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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차츰 주변의 작은 가게들이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꿔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짬을 내어 저녁 무렵 친구들과 인사동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그곳에 갈 때마다 느꼈던 바이지만, 더 이상 그곳은 2~30년 전 내 기억 속의 모습과는 너무도 변해있었다. 하기야 대학 다닐 무렵부터 10년 넘게 살았던 중앙일보 뒤편의 순화동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빌딩들이 꽉 들어찬 모습으로 바뀐 지도 오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서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도 끝자락의 소도시인 순천 역시 내가 처음 정착을 했던 10여 년 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특히나 대규모 프랜차이즈 마트에 밀려 골목골목에 위치했던 구멍가게들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며, 음식 맛이 좋아서 한동안 단골로 다녔던 식당들도 문을 닫거나 주인과 업종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시대에 ‘백년’을 목표로 꾸준히 영업을 하는 가게들의 존재는 정말 소중하다고 하겠다. 자신의 가게를 지키려는 뚝심과 영업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견지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은 서울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지키며 영업을 해온 이른바 ‘백년가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 백년가게>라는 책은 기자 출신인 저자가 신문에 연재했던 것을 고치고 엮은 것이라고 한다.
흔히 ‘백년’은 사람의 한평생을 일컫는 기간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딱히 정해진 숫자를 채웠다는 의미보다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골목 구석구석에 숨은 장안 최고의 가게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에 존재하는 역사가 오래된 가게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성공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여기에 소개된 가게들 가운데는 서울에 살면서 즐겨 찾았던 곳도 있으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곳도 있어 나중에라도 한번쯤 찾아가고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는 여러 대를 이어서 후손들이 가게를 운영하기도 하고, 연고가 없는데도 가게를 지켜줄 뜻있는 사람을 찾아 운영을 맡긴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가게 운영의 확고한 철학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전체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모두 24곳의 오래된 가게들이 소개되어 있다. 업종도 식당과 카페를 비롯하여 양복점과 대장간 등 매우 다양하다. 1장에는 ‘백년 동안 이야기되는 가게’라는 제목으로 모두 8개의 가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김민기라는 걸출한 아티스트가 바로 떠오르는 대학로의 ‘학림다방’과 서울식 추탕으로 유명한 ‘용금옥’, 그리고 평양식 냉면의 ‘을밀대’나 서울 부대고기 집의 원조로 알려진 ‘황해’ 등은 나에게도 익숙한 가게들이었다. 하지만 오래된 고택을 고쳐 재탄생한 ‘보안여관’과 음반과 고서적을 판매하는 ‘클림트’, 그리고 대를 이어 양복을 만드는 ‘신사복 청기와’와 쇠를 다루는 ‘동명대장간’ 등은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된 가게들이었다. 젊은 시절 서울을 자주 왕래할 때 시간이 나면 헌책방에 들러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사곤 했던지라, 나중에라도 회현 지하상가에 있다는 ‘클림트’에는 꼭 들러보리라 마음을 먹기도 했다.
‘백년의 고집이 묘수가 되다’라는 제목의 2장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는 품목을 고집하는 8곳의 가게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점차 외국 관광객들의 명소로 변해가는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구하산방’과 ‘인예랑’은 여전히 문방사우를 팔고 도장을 새기는 곳이라 한다. 신촌사거리에 위치한 ‘홍익문고’는 재건축의 유혹을 뚫고 서점으로서의 명맥을 지키고 있으며, 이제는 사람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진 피마골에 있던 ‘열차집’은 장소를 옮겨 새로운 주인이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안동국시로 유명한 ‘소호정’과 아직 간판조차 달지 않고 운영하는 ‘비원떡집’, 그리고 직접 빵을 만들어 파는 ‘동부고려제과’와 수제 커피를 고집하는 신촌의 ‘미네르바’ 등은 가게 운영자들의 뚝심으로 지속되고 있는 가게들이다.
마지막 3장은 ‘또 한 번의 백년을 기다리며’라는 제목으로, 여전히 자신들의 가게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8곳의 가게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재즈클럽이라는 ‘올댓재즈’와 가장 오래된 이태리 식당으로 알려진 ‘라 칸티나’, 그리고 금천구에 위치한 중국요리집인 ‘동흥관’은 기회가 주어지면 꼭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이제는 스트리밍으로 음악이 소비되는 시대이지만 , 여전히 LP를 취급하는 ‘돌레코드’도 마니아들에게는 정말 보물 창고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종로의 ‘브람스’는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장소인데,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친구들과 약속을 정하면 복잡한 종로통을 떠나 이곳에서 만나곤 했다. 이 집의 역사가 1985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와 친구들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 이밖에도 ‘낙원악기상가’와 정동의 ‘세실극장’은 과거에 간혹 시간을 때우거나 연극을 보러 다녔던 곳이다. 또 미스코리아의 산실이라고 알려진 ‘마샬미용실’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제는 서울을 떠나 살고 있기에, 실상 서울에 갈 기회가 있어도 이 책에 소개된 가게들을 찾아다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오래된 가게의 존재는 새롭게 가게를 시작한 젊은 장사꾼에게 하나의 훌륭한 비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그곳을 운영하는 주인들의 의지와 철학이 전해져 자영업자들에게 하나의 전범으로 여겨지기를 기대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한 가게의 주인들은 앞으로도 뚝심 있게 보다 오래토록 영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비록 ‘백년’이라는 시간을 꽉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영업을 지속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지고 오래토록 이야기될 수 있는 가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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