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외 7편
이우걸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 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팽이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비누
이 비누를 마지막 쓰고 김 씨는 오늘 죽었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 하나.
도시는 원인모를 후두염에 걸려 있고
김 씨는 쫓기며 걷던 자산동 언덕길 위엔
쓰다 둔 그 비누만 한
달이 하나 떠 있다.
모란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소금
불면의 시대를 각으로 떠서 우는
부패한 시대를 모로 막아 우는
짜디짠 너의 이름을 소금이라 부르자.
마침내 굴욕뿐인 이승의 현관 앞에서
네가 걸어와야 했던 유혈의 가시밭길
이고 진 번뇌의 하늘 그 또한 얼마였으리.
이제는 지나간 역사의 창이라지만
어느 누가 염치없이 네 이름을 훔치려 하나
소금은 말하지 않아도 제 분량의 영혼이 있다.
이름
자주 먼지 털고 소중히 닦아서
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
어머닌 눈 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
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
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
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
상처 많은, 때 묻은, 이름의 비애여
천지에 너는 걸려서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안경
껴도 희미하고 안 껴도 희미하다
초점이 너무 많아
초점잡기 어려운 세상
차라리 눈감고 보면
더 선명한
얼굴이 있다.
카페 피렌체에서
당신이 베니스에 가 있는 동안에도
카페 피렌체에서 나는 차를 마신다
밤 열시 문이 닫히고 귀가하는 그 시각까지
벽에는 두오모 대성당이 걸려 있고
사람들은 기도처럼 하루를 속삭이지만
그곳에 홀로 앉아서 나는 차를 마신다
바닷물은 없지만 곤돌라는 없지만
인생이란 노를 젓는 뱃사공의 하루 같은 것
당신이 베니스에 있는 동안
나는 나를 마신다
- 이우걸 자선 75편 대표시조 선집『비누』 2024. 창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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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외 7편 / 이우걸
김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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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1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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