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 채영숙은 아이를 키우면서 교사 생활을 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챙기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이 여간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손녀를 돌보아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채영숙은 아이를 위해 가정부를 쓰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채영숙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일하는 가정부에게는 월급의 3분의 1을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마침 학교에서는 명퇴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여자 교사들은 비싼 돈을 들여 가정부를 쓰기보다는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는 것을 선호했고, 남자 교사들도 명퇴하고 과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채영숙은 학원을 운영하는 남편이 생활비를 책임지게 되면서 퇴직하여 아이를 키우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백성남은 10년 가까이 사명감으로 수강생들을 지도하며 많은 보람을 느끼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차츰 대학입학 전형에서 논술을 폐지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전문가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처음 논술을 도입할 때는 학생들의 인성을 계발하고 변별력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었으나 논술도 차츰 일반과목처럼 학원의 틀에 박힌 지도를 받으면서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나름대로 독창적인 지도를 해온 백성남의 글쓰기 교실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서울의 명문대학들이 논술을 폐지하거나 반영비율을 낮추게 되자 다른 대학의 입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성 계발이나 건전한 비판 안목을 기른다는 처음의 목적은 빛을 잃게 되었다. 백성남은 소수의 일반인 지도만으로 학원을 지탱할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학원을 운영하는 동안 백성남은 자기 글−작품을 전혀 쓰지 못했다. 그는 이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작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싶었다.
본격적인 글쓰기로 돌아온 백성남에게는 불편한 점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집필 습관은 늦은 밤이나 새벽녘의 시간을 주로 이용했다. 어떨 때는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때로는 아내가 새벽잠을 고이 자는 시간에 원고지를 대해야 하는 어려움도 따랐다.
“여보, 집필실이 따로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어느 날 백성남이 말을 꺼냈다.
“여유가 있으면 오피스텔이나 원룸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형편에 그럴 수도 없고······.”
채영숙은 그렇지 않아도 거의 매일 잠자리에서 서로가 겪는 불편을 해소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입을 앞둔 지현이 방을 어떻게 할 수는 없고, 드레스 룸으로 쓰는 뒷방을 정리해서 내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백성남은 하나의 방안을 제시했다. 조그만 뒷방에는 장롱과 책장과 여러 가지 집기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책상 하나 놓을 자리도 없었다.
“지금도 겨우 옷을 갈아입는 것 외에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는 데······.”
채영숙은 좁고 어두컴컴한 방이 집필실로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그녀는 큰방(안방)을 남편이 서재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책장은 모두 큰방으로 옮기고 침대는 싱글로 하나씩 따로 사용하기로 했다. 채영숙은 남편이 여건만 마련되면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쓰고 인세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가구와 책장을 옮겨 정리하는 일은 이사하는 일 못지않았다. 큰방은 두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베란다 쪽으로는 책상을 비치하고 나머지 공간에는 싱글 침대를 놓았다. 한편으로 자청해서 뒷방으로 들어간 채영숙은 흡사 피난살이 같았다. 좁은 자리에 침대를 놓고 보니 화장대를 놓을 위치도 만만치 않았다. 뒷방은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남편의 집필을 돕기 위해 이 모든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집필실을 마련하고부터는 딴방 거처가 시작되었다. 잠자리만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활이 따로였다. 남편이 글쓰기에 몰두하다 보니 식사하는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여보−!”
채영숙은 아침 식탁을 차려놓고 남편을 부른다.
“응−.”
방문이 닫힌 상태에서 남편의 말이 희미하게 들린다. 한참을 기다리다 방문을 열고 “여보−!” 하면, 책상을 마주한 남편은 “응−,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일찍 일어나 고3인 딸의 아침밥을 차려주고 나면 남편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진다. 저녁 식사 후 채영숙의 유일한 낙인 TV 연속극을 보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조금만 소리가 커도 “여보 볼륨 좀 낮추세요!” 하는 소리가 안방에서 울려 나온다. 음악 프로그램은 음향을 조금 올릴 필요가 있어도 가느다랗게 이웃집의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볼륨울 줄여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남편의 집필실을 바깥에 따로 마련해주고 싶지만 생각뿐이었다. 결혼할 때까지 존경스럽고 우아하게 보이던 남편상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부부간의 대화도 점점 길을 잃었다.
낮에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잠자리에서라도 도란도란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채영숙에게는 그런 시간이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다 남편에게 할 얘기가 있어 방문을 열면 그녀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돌아보지도 않고 “응−, 알았어!”라고 무의미한 대답을 날릴 뿐이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가? 어떨 때는 한밤중에 전자레인지 소리가 들린다. 디지털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편이 차를 한잔하며 간식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날은 아침 식사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고 꿈길을 헤맨다. 다른 이들은 나이가 들어 둘이 살게 되면 남편이 아내의 심부름도 해주고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라도 해준다는데 이 양반은 해놓은 밥도 제때 먹어주지 않으니―. 남편은 해거름이 되면 반드시 산책에 나선다. 채영숙이 공원에 갈 때면 부부가 나란히 걸으며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부럽다. 그러나 남편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시간에 산책을 나서기 때문에 채영숙은 동행할 수도 없었다.
어느 포근한 3월 초순 남편을 졸라서 오랜만에 이기대 해변공원 산책에 나섰다.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모습은 마치 외국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운치가 있었다. 파도가 치는 해변 길은 추위를 느낄 만큼 싸늘했다. 옷을 엷게 입은 여인들 가운데는 남편이 벗어준 윗 저고리나 코트를 걸치고 걸었다. 채영숙은 짐짓 “여보, 좀 춥네−!” 하고 윗옷을 벗어줄까, 기대해 보지만 남편은 오히려 아웃도어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자기 옷을 여몄다. 아내보다 추위를 더 타는 백성남은 옷을 벗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옷을 벗어 달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날씨가 차면 남편은 감기가 잘 들기 때문이다. 남편의 식성을 맞추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남편은 조금 짜든지 싱겁든지, 양이 좀 많든지 적든지, 다른 말 하지 않고 식사를 잘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짠 것에 민감했다. 채영숙은 결혼하여 오늘까지 남편의 식성을 맞추느라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식탁에서 남편은 숟가락을 앞뒤로 뒤집어가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어쩌다 조그만 물방울이 말라붙은 흔적이 있어도 크리넥스로 깨끗이 닦고 식사를 한다. 채영숙은 낮에도 밤에도 집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지난해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몇 차례나 남편을 졸라 오후에 CGV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가장은 여러 사업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가족은 모두 백수가 되어 있었다. 장남 기우는 친구가 소개해준 고액과외 면접을 위해 박 사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두 가족의 만남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아슬아슬한 사건으로 이어지며 관객을 사로잡고 있었다. 채영숙이 옆을 돌아보니 남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가늘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씩 남편 방문을 열어보면 일찍 잠들어 있거나 때로는 밤새 방에 불이 꺼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남편은 지금쯤 자는가 하면 깨어있고, 깨어있는가 하면 자고 있었다. 남편의 생활패턴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밤새워 작품에 몰두하는 사람을 영화관으로 끌고 온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남편과 함께 자주 외식도 하고 국내외 여행을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채영숙은 부끄러워 화제를 얼른 다른 데로 돌렸다. 신혼여행 때 괌을 여행한 후에 해외여행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외여행은커녕 남편과 함께 국내여행을 해본 기억도 아득하다. ‘작가’란 이름이 얼마나 낭만적이며 멋이 있는가? 채영숙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남편을 통해서라도 이루어보려고 기대했던 지난날이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남편은 친구들로부터 모임 연락을 받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나간다. 밤늦게 대리운전으로 귀가할 때는 어김없이 만취 상태 인사불성으로 돌아온다. 채영숙이 기대했던 젊을 때의 꿈은 일종의 허영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남자다움의 배려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구태여 한 가지 장점을 들라면 집안청소를 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소할 때면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에까지 잔소리를 확대한다. 채영숙은 은혼식이 가까워지기까지 이런 삶을 반복해왔다. 그녀는 뒤늦게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택당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들어 채영숙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연초부터 갑자기 코로나19가 만연해가면서 친구들 모임이나 라인댄스, 합창 등 취미생활은 올스톱이었다. 게다가 가정에 대한 애착이나 삶에 대한 의욕조차 빠져나가 그녀의 가슴은 늘 허전했다. 새삼 결혼이란 이런 것인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날의 기대감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남편 치다꺼리만 하다 노년의 어귀에서도 그와 같은 삶이 반복될 것을 생각하니 남은 세월이 아득했다. 백성남과는 여생을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여보, 소설집을 하나 출판해야 겠는데······.”
백성남이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은 지난해 봄이었다.
“당신 책 출판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채영숙은 꺼져가는 기대감을 되살렸다. 그것이 아내의 도리라 생각했다.
백성남은 서울의 유명출판사 일곱 곳에 차례로 원고를 보냈으나 어디에서도 채택되지 않았다. 그녀는 특별한 인기 작가가 아니고는 기획출판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을 묵혀둘 수는 없잖아요.”
채영숙은 생활비를 줄여 남편의 소설집을 출판하도록 격려했다. 책을 출판하고 해가 바뀌었으나 오늘까지 독자들의 반응은 잠들어 있었다. 채영숙은 지천명에 접어들면서 인생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조금씩 돈을 모아 여행이나 취미생활을 즐기며 삶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면 인생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남편이 유명작가 이거나 가정적인 성품을 갖지 못했다 할지라도 아내가 춥다면 자기의 겉옷을 벗어주기라도 하는 남자다움을 갖췄다면……. 남편은 그녀가 기대하는 바를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보, 이렇게 마음이 갑갑한데 우리도 이달 말께 나들이를 한번 해보면 좋겠네요,”
채영숙은 식사를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 남편에게 말했다. 5월 28일은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때쯤이면 시간이 좀 날 것 같아.”
백성남은 2년째 계속 쓰고 있는 장편소설의 마무리 퇴고가 5월 말이면 끝날 것 같았다. 채영숙은 평소에도 혼자서는 나들이를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면 어디든지 혼자서 차를 몰고 나갔으면 싶어도 면허를 취득하지 못한 것이 늘 후회스러웠다.
“당신이 가자는 곳, 가려는 곳은 어디든지 태워다 줄거야. 운전면허는 한 집에 한 사람만 갖고 있으면 충분해.”
그녀가 면허를 취득하려 할 때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백성남은 기계를 만지는 것이 서툴고 길눈이 어두운 아내의 안전을 생각해서 면허취득을 만류했다. 채영숙은 남편의 말을 순순히 따른 것이 생각할수록 후회스러웠다. 길눈이 어두워도 내비게이션이 생겨났고, 교통법규를 지키고 서두르지만 않으면 교통사고는 예방할 수 있다고 친구들은 말했다. 채영숙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에게 순치되어왔다. 이제는 채영숙도 한계를 느꼈다. 남편은 요즘은 더더욱 아내의 기분은 아랑곳없기에 그녀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남편이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에 자기를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