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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4번 말씀
제목 : 십자가에 의해 여자가 아들을 낳다
본문 : 요 19:25-30, 20:1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아멘.
지난주에는 십자가 위에 강도들과 십자가 아래에서의 군병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를 공부했죠? 이번 주에도 역시 십자가 아래에서의 그 사건을 하나 더 열어봄으로 해서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공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6절을 보시면요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다소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오죠? 예수님에게 분명 친동생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세요. 그죠? 생각해보자고요. 그 이후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자식들이 어머니 마리아를 전혀 돌보지 않았을까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전혀?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사도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고 계시는 걸까요? 게다가 성경은 그때부터 마리아가 요한의 집에 가서 살았다, 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어요. 한 가족이 깨지고 한 가족이 새로 탄생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교회의 탄생을 에둘러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육적 관계를 매듭짓고 새로운 영적 가족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적 동생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 요한을 마리아의 아들로 연결을 시키는 거예요.
바로 이런 현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막 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부터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가치라고 정해놓은 것들을 끊어내는 자로 살게 된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가치 셋을 꼽으라고 그러면 뭐뭐뭐가 있을까요? 돈, 명예, 가족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사람들이 가치라고,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에요. 인간들의 그 내편을 향한 집요한 사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말이 내편이지 결국 내편은 나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에요. 내편은 수시로 바뀌어요. 마을 대항 축국 경기에서 내편은 우리 마을 사람이지만 도 대항 경기에서는 그 사람들이, 적이었던 이들이 다 내편이 되잖아요? 내편은 수시로 바뀌어요. 근데도 그 내편에 내가 목숨을 걸어요. 그 내편이 바로 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가족, 마찬가지에요. 그게 내 존재의 Extension 이에요.
그러한 집요한 자기 사랑의 도구와 방편들이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라는 검에 의해서 하나, 하나 잘려나가는 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들에게 새로운 어미가 백배. 새로운 자식이 백배, 새로운 전토가 백배 이생에서 주어진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라 그랬습니까? 어머니가 백 명 생겨요?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교회로써의 새로운 가족이 그렇게 풍성하게 나에게 생긴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아버지만 빠진 거라 그랬죠? 아버지는 누구? 하나님 아버지니까. 거기에서 딱 아버지만 빠져 있잖아요, 아비만 그죠? 아비만 백배로 안 줘요.
마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34절에 ‘검을 주다’, 내가 검을 주러 왔다, 그 검을 주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발레인 마카이란 뜻인데요, 발레인이라는 그 단어는 격렬하게 던지다, 격렬하게 찌르다, 라는 뜻이에요. 격렬하게 던지다, 격렬하게 찌르다. 마카이라는 칼, 전쟁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칼과 전쟁을 던지러 오셨다, 라는 거예요. 그것도 격렬하게. 여기에서의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에서의 그 세상이에요. 하나님과 반대편에 있는 그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세상에게 자기들끼리 원수가 되게 그런 일을 하게 이 땅에 보낸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 이 세상 중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과 함께 멸망할 뻔했으나 그 세상에서 건져진 세상. 그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에서의 세상이에요. 요한복음에서는 항상 세상이 두 가지로 구분되어서 표현된다, 그랬잖아요? 하나는 하나님의 대적들의 세상, 대적들로써의 세상. 하나는 그렇게 세상에 속해있었으나 구원받은 세상. 여기의 세상이 그 세상이에요. 하나님의 교회. 세상이었던 하나님의 교회에 예수님이 검을 던지러 왔어요. 격렬하게 집어 던지러 왔단 말입니다. 검과 전쟁.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요?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된대요. 근데 이 웬수들은 예수도 안 믿는데 왜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화를 하는 거예요? 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되게끔 예수님이 검을 던지러 왔대요. 그 말은 그 관계, 인간들이 힘으로 갖고 있는 관계는 끊어내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러 오셨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힘으로 주신 여러분이 정말 목숨처럼 여기는 그 관계를 왜 주신 거예요? 부모 자식 형제, 그 이웃. 이 관계, 왜 준 거라고요? 끊어내라고 주신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너 이것도 끊을 수 있어? 물어보실 라고. 그러니까 인본주의에 꽉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 들으면 막 화를 내죠. 그러나 여러분, 신본주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로 바뀐 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에요, 이것은.
여러분의 가족 중에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 다 예수 믿으세요? 교회만 다닌다고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를 잘 믿는 사람 몇 명 됩니까? 그러면 분명 여러분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그 가족 중에 여러분과 지금 딴 데 갈 사람이 분명 있다는 건데 혹시 이 중에 있는 사람이 딴 데 갈지도 모르죠, 따듯한 곳으로? 만약에 그렇게 서로 딴 데에 가 있었을 때에 그 목숨처럼 사랑하는 그 가족, 그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이 천국을 사실 수 있을 거 같으세요? 그 관계가 안 끊어진 상태에서? 못 삽니다. 그러니까 그 관계는 언제 끊어진단 얘기에요? 여러분이 부활할 때 완전히 끊어져요. 돈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 명예에 대한 관심 부활할 때 다 끊어지는 것처럼 그 관계 또한 여러분이 부활할 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다 끊어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 가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목숨처럼 여기던 돈 명예, 관계가 지옥에서 불타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런 것들을 지금 끊어내는 삶을 살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자아숭배의 찌꺼기들을 덕지덕지 움켜쥔 채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상태에서만 하나님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린 이 세상에서 조금씩 그걸 다 끊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 이외의 세상 힘들에게 가 있던 그 마음에 칼을 맞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새로운 가치, 진짜 가치를 얻게 되고 진짜 천국 가족들과의 연합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걸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구원을 얻은 후에 첫 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 여러분들은 지금 첫 째 부활에 참여한 분들이에요. 요한계시록에서 배웠죠? 둘 때 부활은? 여러분의 몸이 부활하는 거고 지금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여러분의 영이 살아난 거니까. 그렇죠? 그 첫 째 부활에 참여하게 된 성도들은 이 역사 속에서 이 세상 힘과의 결별, 그리고 세상 가족들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부활을 하는 삶이라는 건 그러한 것들이 여러분에게서 끊어져 나가는 상태를 부활이라고 해요. 굉장히 다르죠, 그죠? 근데 그게 부활이에요. 그게 끊어지고 빠져나가야 새 생명이 살아나거든요. 그래서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성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 단절로 경험이 되는 거고요 그렇게 성도가 이 세상 힘으로부터의 죽음과 단절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 속에 싹터있는 새 생명의 삶이 조금씩 피어나게 되는 것,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부활의 현실이 종결이 되는 날이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는 거예요. 그 부활의 삶이 종결이 되는 거. 그때 진짜 부활로 완결되는 거죠. 그때 성도는 육으로는 완전히 죽고, 그러니까 계속 죽어가다가 완전히 죽는 날이 부활이니까 계속 죽어 가면 죽어갈수록 여러분은 새롭게 부활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그렇게 새로운 몸으로 완전히 거듭나서 새로운 가족 관계 속으로 완성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는 여러분끼리가 진짜 가족인 거예요. 거기에는 신랑 신부 없다, 그랬죠?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 거기에는 부모 자식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아버지, 그리고 교회인 자식들, 그 관계밖에 없어요. 우리끼리는 형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거죠? 그죠? 그리고 사도행전 같은 데 보면은 사도들이 계속 형제들아,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잖아요? 거기서 그 브라더가 형제에요, 진짜 형제.
그렇게 성도가 역사와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죽음과 부활의 삶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고 가신 거예요. 그게 성육신의 삶이며 공생애의 삶이며 십자가의 삶인 거예요. 그리고 부활의 삶이구요. 그러한 새로운 가족의 탄생 장면이 오늘 본문 바로 그 다음 장에 아주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20장 17절. 제가 오늘 본문으로 한 절 더 보탠 구절이죠?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여기에 나오죠? ‘내 형제들’, 그리고 ‘내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이때부터 이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제자들이 내 형제들이 되는 거예요. 이때가 어떤 땝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을 그때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는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나를 만지지 말라, 에요. 그리고는 이어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었고 내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 되었다, 라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된 거죠?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새로운 가족 관계가 드디어 완성이 된 거예요.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새로운 가족 관계가 완결이 된 거죠. 그리고 그 현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내려 보내셨을 때 모든 성도들에게 일괄적으로 적용이 되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이잖아요? 부활은 하셨지만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왜 만지면 안 돼요? 이런 질문이 드셔야 되는데.
성령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내려오셔야 비로소 당신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묶여요.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우리 둘이라는 건 누구죠? 이방인과 유대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에서 권속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오케이오스가 바로 가정, 식구라는 뜻이에요. 성령에 의해 교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한 아버지로, 한 식구로 새롭게 묵이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
재미있는 건요,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기록 돼 있는데 거기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집니다. 그런 거 궁금해 하지 않으셨어요? 여기선 만지는데 왜 여기선 만지지 말라고 그러나?
마 28:9-10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잡았죠? 응?]-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상황인데 여기서는 마리아가 발을 붙잡는단 말입니다. 근데 왜 요한복음에서는 만지지 마라! 가 그렇게 강조되어 적혀있냔 말에요? 사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다른 걸 강조하면서 기록이 돼 있다, 라는 걸 잊지 마세요, 여러분. 그렇다고 이게 있지도 않은 것을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을 허위로 적어놓은 건 아니에요. 그 복음서의 기자들이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끌어다가 쓴 것뿐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건, 여자가 예수님을 만지고 안 만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라는 것을 우리가 배우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지면 문둥병이 걸린다든지 코가 삐뚤어진다든지 이런 무슨 진짜 해가 있으면 예수님이 못 만지게 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만지지 마라, 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여자가 만졌어요. 근데 놔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여자가 예수님을 만지고 안 만지고가 문제가 아니라 왜 만지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요한은 그 이야기를 끌어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를 보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영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지지 못하는 그림, 그 생명의 근원인 생명나무 실과를 만지지 못하는 그림을 최초로 성경에 어디서 보셨죠? 생각해보세요. 그마 만큼, 한 육년 동안 설교를 들으셨으면은 이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은 얼릉 구약의 어떤 장면들을 여러분이 기억해내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항상 구약과 신약이 뚫려 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약에서 이해가 안 가면 구약의 어느 지점과 연결이 되는지를 꼭 생각하셔서 이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가를 그 전체 속에서 파악을 해야 된단 말에요. 어딥니까? 창세기잖아요? 생명나무를 하나님이 가려버리고 못 만지게 했단 말입니다. 누구에게? 죄인들에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뭔지 모르는 이들에게 절대 못 만지게 했단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여기에서 다른 그림으로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창 3:22-2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못 만지게 하셨습니까? 선악과의 시험이 해결되지 않고는 생명나무 실과, 즉 영생을 절대 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생명나무는 선악과를 통과해야 도달할 수 있는 나무에요. 그래서 창세기에,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같이 서있는 거예요. 피조물은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을 해야 한다는, 그 율법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해야 한다, 라는 그 선악과 시험에 통과한 자들의 하나님 절대 의존적 삶, 그것 자체가 뭡니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가는 그 삶을 뭐라 그래요? 그 자체가 영생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통과하지 않고 영생은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같이 있는 거고 선악과 시험에서 딱 실패를 하자마자 생명나무가 가려져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힘이 없어요. 선악과 시험을 통과할 능력이 없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피조물에게는. 그래서 선악과 시험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통과해내시고 그것을 피조물에게 전가시켜주는 방법으로만 통과가 가능해요. 예수님은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에 바로 그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험’으로 시작하시는 거예요. 제가 금식을 설명할 땐 ‘금식’으로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지만 금식과 시험으로 시작하셨잖아요? 그죠? 신명기 8장에선 뭐라 그래요? 그 금식의 삶이 바로 광야의 시험이었다,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인생이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사건인 거예요. 그게 선악과 시험의 성취란 말에요. 선악과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을 죽기까지 순종해야 된다, 가 선악과 시험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 그게 선악과의 시험이잖아요. 그걸 통과하신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고는 그걸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믿는 자가 예수라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선악과는 우리가 어떤 열심과 노력을 부려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그 길을 얻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가 선악과를 먹고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예수가 선악과, 율법 자체를 먹어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해내시는 거예요. 어떻게? 자기의 살과 피를 먹임으로 말미암아. 어떠세요? 여러분 성경이 어렵습니까? 너무 일관성 있게, 쉽게 풀리잖아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영생은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생명나무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분투하여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어떻게? 생명나무가 우리를 뚫고 들어와 버린다니까요. 그런데 이놈들이 선악의 판단을 자기들이 하면서 선악과 시험을 스스로 통과하여 생명나무를 먹겠다고 나선단 말이에요. 그게 바리새인들이에요. 그게 이스라엘이란 말입니다. 그게 오늘날 교회에 편만하게 퍼져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인 거예요. 인본주의인 거예요. ‘할 수 있다!’ 는 것이죠? 그거 할 수 없다! 가 성경이라니까요.
그렇게 생명나무를 따먹은 자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거저 편입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복음입니다, 여러분.
지금 마리아 앞에 생명나무 실과이신 예수님 서계세요. 이제 부활까지 하셨으므로 영생을 쥐고 계신 거예요, 예수님이. 생명나무 실과가 서계에요. 마리아는 반가움에 그 생명나무 실과, 영생의 근원되신 예수를 만지려고 한단 말입니다. 아직 십자가와 부활의 도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죄인이 생명나무 실과를 자기 손으로 만지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마리아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령이 안 내려오셨잖아요? 예수님이 승천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급히 만지지 마!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은 못 만진다는 뜻이에요. 내가 승천하여 성령이 내려오셔야 그때 너희들에게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고 그때 믿음이 함께 내려와서 아, 이렇게 믿음으로 거저 우리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는구나,를 알게 되었을 때 너는 나를 만질 수 있는 거야. 물론 다 상징적인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마리아가 만지면 뭐가 대단하게 큰일 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곧 만졌는데 가만히 계신 거예요.
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이 땅에 태어난, 역사 속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절대로 자기의 능력과 열심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할 수 없다, 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 율법 지킴으로 상징이 되는 마리아의 손, 그 손을 막으시는 거예요. 차단시키시는 거예요.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거? 왜 만지지 말라 그러셨지? 이런 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계속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그때 어디 숨어계셨을까요? 나무 뒤에? 무던 뚜껑 옆에?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에요. 근데 하늘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분이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이런 표현들로 뭔가를 설명해주시는 거예요. 하늘이 어디 있다고 올라가요? 하늘이 저 위에 있습니까? 차원을 달리하는 곳에 있는 거예요, 하늘은. 하나님 나라는. 자꾸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봐갖고 저 은하수 뒤편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라고 생각하니까 자꾸 저기 올라간다고 생각들 하는 거죠. 내려갈지도 몰라요. 하나님 나라. ㅎ. 그러니까 그러한 국어사건이 개념을 갖고 자꾸 성경들을 보시려고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과 피조물의 한 가족 됨은 피조물 측에서의 어떤 시도나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게 될 성령의 강림으로만 성취가 될 것이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못 만져. 그런 거예요.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니이다
근데, 영생은 이런 거예요. 근데 이건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성령이 내려와야 알 수 있다 그러잖아요?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그가 안 오면? 못 알아먹어요. 근데 예수님이 아직 승천을 안 하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아직 안 내려오셨단 말이에요. 그 성령님이 언제 내려오세요? 오순절날 내려오시죠? 모든 교회에게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 때에. 그 때에 믿음이 일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쑥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들이 생명나무를 만지는 거예요. 아니, 먹어버리는 거예요. 그때,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주기 위해 이런 그림들이 마치 유치원수준으로 이렇게 그려져 있는 거예요, 성경에.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새 가족 탄생의 비밀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반복하여 기술을 하는데요, 그게 28절이에요. 볼까요?
요 19:28-29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내가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랬더니 병사들이 신 포도주를 해융에 묻혀서 우슬초로 예수님께 건네요. 딴 데서는 갈대라고도 이야기를 했는데 요한은 굳이 그걸 우슬초라는 단어를 써요. 요한은 그러한 일련의 말씀과 행동이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신 것이다, 라고 친절하게 부연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일까요?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심이다? 갑자기 죽기 전에 시편이 생각나서, 어, 그때 참 초를 먹어야 된다, 그랬는데 내가 안 먹었네? 깜박 잊을 뻔했다. 내가 목마르다. 이러신 거예요? ㅎㅎ. 그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럼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한다는 게 무슨 말이냔 말에요, 도대체?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마태복음에 보면요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는 장면이 나오죠? 마가복음 15장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라 그래요. 쓸개를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예수님이 거절하십니다. 이게 단어가 같은 단어라서 쓸개, 몰약 이렇게 번역이 됐는데 실제로 쓸개와 몰약을 포도주에 타면 그게 마취제 역할을 한다 그래요. 그러니까 십자가 지기 전에 최대한의 배려를 한 거죠, 사형집행관들이. 마셔, 덜 아플 거야. 예수님이 그거 거절한단 말입니다. 왜? 인간들이 당할 십자가의 고통을 요만큼도 가감 없이 다 당하시려고 그건 거절하시는 거예요. 그 포도주와 지금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신 포도주는 다른 포도주에요. 그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받았던 거고 지금 신 포도주는 바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받으신 거란 말입니다. 그걸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그 쓸개와 몰약이 들어간 포도주는 거절하셨지만 오늘 본문의 이 신 포도주는 받아 마셨다니까요.
받았다, 그러죠? 마신 거예요. 받아 마시신 거란 말입니다, 그거는요.
그 해융에 묻힌 신 포도주는 어떤 포도주였냐면은 사형집행관들, 그 하급 병졸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시던 아주 값싼 포도주였어요. 그러니까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였지만 이 신 포도주는 갈증 해소용 음료였단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예수님의 행위가 너무 일관성이 없지 않아요? 뭐는 받고 뭐는 왜 거절해요? 네, 마취제는 거절하고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포도주는 받아 마시시는 거예요. 그럼 도대체 그 목마름이 뭐 길래 그거는 해갈을 하고 가셨냔 말에요? 끝까지 그냥 멋지게 죽으시지. 돌아가시기 전에 할 말이 목마르다. 아프다, 이거면 내가 이해하겠어요. 아프다, 죽겠다. 아니 그런 말이 나와야지 고작 목마르다. ㅎㅎ. 거기에도 뭔 메시지가 있을 거 아닙니까?
여러분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목마르지 않게 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절대 너희들을 목마르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시잖아요. 그거와 연결이 되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 목마르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 해융이라는 거는요. 스폰지처럼 액체를 잘 빨아들이는 그 바다 동물의 다공성 뼈. 연한 뼈 종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런 것들은 스폰지처럼, 그때 당시엔 스폰지가 없었으니까, 액체를 쭉 빨아들인다 그래요. 그걸 우슬초에다가 가득 적셔요. 아니, 그 해융에다가 가득 적시고 우슬초에다가 묶어요. 그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바로 얼마 전에 이게 바로 내 피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렇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피가 우슬초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발라지는 거죠. 입술에다가 발랐단 말입니다. 해융을 뭐 꿀떡꿀떡 마실 순 없으니까 발라준 거예요. 그걸 핥아먹은 거예요. 그리고는 해갈이 됐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우슬초에 의해서 피가 발려진 사건은 구약의 어디에 등장합니까? 출애굽기에 등장하죠, 그죠? 네.
출 12:13,22-2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2:22-23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똑같은 단어들이 그대로 등장하죠? 70인 역에서는 그렇게 그대로 번역이 된단 말에요.]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이게 유월이라는 거죠, 그죠? 넘을 유, 넘을 월, 유월, Pass over]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똑같이 죽음에 던져질 어떤 자들에게 우슬초에 의해 피가 발라지면 그들은 살아나요. 애굽사람이든 이스라엘사람이든 상관없어요. 그냥 어린 양의 피를 우슬초에 묻혀 바르기만 하면 그들은 다 살아요. 그게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슬초에 적셔진 포도주를 받으시는 사건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장면을 그대로 성취하고 계시는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 안에 연합이 된 어떤 자들에게 예수의 피를 발라서 죽어야 할 그들을 살려내시겠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 목마름을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고 그 목마름을 가진 이들에게 자기의 피를 먹여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목말라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시장하다, 하고 이파리만 풍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무화과나무를 죽여 버렸잖아요? 근데 결국 자기가 그 무화과나무가 되어서 저주 받은, 말라비틀어진 십자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죽어버리는 것처럼 그들의 배고픔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처럼 똑같이 그들의 목마름이 되어 죽는 거예요. 근데 어떤 식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시키고 그들을 건지냐면, 자기의 피를 찢어, 자기의 피를 쏟아 그들에게 부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들을 넘어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목말라 죽는 거예요. 발가벗겨져서 부끄러운 상태로 죽어야 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발가벗음이 되셔서 죽는 예수의 모습, 똑같은 거예요, 다. 그게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는요.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받은 이들이 도대체 그 예수 앞에서 무얼 구하고 있는 거냐고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다, 라고 말씀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 그것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응하게 하려 함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에서 그 ‘응하다‘가 ’다 이루었다. ‘ 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인 걸 아세요, 여러분? 텔레오라는 단어에요. 십자가 위에서의 그 예수님의 신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내려오셔서 이루려고 했던 일의 모형이란 뜻이에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시잖아요? 그 다 이루었다, 라는 그 이루는 이룸이 바로 이 성경에 적혀진 내용인데 그 성경에 적혀진 내용을 이루려고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 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똑같은 단어가 거기에 쓰이는 거예요. 그 다 이루심, 텔레오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오는데 34절 보세요.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 것이니라
이거에요, ‘이루다’. 똑같은 단어에요. 근데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는 것, 그게 뭐라 그래요? 나의 양식이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라고 이야기해놓고 그 양식을 받아 마시는 거예요. 근데 그 양식이 뭐였냐고요? 내려가서 죽어! 였잖아요. 이해가 가세요? 이거 삼단논법만 알아도 다 이해가 가는 건데. 그죠? 전 깜짝 놀란 게, 젊은 그 누구라고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젊은 친구가 고렇게 제가 삼단논법으로 뭔가를 설명했는데 그걸 못 이해하더라고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내 친구가 누굽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친구냐? 라고 하셨으니까 그 바리새인이 바로 요 강도 만난 자가 아니냐? 요렇게 연결을 했는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냐고? ㅎㅎ. 혹시 이중에도 그런 분이 계실까봐 무지 걱정이 되는데 그 정도는 이해가 가시는 거죠, 여러분?
네, 이렇게 그 다 이루심, 그 다 이루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나는 인제 내 피를 다 쏟아 부어서 하나님이 살리라고 하는 이들을 다 살렸어! 그 다 이루심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내용인데 그 내용이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 고 그림에 들어 있단 말에요. 그래서 이게 성경을 응하게 하는 일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텔레오라는 단어가 그대로 쓰인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예수님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마름에 대한 호소가 나오는 거고 그 목마름을 채우는 것으로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적셔서 십자가 위에 바르는 그림이 나오는 거고 바로 그 그림을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텔레오로 선언하고 떠나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들은 공허라는 목마름에 시달려요. 그 목마름은 죄로 말미암게 되는 사망의 증상이에요. 밀란 쿤데라는 그걸 권태라고도 이야기하고 파스칼은 그걸 심심함이라고도 이야기하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공허를 메꾸기 위해 열심히 사는 거예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랑도 열심히 해보고 취미생활도 열심히 해보고, 그 공허 메꾸기 위해. 그게 사망의 증상이거든요. 근데 그 자리는 하나님이 쑥 빠져나간 자리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메꿔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쑥 빠져나간 자리는 무한, 무한하신 그 하나님이 빠져나간 자리이기 때문에 끝이 없는, 저,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없는 무저갱이기 때문에 그걸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공허에요. 심심함이에요. 그게 권태에요.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그게 목마름입니다. 그 목마름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여러분이 어떤 고대광실에 가 있는다할지라도 거기가 지옥이에요. 아무리 여러분이 먹고 싶은 걸 다 먹는다할지라도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거기가. 그 공허가 해결되지 않은 그 자리가.
근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 어떤 것들로 그 공허를 채우려고 해요. 그 목마름을 해갈시키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죠? 너는 아무리 이물을 먹어도 곧 다시 목마르다. 그건 뭘 빗대어하신 말씀이에요? 그 여자가 세상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 번 바꿨습니다. 요 남자랑 살면 만족할까? 요 남자랑 살면 만족할까?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사람하고 살고 있는데 인제는 그 공허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혼인신고도 안 했어. ㅎㅎ. 세상 힘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채우려고 해요. 그때 예수님이 그 우물물을 빗대어서 너 이물 아무리 먹어봐야 세상의 물은 금방 목말라. 내가 주는 물 먹어야 목 안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끊임없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죠? 그럼 이 물은 뭐에요? 예수님의 핀데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져요? 성령으로 주어지잖아요.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 이야기에요. 여러분은 그렇게 성령 받아서 해갈이 되셨습니까? 근데 세상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목마르죠? 아니라고 말씀 못하실 거예요. 그죠? 목말라요. 돈, 돈에 대해서도 목마르고 명예에 대해서도 목말라요. 인기에 대해서 목마르고 자랑에 대해서 목마릅니다. 내 자식 새끼에 대해서 목마르고 부모에 대해서 목말라요. 그건 죽는 날까지 여러분이 가지고 가시는 거예요. 그게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 목마름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그 목마름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예수님이 해갈하신 영적 목마름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는 거지 그 목마름에서 자유롭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 자유롭게 안 돼요. 아닌데요, 나는 이제 그 정도에서는 자유로워졌는데요. 거짓말 하는 거예요. 제가 백프로 개런티 해드릴게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럴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그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영적으로, 예수님의 그 은혜의 폭력성을 갖고 오셔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 영적 해갈을 해주지 않았다면 난 어떡할 뻔했는가? 이 목마름 끝가지 갖고 영원속에서도 지옥을 살 뻔했구나! 그거 깨달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시고 그 목마름의 해갈의 방법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성령에 의해 우리가 한 몸으로 한 지체가 되어 새 가족이 되는 거예요. 쉽죠, 그죠?
그러니까 다 이루었다, 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는 모순이 되는 말이 아니라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그분이 철저하게 버려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거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와 ‘다 이루었다!’ 가 어떻게 화해가 되느냔 말에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버려짐과 다 이룸과 이게 화해가 되는 말이냐고요? 그건 다 이룸이 아니라 다 잃음이죠? 잃어버림. 아버지에게 버림을 당했는데 그게 뭐가 다 이룬 거예요? 다 잃어버림이지. 아버지에게 버림받으면 다 끝나는 거거든요. 근데 그걸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다 이루실 일은, 그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철저하게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오로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에만 집중하고 착념하는 것,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명력이 부어져야할 존재가 싹 비워져야 돼요. 그게 하나님 나라에요. 그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번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자주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선 그 일에 쓰임을 받는 존재의 다 비워짐, 완전히 버려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함, 이게 전제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완전히 버려지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종해버리시는 거예요. 죽어! 그러니까 죽었어요. 그랬더니 그 죽은 시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그 자리에선 하나님이 일을 안 하세요. 고 자의 일을 하죠, 그가. 자기의 일을 해요. 그러나 우리가 죽어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에요.
똑같은 착한 일인데요, 어떤 사람이 자기부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의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예수가 드러나서 하는, 나오는 착한 일과 내가 끝까지 나의 자랑과 인기를 챙기기 위해서 하는 착한 일과 모양은 똑같은데 둘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착한 일이에요. 어떤 사람은 정말 이 세상의 힘은 내 힘이 아니구나, 그리고 이 세상의 힘은 들풀의 꽃 같아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구나. 라는 그런 고백으로, 그리고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헌금으로 드려졌기 때문에 나도 내 소유를,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헌금으로 드릴 수밖에 없구나! 하고 나오는 ‘헌금’이 있어요. 그것도 버림이에요. 버리는 거예요, 그것도요. 내 소유를. 여러분 그런 여러분의 헌금이, 여러분이 버린 헌금이 어디에 어떻게 보람 있게 쓰이게 될 거라는 그런 기대도 하지 마세요. 그건 버린 거예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일 해서 이걸 냈는데 이게 그렇게 쓰여야 돼? 그거 버린 거 아니에요. 내가 거기서 끝까지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막 쓰여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그거와 그 김장훈이라는 후배가 그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왜 그렇게 수십억을 기부합니까? 그랬더니 3억을 기부하니까 하늘에 있는 어떤 존재가 6억을 주더래요. 내가 5억을 양로원에 기부했더니 십억 짜리 CF가 들어왔대. 십억을 기부했더니 이십 억짜리 콘써트가 대박이 났다는 것이죠. 그런, 그런 의도로 하는 착한 일은 내가 하나님 앞에 버리는 행위로써의 착한 일과 완전히 반대인 거예요. 그런 류의 자기 챙기기에 근거한 착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가 은혜를 설교하면서 그 은혜에 근거하여 당신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에 감읍하여 내어놓는 착한 일이 아니면 하지 말라고 감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 내 안에서 예수가 하시는 그 착한 일 하라고. 제가 언제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그랬어요? 진짜 착한 일 더 열심히 하자고 그러는 거지. 그동안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그렇게 좋아갖고 인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야? ㅎㅎ. 네, 자유롭게 사세요, 그렇게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그 자유로운 삶이 여러분에게 고통으로 반드시 오게 돼 있어요. 막 사는 삶? 살아보세요. 괜찮아요. 제가 책임질게요. 막 사세요. 그리고 거기서 오는 고통을 같이 겪어보세요. 아니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구나? 우린 거기서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막 살 수 있다고 함부로 얘기를 해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하나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일치감이 어느 정도냐 하면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바로 나이고 내가 곧 하나님이다, 라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조차 자기 마음대로 안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시키는 말만 했다 그랬어요. 왜? 두 분은 일체거든요, 일체. 그러니까 말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일체에요. 그게 연합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나중에 그 상태로 가거든요. 하나님과 그 상태로.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여러분, 자아가 어떻게 해야 돼요? 내 것을 내놓지 못하게 계속 죽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시키는 말만 할 수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고게 자기부인이에요. 그렇게 내가 무력한 자로 폭로되는 거. 이거는 절대 선한 것이 될 수 없구나, 라고 폭로되는 거.
그런데 이렇듯 아버지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강조해 오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버려짐을 느끼고 계신단 말이에요. 버려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상식적으로 일체감이라는 것과 버려짐이라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아요. 어떻게 일체감과 버려짐이 어떻게 서로를 인정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게 두 개가 화해될 수 있냐고요? 안 되잖아요. 일체감, 우리의 사고로는 일체라는 것은 버려짐과 절대 화해할 수가 없어요. 끌어들임이어야지 어떻게 버려짐이 일체가 됩니까? 근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라고 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니까요. 버려졌다는 건 아버지와 분리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다 이루지 못함이라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와 분리된 거니까.
그러나 여러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고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없어요. 왜? 예수님만 하나님과 일체거든요. 버려졌다, 라는 건 분명히 일체였다는 걸 전제하는 거예요. 따로 떨어져 있었던 거는 버려진 게 아니라 원래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근데 버려졌다, 라는 건 일체였다는 게 전제된 겁니다. 그 일체였던 것이 끊어져나가 버려지는 거니까. 근데 하나님과 일체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버려질 수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질 수가 없어요. 예수님만 버려질 수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순종하는 분만 하나님과 일체된 분이에요. 말이 좀 어렵습니까? 왜냐하면 자신의 버려짐조차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을 정도로, 나의 버려짐조차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을 정도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거잖아요?
자기 생명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자신과 일치된 어떤 분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거라는 그러한 철저한 자기부인이 벌어진 장소가 예수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죽어! 그러니까 죽은 거예요. 죽음조차 내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죽음과 삶이, 그 주도권이 나에게 없단 말입니다, 그게 일체에요. 일체!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일체 속으로 끌어들이고 계신단 말입니다, 여러분.
힘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는 상식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집니까?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자신을 버려서 원수를 살리는 십자가의 원리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신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살려내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만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가신 거란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그러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버려짐은, 야, 어떻게 그렇게 버려지는 예수,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가 어떻게 하나님일 수가 있냐?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 하나님 나라를 절대 모르는 존재구나!를 폭로당하는 거예요, 오히려요. 근데 사람들은 거 봐, 하나님 아니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아냐,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을 모르는구나? 그리로 가게 된다니까요.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을 버려짐으로 이끄시는 분은 아버지의 성령이죠?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밖에서부터 끌고 가시잖아요? 예수님을. 그래서 일부러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눈에 보이게 내려오시는 거예요. 교회들아 봐라. 성령이 아들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 갑니까? 버려짐의 장소로 끌고 가요. 그런데 그 성령이라는 처소에는 누가 함께 계시는 거예요? 아버지 하나님이 같이 계시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버려지는데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세요. 그게 삼위일체입니다. 성령이라는 처소 안에서 예수,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이 같이 존재하시는데 이 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아버지는 죽어라! 라고 명령을 하시고 아들은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가 죽겠습니다, 라고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그게 바로 일체인 거예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완전히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죽여 원수를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 자리로 성도가 초청을 받고 있어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이루심,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에 의해 버려져도 자아가 등장하지 않는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아버지가 버려도, 아버지의 뜻이 나를 버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도 내 자아가 등장하지 않는 게 일체에요. 그게 하나님 나라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보여주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나를 버리는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뜻에 의해 완전히 버려져요. 그게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백성이 해야 할 ‘다 이룸’ 이라니까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걸 다 이루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어! 그러면 선악의 판단의 기준을 내가 내려놓고 죽을게요, 죽는 거예요.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기까지 다 죽여! 그러면, 어 도덕과 윤리로 판단하여 그게 어떻게 옳습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은 무조건 선하니까 다 따르겠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순종하는 자라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거.
그러한 예수님의 버려짐 말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한 방식으로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기 위해서 자기부인을 유발하는 거예요. 자기부인은 그냥 구호가 아니에요, 여러분.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기적이에요, 자기부인은. 그 첫 번째 자기부인을 성취하신 분이 하나님과 일체셨던 예수님이셨고 그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일체로 부름을 받은 성도가 그 뒤를 잇는 거예요.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일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머리로 한 한 몸, 가족이 되었어요. 일체가 되었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은 성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으로 끌려들어간 거거든요. 여러분의 이 역사 속에서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인제부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고백이 수시로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수시로. 영원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였던 예수가 역사 속에서 버려짐의 상태에서 그 아버지와 일체됨을 보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령, 믿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버려짐을 경험하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고백을 수시로 하면서 다 이루었다, 라는 고백을 결국 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나는 완전히 버려지고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구나, 라는 자리로 하나님이 밀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이 그렇게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꼭 하나님이 버린 것 같죠? 아, 나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아닐지도 몰라. 그런 허탄한 고백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하나님이 날 버린 것 같아서. 하나님은 그 속에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라는 위대한 고백을 듣고 싶은 거지 야, 하나님은 정말 나를 버리셨나보다. 내게 등을 돌리셨나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약한 고백을 듣고 싶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제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아, 오늘부터 가서 인제 자기부인 해야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자기부인이 돼요? 저 좀 가르쳐주세요. 허벅지를 찌를까요? 은장도 갖고? 하루 열두 번씩? 그렇게 해서 자기부인이 되던가요? 아 참으니까 되던데요? 그건 참는 게 아니라 벼르는 거라니까요. 언젠가 터지면 넌 죽는다! 이게 참는 거예요? 벼르는 거지. 그거 자기부인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 의 쌓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참았어. 나는 너보다 나아. 그러면서 이를 악물면서 몸에 막 암이 생겨. 너무 스트레스 받아갖고.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억지로 참는 게? 아니요, 그게 자아실현이라는 거예요. 자아성취라는 거예요.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의 오류가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대표를 해서 버려지셨다, 라는 고 사건을 모델화하는 거예요. 모범규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요게 모범 답안이야. 모범규준이야. 그러니까 요대로 한번 살아봐야지. 하나님이 죽어! 그러면 죽는 자가 ‘되어야지’
여러분, 모델화라는 건 모델이 있고 그 모델처럼 살고 싶은 내가 있어서 나를 점점 그 모델 쪽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모델화라 그러죠? 거기에서는 내가 부인되면 안 돼요. 내가 계속 살아야 돼요. 그래야 내가 나를 몰고 갈 수 있거든요. 그건 자기부인 아니잖아요? 어떤 걸 모델화하여 그걸 좇아가는 게 자기부인 아니에요. 여러분 자꾸 여러분 주변에 롤 모델을 찾아다니시려고 하는데, 이런 롤 모델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런 롤 모델을 쫓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롤 모델이 진짜 잘 살고 있는지 어떻게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의 쌓고 있는지 어떻게 아세요? 간디 정도로 살아주면 롤 모델 자격 있습니까? 테레사만큼 살아주면 롤 모델 자격 있나요? 법정처럼 살아주면 롤 모델 자격 있어요? 오늘 중앙방송에서 전화 와가지고 불교인들이 난리 났다고 지금. 몸조심하라고 저한테 그러던데. ㅎㅎ. 법정에 대해서 헛소릴 했다, 이거죠. 뭐 헛소리에요? 저는 기독교 목사이지 저는 불교 승려가 아니잖아요? ㅎ. 근데 저한테 무슨, 무슨 이야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 정도면 롤 모델 돼요? 어떤 롤 모델 원하십니까? 내가 어떤 걸 모델화하여 내가 그렇게 살겠다, 라는 것 자체가 내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거예요.
자기부인은 성령이 검이 되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폭력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요? 아니요. 성령이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도 노력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수많은 실패를 겪게 돼요, 거기에서.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끊임없이 실패했는데, 그래서 나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데 거꾸로 내가 바뀌어지는 게 삼자에게 들통이 나게 돼요. 그게 진짜 자기부인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하나님 나는 먼지네요.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내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이 말 한마디 진심으로 던지고 가는 사람이 성화의 절정을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 뭐 대단한 거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크신 분이신지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드러내고 가시면 되는 겁니다.
아이 바울처럼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아브라함처럼, 열심히 삽시다! 그래요 백 세 넘어서 첩 많이 두세요, 그러면. 솔로몬처럼 말년에 가갖고 우상에게 절하고 그러세요. 왜 그런, 그들의 부정함과 연약함이 성경에 굳이 폭로되어 있는지 아세요? 그것도 말년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합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자격 때문에 그게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보자기처럼 덮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끊임없이 인간들의 연약함은 폭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냥 만들어주시는 것일 뿐인 거예요.
사도베드로가 저는 예수님 따라 죽겠습니다, 그러죠? 죽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 그럽니까? 니가 나를 위해 니 의지대로 의지를 발동하여 죽겠단 말야? 자기부인 하겠다는 거거든요. 자기부인의 극치, 죽음 아닙니까? 예수를 위한 죽음. 죽겠습니다! 그럴 때 뭐라 그래요? 니가 오늘 세 번 나를 부인할 거야. 나를 부인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네가 나를 부인할 거야! ㅎㅎ. 그것도 세 번. 철저하게란 뜻이거든요. 세 번이라는 건. 사도바울이 세 번 기도했다, 라는 건 죽어라고 기도했단 뜻이에요. 딱 세 번 기도했다는 게 아니라. 그 질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다고 하겠어요? 끊임없이 마음속에, 아이구 이것 좀 하나님이 고쳐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마음먹었을 거 아니에요? 그게 기도잖아요? 근데 무슨 세 번이나? 그런 숫자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죽어라고 기도했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완벽하게 부인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힘으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요.
여러분 왜 고 전에 제자들이 세 번 깨웠는데 계속 잤는지 아세요? 잠은 뭐에요? 성경에서? 뭘 메라포하는 거예요? 죽음이에요. 왜 굳이 고 때 자요? 뭘 먹었다고? 포도주 너무 많이 먹었나? 그날 저녁 때? 왜 고 때 자냐고요?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죽어 있는 자들이란다. 내가 세 번을 깨웠는데도 못 일어나는 자들이란 말야. 마지막에 뭐라 그래요? 물을 확 갖다 끼얹는 게 아니라 이제 자고 쉬어라. 왜? 내가 일 해야 된다. 너희들의 처지가 이 모양이기 때문에 내가 일 해야 되는 거야. 그래 자! 자, 자. 우리의 모습을 폭로시킨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피가 그들을 덮는 거예요. 그렇게 덮으니까 어떻게 돼요? 나중에는 베드로가 진짜 예수를 위해 죽는데 어떤 방식으로 예수를 위해 죽느냐 하면 밖에서 어떤 이가 띠를 띄우고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거예요. 그게 성령에 의한 자기부인이에요.
그러니까 잘난 척들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끊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중독? 천만의 말씀. 술, 담배, 오락, 심지어 TV 연속극 보는 거. 맘대로 끊어지던가요? 여러분, 세상,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세상 다른 것에 내 마음을 뺏기는 걸 죄라고 하거든요. 근데 그 죄의 권세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찾아왔다가 하나님에 의해 그가 밀려나는 거란 말이에요. 그죠? 그러면 중독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해보자고요. 내가 아직 술을 못 끊었어. 담배를 못 끊었어. 의지가 이것밖에 안 되냐? 예수 믿고 아직 그 정도도 못 끊어? 아니요, 담배는 내가 피우고 내가 끊는 게 아니라 담배가 찾아왔다가 걔가 떠나야 끊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못 끊는 걸 경험하면서 야, 얘가 찾아왔다가 떠나지 않으면 나는 아무, 아무런 노력과 열심을 부릴 수 없는 그런 먼지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오히려. 술 담배를 하고 안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정 선생님처럼 돌아가시는 날까지 알콜 중독자로 살다가 가셨다 할지라도 ‘목사님, 이런 나도 하나님이 사랑하신 다네요? ‘ 라는 그 고백. 나는 여전히 이렇게 뭔가에 붙들려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얘가, 알콜이라는 게 날 떠나지 않으면 나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먼진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신 다네요. 그걸 묶어버리고 나를, 마귀의 세간이었던 나를 늑탈해버리신다고 하니 감사하네요. 하고 가면 죽는 날까지 알콜 중독자로 살다가 간다한들 그게 뭐 그렇게 대숩니까? 다들 뭔가에 중독 돼 있잖아요? 그래도 술은 나쁜 거잖아요? 천만의 말씀. 여러분이 먹는 모든 건 다 독이에요. 그래서 간이 있는 거예요, 해독하라고. 뭐가 나쁜 거고 뭐가 좋은 겁니까?
여러분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몇 가지 착한 행실, 바른 행실 내어놓고 하나님한테 잘난 척 하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폭로당하면서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사세요. 저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사세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네요. 깨닫고 무력해지는 거예요. 그렇게 무력해지면 질수록 세상에 대한 욕심이 밀려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냥 욕심도 점점 커져.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욕심이 점점 커져.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의해,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의 폭력성에 의해 우리는 점점 부인되다가 결국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거기에서 뭐가 태어나요? 예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아들을 얻는 거예요. 여자여,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되고 그 여자에게 아들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 여자는 누구? 마리아! 왜 하필 마리안가? To be continue! ㅎㅎ. 다음주에. 거기까지 하면 또 시험받을 거 같아서. 다음주에 설명해드리죠. 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