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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정치우,정치석,정치화 추모비 제막식
1, 일시 : 2017년 11월 30일
2, 장소 :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앞(정규식 지사 추모비 옆)
3, 주최 :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회
4, 후원 : 영천시 . 경북남부보훈지청 . 광복회
참석자 : 100명
접수처
전체 모습
축 화환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지사님께 묵념
경과보고
후손대표 정연체 인사말씀
영천항일선양사업회장 박진규추념사
영천시장 김영석축사
정치우 애국지사와 산남의진
故 정치우(鄭致宇)는 본적지에서 1870년11월 3일 父 정유경(鄭裕璟)과 母 이경이(李敬伊)의 2남중 2남으로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한학을 배워 학덕이 높았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이 있어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1892년부터 본적지 소재 추모당에서 훈장으로 문중 및 지역민 자제들의 유학교육에 몰두하고 있던중. 4종형인 정환직(鄭煥直)이 1905년12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의논하여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관동으로 진군할 것을 결의하고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창의할 것을 명하자, 정용기(鄭鏞基)는 곧바로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영천창의소를 마련, 경고문 및 통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내부찬획 담당자 지역의 연락 담당 및 각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의병모집에 착수하였다. 이때 정치우(鄭致宇)는 친형인 정치석(鄭致錫) 등과 함께 영천지역 소모활동 책임자로 임명되여 젹극적인 소모할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삼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정치우(鄭致宇)는 좌익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정용기(鄭鏞基) 대장의 지휘하에 신돌석(申乭石)의병진을 돕기 위해 영해 방면으로 이동중, 경주진위대의 신석호(申奭鎬)의 간계로 정용기(鄭鏞基) 대장이 체포되자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의 지휘하에 영일. 청송. 영덕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1906년 6월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재차 거의를 위한 준비에 전념하였다.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鄭鏞基)가 1907년 4월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창의할 때 영천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영천. 영일. 청송등지에서 전개된 여러 차례의 항일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산남의진의 관동지방으로 북상을 결의하고 군수준비와 지방연락 및 감시책임자를 파견할 시 정치우(鄭致宇)는 영천지역 책임자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산남의진이 관동지방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입암전투에서
정용기(鄭鏞基) 대장을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하였다.
서울에서 급히내려온 정환직(鄭煥直)이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여 남은 장령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다시 북상준비를 위해 각 지역으로 흩어져 있던 부대들에게 합류를 통보하는 한편, 여러 부장들을 각지로 보내어 군사소집과 순수품 및 군자금을 모금하도록하였다.
이때 정치우(鄭致宇)는 이두규(李斗圭)와 함께 영천 지역 군자금 모금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영천. 영일. 청송 등지에서 전개된 항일전투에 참전하였다.
1907년 11월 7일 4종형인 정환직(鄭煥直) 대장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였다가 다시영천으로 이송되어 1907년 12월 총살, 순국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은신하며 항일을 지원하다가 1941년 7월15일 광복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정치우 애국지사 연혁
1870. 11.3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971번지에서 출생
1878 ~ 1888 문중 어른으로부터 한학 사사
1892 ~ 1906 훈장(용산리 추모당)
1906, 3 ~ 6 영천, 영일, 청송에서 의병 소모활동 및
산남의진 좌익장으로 활동
1907, 4 ~ 9 영천 지역 활동 책임자 및 각 지역 항일전투에 참전
1907, 9 ~ 11 영천지역 군자금 모금 책임자 및 대일항전 전개
1907,12 ~ 1941 은신하여 항일운동 지원
정치우(鄭致宇 1870, 11, 3 ~ 1941, 7, 15,)
정치우 지사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덕이 매우높았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이 있어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1892년부터 본적지 소재 추모당에서 훈장으로 지역민 자제들의 유학 교육에 몰두하고 있던중 을사늑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도자 1906년 3월 산남의진 결성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의진의 좌익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07년4월 영천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영천, 청송, 영일 등지에서 전개된 앙일전투에 참여하여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두규와 함께 영천지역 군자금 모금 책임자로 항일활동을 지원하다가 1941년4월 서거하셨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2017년 11월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정치석 애국지사와 산남의진
故 정치석(鄭致錫)은 본적지에서 1868년 1월15일 父 정유경(鄭裕璟)과 母 이경이(李敬伊)의 2남중 장남으로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한학을 배워 학덕이 높았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워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1890년경부터 본적지 소재 추모당에서 훈장으로 문중 및 지역민 자제들의 유학교육에 몰두하고 있던중. 족친인 정환직(鄭煥直)이 1905년12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의논하여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관동으로 진군할 것을 결의 하고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창의할 것을 명하자, 정용기(鄭鏞基)는 곧바로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영천창의소를 마련, 경고문 및 통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내부찬획 담당자 지역의 연락 담당 및 각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의병모집에 착 수하였다. 이때 정치석(鄭致錫)은 동생인 정치우(鄭致宇) 등과 함께 영천지역 소모활동 책임자로 임명되여 젹극적인 소모할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삼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어 정용기(鄭鏞基) 대장의 지휘하에 신돌석(申乭石)의병진을 돕기 위해 영해 방면으로 이동중, 경주진위대의 신석호(申奭鎬)의 간계로 정용기(鄭鏞基) 대장이 체포되자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의 지휘하에 영일. 청송. 영덕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1906년 6월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재차 거의를 위한 준비에 전념하였다.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鄭鏞基)가 1907년 4월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창의할 대 동생 정치우(鄭致宇)와 함께 소모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영천. 영일. 청송등지에서 전개된 여러 차례의 항일전투에 참전하였다,
산남의진이 관동지방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입암전투에서
정용기(鄭鏞基) 대장을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하자.
서울에서 급히내려온 정환직(鄭煥直)이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여 여러 부장들을 각지로 보내어 군사 모집과 군수품 및 군자금을 모금 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치석(鄭致錫)는 영천 지역 군자금 모금 책임자로 임명된 동생 정치우(鄭致宇)를 도와 군자금 모금 및 소모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7일 족친인 정환직(鄭煥直) 대장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였다가 다시영천으로 이송되어 1907년 12월 총살, 순국하자 은신하며 항일활동을 지원하다가 1931년 6월22일 광복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정치석 애국지사 연혁
1868. 1. 5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962번지에서 출생
1875 ~ 1886 문중 어른으로부터 한학 사사
1890 ~ 1906 훈장(용산리 추모당)
1906, 3 ~ 6 영천 지역 의병 소모활동 책임자로 활동
1907, 4 ~ 11 영천, 영일, 청송,지역에서 동생 정치우와 함께
영천 지역 군자금 모금 및 소모활동 전개
1907,12 ~ 1931 은신하여 항일운동 지원
정치석(鄭致錫 1868, 1,15 ~ 1931, 6, 22,)
정치석 지사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한학을 전수하여 학덕이 매우높았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하여 주위 사람 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으며 칭송이 끊이지 않은 모범중의모범인이었다.
1906년 3월 산남의진 결성되자 동생인 정치우와 함께 영천지역 소모활동자로 임명되어 적극적인 소모활동하였다,
1907년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창의할 때 동생 정치우와 함께 소모활동에 전념 하였으며 영천, 영일, 청송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정치석지사는 고향에서 은신 하면서 항일활동을 지원하다가 1931년6월에
서거 하셨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8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년 11월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정치화 애국지사와 산남의진
故 정치화(鄭致化)의 본관은 영일, 자는 예중(禮重), 초명은 정치열(鄭致烈)이다. 영천출신으로 아버지는 정유보(鄭裕保). 어머니는 이씨이다. 정치화(鄭致化)는 산남의진 대장 정환직(鄭煥直)의 4종제(四從弟)로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진의 중심인물로 참여하여 물자지원 및 연락책을 맡아 항일투쟁을전개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영천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이다, 을사늑약으로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자, 광무황제의 밀지 받은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은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의병을 일으키록 하였다, 아버지 뜻에 따라 정용기(鄭鏞基.1862~1906)는 1906년 3월 영천을 중심으로 삼남의진을 결성하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정환직의 4종제였던 상기인 정치화(鄭致化)는 의병모집 등 창의 과정에서 물자를 지원하고 연락을담당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산남의진의 창의를 위해 각 군(郡) 통모자(通謨者,연락책)를 선정하였는데, 이때 정치화(鄭致化)는 (6촌) 정치석(鄭致錫, 정치우(鄭致宇) 등과 함께 이 임무를 맡았다, 잉ㅘ 더불어 특히 그는 자신의 사재를 의병자금으로 후원함은 물론 소집 및 군자금 모금에 힘써 산남의진이 활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산남창의지(하)"와 "산남의진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거의 초기에 수차례 오가며 통모(通謀)하였다 (산남창의지)
성품이 단아하고 가계가 부유하였다, 처음에 물력으로서 진후를 언조하였고, 후에 은적하였다 (산남의진유사)
그뒤 1차 대장 정용기(鄭鏞基)에 이어 대장 정환직(鄭煥直)마저 순국하고 의병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개탄하며 은거하다가 1942년 생을 마감하였다.
정치화 애국지사 연혁
1868. 1. 5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947번지에서 출생
1906, 3 ~ 1907 경북 영천 지역 산남의진 창의에 참여
영천지역 소모책임. 물자지원.
1907, 4 ~ 1907 군자금모금 및 소모활동 전개
1907 ~ 1942 의병 실패 후 시세를 개탄하며 은거
항일활동지원
정치화(鄭致化 1868, 7, 8 ~ 1942, 8, 15,)
정치화 지사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출신이다.
단아한 성품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으며 맡은바 책임을 완수하는 마음을 가진 청년 이였다,
1906년 산남의진이 결성되자 의병모집 등, 창의 과정에서 물자를 지원하고 , 연락을 담당하는 큰 역할을 맡아 임무를 완수하는 모범을 보였다,
연락책 임무를 맡은 지사는 자신의 사재를 의병자금으로 후원 하였으며 부족한 군자금 모금운동에 크게기여하여 오다가 의병활동이 실패로 끝나자 개탄하며 은거하다가 1942년 8월 서거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기려 2016년8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년 11월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제막 컷팅
첫댓글 애국지사 세 분의 제막식을 한 어제 날씨는 올해 겨울이 되어가는 날 중에서는 최고로 추운날씨였습니다. 겨울도 따뜻할때 보다는 훨씬 더 추웠던~ 그런 날씨 임에도 불구하고 100명 정도 되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자리가 빛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삼휴공 문중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우리 문중의 위력을 느낄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만~~ 당연히 그렇게 한게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란걸 생각합니다. 구한말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는 어려운 때를 맞아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애국지사의 길을 걸어가셨던, 저한테는 증조할배 뻘 되시는 어른들이 이렇게 늦게 이제셔야 애국지사가 되시고 추모비 제막식을 하는데 참석해서 좋았습니다.
삼남의진은 삼휴공의 8세손이신 대장 동엄공과 이번 추모비를 새운 셋 애국지사님이 적극적인 참여로 항일의 큰 전과를 올린 운동입니다. 늦게나마 공을 인정받아 삼휴공의 유적비 아레에 새워져 우리 문중으로서는 매우 큰 경사였습니다. 인구서당에서 글 공부하다 붓을 던지고 의진에 참여하신 정치석, 정치화, 정치우,정진소, 정진영, 정진구, 정연호지사님 중 셋 어른만 추서를 받으셨는데 앞으로 노력하여 남으신 어른분들도 추서받도록 노력함이 후손의 도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