骸骨於新羅라
여주가 유신을 보내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12개의 성을 함락하여 2만 명의 수급(首級)을 베고 9000인을 사로잡았으며, 또 9개의 성을 도륙하여 9000명의 수급을 베고 600인을 사로잡았다. 명분을 대야의 전투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였다. 백제가 품석과 품석의 처의 유골을 신라에 돌려주었다.
主ㅣ 遣伊飡春秋如唐이라 太宗ㅣ 見春秋狀貌環偉하고 禮接之甚厚하고 從容問欲有言乎아
對曰 百濟恃強하고 侵伐小邦數十城하여 絶朝貢之路라 陛下ㅣ 不借天威면 小邦無所述職이니다
여주가 이찬 춘추를 당나라로 보냈다. 당나라 태종이 춘추의 외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예로써 대우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고, 조용히 묻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소?” 하니, 대답하기를, “백제가 강함을 믿고 소방(小邦)의 수십 개 성을 침략하여 조공(朝貢)의 길을 끊었습니다. 폐하께서 천자의 위엄을 빌려주시지 않으면 소방이 술직(述職)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 술직(述職):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제후가 천자에게 조회하는 것을 술직이라고 한다.” 하였다.
太宗이 命將軍蘇定方하여 出兵二十萬人하여 征百濟라 春秋ㅣ 觀太學하고 請章服而歸라 用永徽年號하고 定百官冠服하다
태종이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 인을 출동시켜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춘추가 태학(太學)을 관람하고 장복(章服)을 청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영휘(永徽) 연호를 쓰고, 백관의 관복(冠服)을 정하였다.
* 장복(章服): 장문(章文)이 장식된 의복. 황제·왕·문무백관이 착용한 제복(祭服)에 장문을 장식했다. 황제나 왕은 제복으로 면류관에 곤복(袞服)을 입었는데 곤복에 장식한 문양의 수에 따라 품급이 다르다.
主ㅣ 作太平頌하여 織錦獻之라
여주가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수로 놓아 바쳤다.
永徽五年(654年)에 主薨이라 群臣이 迎立春秋하니 是爲太宗武烈王으로 眞智孫也라
영휘 5년(654)에 여주가 훙하였다. 뭇 신하들이 춘추를 맞이하여 세우니, 이 사람이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으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