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인 Woman at a Piano, c.1871~1879
피아노 건반을 사정없이 달리고 있는 손가락에 맞춰 여인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고개가 비스듬히 한쪽으로 기운 것을 보니 곧 곡의 절정에 이를 모양입니다. 우아한 모습보다는 몸 안에 있는 답답한 것을 모두 내뱉는 느낌입니다. 바닥에 채색된 어지러운 무늬와 피아노 위에 마구 놓여 있는 것들이 혹시 그림 속 여인의 마음 상태 아닐까요?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모델과 마네킹 The Model and Mannequin, 1873
아주 특이한 광경입니다. 여인은 한 손에 담배를 피워 물었고 남은 한 손으로는 마네킹의 목에 손을 둘렀습니다. 마네킹에 몸을 던지다시피 한 여인의 표정이 몽롱합니다. 화려한 옷과 실내 장식에 둘러싸인 살아 있는 여인과 생명이 없는 마네킹의 부조화가 오히려 쓸쓸해 보입니다. 여인이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혼이 마네킹의 그것처럼 텅 비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더운 가슴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마네킹과 다른 것이니까요.
볼디니는 이탈리아 페라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종교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미술품 복원가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지런했었는지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볼디니는 그 중에 여덟째였습니다. 볼디니는 훗날 군에 입대하기에는 4cm 정도 키가 작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신체적으로는 왜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둥근 이마에 고상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하니까 자의식은 강했던 것 아닐까요?
해먹 The Hammock, c.1872~1874
세상에 이렇게 편한 자세도 있었군요. 발 한쪽은 해먹 밖으로 나왔고 신고 있던 신발도 땅에 떨어졌지만 숲 속의 공주는 잠이 깊었습니다. 양 손의 위치를 보니 제법 잠이 든 시간이 길었던 것 같습니다. 해먹에 걸린 장식도 예쁘고 바닥에 주인과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양산도 곱습니다. 살면서 가끔은 저렇게 모든 것에서 벗어나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동안 ‘소는 누가 기르느냐’이겠지만요.
볼디니의 그림에 대한 교육은 어려서부터 화가였던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많은 자료가 볼디니의 그림에 대한 천재성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스무 살이 되던 1862년,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미술교육이 시작됩니다.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는지 궁금합니다.
봄 Spring, 1873
집 앞마당에 꽃도 피었고 햇빛도 좋은 봄의 어느 날 나들이가 별 거 있습니까? 좋은 사람하고 있으면 그것이 봄나들이죠. 모자를 벗고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봄의 햇살만큼이나 따사롭습니다. 양산 속에 있는 여인은 애써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지만 붉어진 뺨과 애꿎은 풀밭을 잡아당기는 손을 보면 싫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열이 오르는 봄인데, 두 남녀의 열기가 갈증을 더하게 만듭니다. 옆에 있는 강아지도 그 열기에 혀를 내빼고 있는 것일까요?
피렌체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볼디니는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라고 불렸던 일단의 그룹을 만납니다. 아카데믹 화법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했던 이들은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와도 연결이 되어 있었죠. 훗날 이탈리아의 인상파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던 이들로부터 볼디니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그 흔적이 있습니다.
빨랫감 The Laundry, 1874
빨래터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입니다. 여인들의 차지이지요. 가져온 빨래만큼 이야기가 많은 곳이고 각종 정보가 공유되는 곳입니다. 수레 가득 빨래를 가져온 여인이 있는가 하면 작은 광주리에 담아온 여인이 보입니다. 가운데 여인들은 큰 나무 상자 위에 배를 올려놓고 빨래를 헹구는 중입니다. 저렇게 하는 수도 있었군요. 맨 위에 물을 마시는 소가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생명이 있는 것들이 우선이 되어야지요. 맑은 기운이 가득한 빨래터, 발을 담고 여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습니다.
3년간의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볼디니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1867년 파리를 여행하는 도중 박람회를 구경합니다. 전시된 쿠르베와 마네, 드가의 작품에 크게 매료된 그는 나중에 그들과 평생 친구가 됩니다. 드가는 볼디니를 직접 그리기도 했지요. 볼디니는 유럽의 미술 수도가 파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파리 정착을 꿈꾸게 됩니다.
거리를 가로질러 Crossing the Street, 1875
한 손으로 치맛단을 들고 가는 여인의 눈이 빛이 납니다. 꽃을 든 것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꽃을 든 여인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보기가 좋습니다. 여인의 뒤로 노파의 등이 보입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꽃 대신 광주리를 들었고 등은 적당히 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두 여인 사이에 흐르는 것은 세월입니다. 물론 그림 속에서는 개가 지나가고 있지만요. (그렇다고 개 같은 세월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창문 안에서 거리를 지나는 저의 모습을 보면 저는 무슨 세월을 안고 가는 것처럼 보일까요?
이어 1869년 런던으로 여행을 간 볼디니는 이미 초상화가로서 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주문을 받습니다. 그 후 5년간 초상화 작업이 계속되었다고 하니까 그 양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볼디니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풍경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천재성이 발휘된 것이죠. 그러나 그의 주무대는 역시 초상화였습니다.
평화스러운 날들 Peaceful Days, 1875
평화스럽다는 말은 걱정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일까요? 가진 것이 부족해도 걱정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어도 불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는 첼로의 활을 닦고 있고 소파에 앉은 엄마는 뜨개질에 여념이 없습니다. 뜨개질은 한때 유럽에서는 정숙한 여인의 상징이었죠. 엄마는 즐거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아이의 얼굴은 검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혹시 엄마는 평화스럽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은 것 아닐까요? 아이가 깔고 앉은 양탄자의 구겨짐이 자꾸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볼디니는 파리로 건너와 화실을 열고 정착합니다. 런던에서 주문 받은 작품들은 도버 해협을 넘나들며 그렸습니다. 1874년부터는 살롱전에 자주 작품을 출품했고 곧이어 파리의 미술 모임에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이 대중들로부터 환호를 받기 시작한 것은 화상 알프레도 구필과 맺은 독점 공급 계약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여인의 옆얼굴 Profile Of a Young Woman, 55.9x40cm
머리 모습이나 한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이 너무 감각적이어서 하마터면 요즘 작품인 줄 알 뻔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여인을 그린 초상화가 제 기억 속에서는 처음입니다. 그림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여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근사한 사람이 있겠지요. 눈과 입술에 미소가 동시에 걸린 표정은 아주 반가운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죠. 역시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길거리든 카페든 술집이든 만나면 저런 표정을 지어주곤 했는데 지금은...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되는가봅니다.
구필은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를 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죠. 구필은 볼디니에게 18세기 복장을 한 여인들이 담긴 작은 크기의 작품을 요구했습니다. 밝고 빛나는 볼디니의 작품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굵고 물 흐르듯 하는 붓 터치의 스타일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파리의 유명인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줄을 이었습니다. 볼디니는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검은 모자를 쓴 여인 Girl in a Black Hat, pastel on pape, 59x33cm
모자 챙 아래 눈동자는 진지함과 함께 열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꾹 다문 입술에서는 오히려 차가움이 느껴집니다. 웃고 있다고 가정해보면 눈이 더 차가웠겠지요. 문득 학생 때 모임이 생각났습니다. 한때는 그림 속 여인 같은 표정들이 좋았습니다. 딱 부러지는 말투와 명쾌한 논리를 말할 때면 눈은 더워졌고 입은 차가웠었지요.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사람들은 거꾸로 눈은 차가워졌고 입이 더워졌더군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런 것일까요? 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눈도 입도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상류층 여인들이 등장하는 볼디니의 작품은 그를 파리 최고의 멋쟁이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그의 그림 스타일은 인상파와 닮았지만 존 싱어 서전트나 폴 엘뤼의 것에 더 가깝다는 평을 받습니다. 1880년대에는 친구였던 드가의 영향을 받아 파스텔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콜린 캠벨 Lady Colin Campbell, 1897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기럭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인데 그 표현을 빌리자면 ‘장난’이 아닙니다. 저처럼 5등신쯤 되는 사람이 보면 신체의 비율이 비정상적입니다. 검은색 드레스 때문에 뽀얀 피부가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큰 키인데 기대고 있는 소파가 여인의 키만큼 높아 위로 몸이 쑥 뻗는 느낌을 줍니다. 과감하게 생략된 배경은 우리의 시선을 온통 여인에게 끌리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림이지만 다시 보게 되는 자세이군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좋으셨겠습니다.
동시대의 초상화가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볼디니는 1890년대 파리의 ‘화려한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됩니다.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박람회에서는 이탈리아 전시관의 총 책임자가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게 됩니다. 화가로서, 행정가로서 그의 재능을 마음껏 보여준 것이죠.
스페인 무용수 아니타 드 라 페리에의 초상화 Portrait of Anita de la Ferie, The Spanish Dancer, 1900
몸이 하늘을 한 바퀴 돌아 내려앉은 것일까요? 허리에 가볍게 가져간 손이 다시 펼쳐지면 손은 날개가 되고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몸이 가벼워 보입니다. 날리는 치맛자락은 배경과 같은 흐름으로 이어져 그림 속 무용수는 배경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무섭도록 침착해 보이는 무용수의 눈매에는 도도함이 보입니다. 그럼요, 그 정도의 당당함과 도도함이 있어야지 하늘도 날 수 있고 배경 속으로 숨을 수도 있지요.
세기가 바뀌었지만 파리에서 가장 많이 찾는 초상화가는 볼디니였습니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일필휘지(Master of Swish)의 대가라고 불렀습니다. 'swish'라는 단어가 휙 소리를 낸다는 뜻이니까 막힘없이 흘러가는 그의 기법과는 잘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치히 백작부인의 초상 Portrait of the Countess Zichy, 1905
볼디니의 붓 터치가 잘 보이는 작품입니다. 물 흐르듯 캔버스 위를 스치는 붓이 여인의 몸을 만들어냈습니다. 치히 백작부인의 몸매가 실제로 저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근엄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초상화는 달리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제가 볼디니의 감각에 놀란 것도 이런 표현 때문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백작부인께서 너무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부끄러우셨는지 뺨도 붉어지셨군요.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파리에 모인 외국 출신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와는 달리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들을 그렸습니다. 다분히 퇴폐적이라는 말도 듣는 이 그룹을 오늘날 파리파(the School of Paris)라고 하죠. 볼디니도 그 멤버 중의 한 명으로 분류됩니다.
여름날의 산책 The Summer Stroll
꽃이 핀 소롯길, 성장을 한 여인이 산책을 나왔습니다. 편하게 걷기 위한 것이라면 복장도 편해야 할 것 같은데 파티에라도 나가는 모습입니다. 아련한 눈빛으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복잡한 것들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요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청춘이 아닌 것이 아니라 청춘이기 때문에 아프다는 말이죠. 그런 아픔의 터널을 이겨내고 나면 산책이 끝나는 길 어디쯤, 여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볼디니는 자유분방한 것을 싫어했습니다. 대신 항상 완벽하게 준비된 고급 음식과 좋은 옷,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델들이 캔버스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그의 생활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림이 화가의 정신과 아주 벗어나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죠. 볼디니는 여든아홉의 나이로 그가 사랑했던 파리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멋진 인생이셨군요, 볼디니 선생님! [레스까페 2011.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