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3gVsI3PgNrQ?si=VCGj72p2toJtyfGW
알곡과 가라지 비유
오늘 본문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며 살아도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묻자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염려되니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고 답합니다.
실제 밭에서 풀을 매다 보면 이 말씀이 적극 공감됩니다. 예초기를 돌리다 보면 애지중지 키운 호박 넝쿨을 자르기도 하고, 이제 막 열매 맺은 고추대를 베어버리기도 합니다. 풀을 솎아내려다 여주나, 오이 뿌리를 뽑게 되면 봄부터 들이 공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식물도 이럴진대, 우리 삶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경계는 훨씬 더 불명확합니다. 저 사람이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풀인지 작물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생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며 변하는 유기적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마음이 다르고 저녁 마음이 다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듯, 사람이라는 존재는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유기적인 존재입니다. 내 안에 알곡과 가라지의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경계없이 넘나들기도 합니다. 옛날 미국에서 식당 웨이터를 할 때 정말 진상 손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단무지를 먹다가 내려놓고는 먹던 단무지 내놓았다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다른 분들은 아무 불만이 없는데 짜다는 등, 짜장에서 물이 나온다는 등하면서 올때마다 시비를 거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아내와 함께 오신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천사입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대하고 얌전하고 고분고분하시고 아내앞에서는 천사이신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진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천사이십니다. 그럼 이분은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두 가지 요소가 한 사람 안에 다 있는 거죠. 그래서 포기할 수도 없고 뽑아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의도는 어느 누구에게든 가능성과 기회의 문을 열어두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더더욱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자신의 시각으로 규정하고 판단합니다. 상대 안에 곡식적 요소와 가라지적 요소가 있기도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내 시각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의 사모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시골 아줌마처럼 수더분하고 선하기만 하셨습니다. 큰 존재감이 없다 보니 몇몇 교인들은 은연중에 사모님을 무시하기도 했고, 목사님조차 목회 파트너로서 크게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안에서 크게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겉보기에 목회에 큰 쓸모가 없어 보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다 그 사모님이 급성 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모님이 계시지 않자 1,000명이 넘는 교회의 행정과 관리가 완전히 마비가 된 것입니다. 매주일 아무것도 안하는 듯이 보였지만 실제 1000여명이 넘는 교인들을 사모님이 다 관리하고 계셨던 겁니다. 교인이 빠지면 누가 빠졌는데 그 교인의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그 속사정과 내막, 모든 것을 사모님만 아셨던 겁니다. 갑자기 사모님이 안계시니 사람들이 누구 빠졌는지, 그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전혀 파악이 안되는 겁니다. 교인관리가 엉망이 되어 버린 겁니다. 목사님도 부목사님들도 그저 사모님이 챙겨주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존재감이 없어 보였던 사모님이 사실상 교회의 전부를 떠받치고 있던 가장 단단한 '알곡'이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은 100%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가라지라고 규정하는 시각 자체가 문제일수 있습니다. 그 판단 속에는 내 상처, 내 배경, 내 기질이라는 편견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담임목사님은 당신의 목회 방향을 비판하는 교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대신, 그들을 '문제아'로 규정하셨습니다. 심지어 강단 설교를 통해서도 그 가정을 겨냥한 지적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상처받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면 또 다른 가정을 향해 문제적 담론을 이야기 하셨고 끊임없이 '가라지 솎아내기'를 반복하셨습니다. 한 사람씩 솎아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교회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찢어진 깃발만 높이 들고 항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문제적 시각으로만 보면 모두가 문제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큰 문제가 생겨나고 그 문제의 원인을 사람으로 가져가면 사람을 솎아내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솎아냅니다. 그 사람이 나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죠? 그동안 보이지 않던 다른 문제들이 불거집니다. 또 그 문제를 사람 솎아내기 방식으로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져 나옵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거죠.
따라서 공동체 안의 갈등을 '제거해야 할 가라지'로 보면 끝없는 솎아내기의 악순환에 빠집니다. 반면 그것을 다양한 욕구와 존재 방식의 충돌로 바라보면, 서로를 이해하는 품을 넓히는 '배움과 수련의 장'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솎아내는 일은 종말 때로 미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이지 우리의 영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솎아내는 일을 하다가 정말 우리 안의 알곡들 내 안의 알곡들까지 뽑아버리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렇잖아요. 지난 주에 가람지역아동센터 센터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아이들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하셔요. 그분이 63세에 은퇴하시고 지역아동센터를 시작하셨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18년 동안 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 80세가 넘으신 겁니다. 여러분 남들 인생 이제 다 끝났어. 은퇴했으니 실컷 즐기고 살자하는 시기에 그분은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한 겁니다. 지난 주에는 40여명의 아이들 데리고 을왕리 해수욕장 다녀오셨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지는 너무 신나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신은 아이들 정원 45명까지 받을 수 있는데 늘 40명을 안넘기신데요. 혹시라도 너무 급한 위급상황이 있을까봐 늘 3-5명의 정원을 채우지 않으신데요. 갑작스런 위기에 처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한달에 100만원씩 센터에 쏟아붇는데 이 나이에 자식들이 용돈 주는 것, 정부에서 나오는 것 이것 저것 합쳐서 그것 쌓놓으면 뭐할거냐는 겁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그리고 이 나이에 아무리 100만원을 주어도 이 많은 아이들이 대표님 대표님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뿡뿡 안겨주는 그런 사람들을 어디가서 만나냐는 겁니다. 그분은 자신안에 있는 알곡을 정말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분이신 겁니다.
여러분 이분도 똑같은 사람이예요. 살면서 왜 불안이 없고 왜 자기 안에 연민이나 약함에 대한 상처가 왜 없으시겠어요. 딱 보니까 그분이 사업성이 없어요. 사람에 대한 열정은 큰데 폼나게 돈도 끌어오고 사람들도 엮고 그래서 조직화시키는 그런 능력은 약하셔요. 그래서 가족들 돈도 많이 투자하게 하고 나 죽으면 끝나니까 살아생전에 효도하려면 나에게 줄 효도 지역아동센터에 투자하라고 했데요. 이분이 만약에 자신이 잘 하지도 못하는 그런 사업성에 집중한 나머니 자신은 그런 것도 못하는 인간이라는 둥 하면서 스스로 주눅들고 상처받고 자신안의 가라지적 요소에 집중했다면 그분도 인생 60넘어서 제2의 인생을 찬란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어두운 독방에 갇혀 스스로를 자학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 여건에서 자신의 알곡적 요소에 집중하고 일하는 방식도 가족들을 엮어가는 방식도 모두 자신의 알곡적인 요소를 키워가는 방향에 집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목사님 여기에 오는 애들, 다 어려운 아이들이잖아요. 상처도 많이 받고,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와서 살다보니 부모가 한국어를 몰라 아예 한글을 모르는 애들도 많이 온데요. 그런데 그런 애들이 언어 적응도 못하니 삶이, 성격이 안정적일 수 있겠어요? 그런데요 목사님 그 친구들도 소중한 생명이잖아요. 그러시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들 모두에게는 살면서 빛과 어둠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소중한 생명들이 하나님의 빛, 알곡적 요소들 잘 키워 정말 찬란하게 빛나는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분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싶고, 제대로 살고 싶고 의미있는 존재로 존재하고 나이들고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합니다. 누구나 다 선한 존재로써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 진정성을 키워주는 귀한 공동체로 나이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나이 들면 상처받을 일도 실수할 일도 딱딱하게 굳어가는 내모습 타인의 모습속에서 움츠러들일도 많을 텐데 그럴때마다 솎아내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좀 더 여유롭고 느긋하고 때때로 약간의 공존과 존중의 거리도 두면서 내안의 그리고 서로안의 삶을 향한 애틋한 진정성, 알곡적 요소에 앵글을 맞추고 빛을 비추며 서로 용기내어 저마다의 알곡을 키워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힘주고 지지하는 그런 귀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풍성히 가꾸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다시금 성찰해 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삶과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성급히 규정하거나 솎아내려는 시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존재감이 없어 보이던 사모님이 사실상 교회의 심장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가라지라 여기는 이들도 공동체에 꼭 필요한 알곡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오늘의 모습만으로 내일을 단정할 수 없고, 문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소중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기질과 배경이 모여 갈등과 차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품을 넓히는 배움의 장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가라지적 요소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솎아내는 삶의 방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알곡적 요소에 집중해서 풍요로운 삶의 시간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자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주도 이런 귀한 역사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