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몸에 변화가 왔습니다. 아내를 보자마자
“공주서 왔어?”
그 말에 간병인까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간병인이 어머니에게 아내 박명순을 가리키며.
“누구지요?”
“며느리.”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들과 며느리의 이름도 잊은 채 쓸쓸하게 웃기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서산 아파트에 혼자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나는 정년퇴임 이후에도 일주일 간격 방문으로 의무 효심을 표시 냈었고 93세 어머니는 병상으로 옮기기 사흘 전까지 65세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셨답니다.
“직장을 다니지 않을수록 깔끔해야 한다.”
“머리를 깎아라.”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내 구두코를 반짝반짝 닦아놓곤 하셨답니다.
격동의 시국 그 젊은 어드메쯤,
깔끔을 떠는 가족들에 대한 반발로 꾀죄죄풍을 고수하는 초입 작가라면 어이없는 사태인가요? 구두 뒤꿈치를 밟지 않은 것도 마흔이 넘어서였답니다.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학교를 쫓겨나고 매스컴에서는 날마다 둘째아들 강병철과 그 조직들을 음해하는 전파로 뒤숭숭한 나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보며.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는 거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나랑 농사 짓자.”
가족들 중에서 가장 의연한 표정을 짓기도 했답니다.
그 대전 홍도동 시영아파트에 가끔 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어디 있소?”
“밖에 나갔는데 어디를 갔는지는 모르오.”
“고등학교 선생까지 했다는 아들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요.”
“그런 짓이라니? 여보쇼, 내 아들은 소설가라요. 소설가가 소설을 썼다고 학교를 쫓아낸 사람들이 잘못이지요. 그런 소리하려면 절대 오지 마시우.”
노여움을 드러내기도 했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붕어빵을 사와서 혼자서 먹었습니다. TV 앞 소파에 누워서 먹는데도 야단치는 사람이 없네요. 벚꽃 떨어진 가지마다 도장병처럼 듬성듬성 흰색이 남아있네요.
죄송합니다. 날마다 반성에 사무쳐야 하는 시국의 흔적들은 기껏 브라운관으로만 만나면서 가정사에 매달리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