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훈장
최정열
땅덩어리가 이글이글 끓어오른다. 새빨간 태양의 열기가 그대로 땅위를 그슬리고
그 열기는 세상을 녹여버릴 듯이 교정에 가득 차 있다. 케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씻어 내리면서 교실 밖을 불안한 기색으로 훔쳐본다. 분명히 있었다.
다리를 절면서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땟국이 줄줄 흘러내리는 머리는 마치 일부러
누가 뽑은 듯이 반쯤 빠져 있다. ‘왜 왔을까?’ 케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안절부절
하면서 밖을 훔쳐보다가 아무래도 뒷문으로 나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른 학생들의 눈에 띠면 어쩔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은 벗어나야만 했다.
살금살금 뒷문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담임선생이 그런 케이를 보았던 모양이다.
"케이! 네 아빠가 앞에서 기다려!"
그 순간 케이는 뒷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담임선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허름한 몰골의 아빠가 케이를 불렀지만,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더욱 창피해진
케이는 그대로 뒷문으로 도망쳐서 뜨거운 열기 속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작은 골목은 왠지 모르게 케이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이렇게 세상에서 숨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케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케이가 숨어있는 골목으로 스텔라와 자넷이 다가왔다.
"케이, 왜 그렇게 도망갔어?"
케이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아빠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창피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약간은 하얀 피부 때문인지 입술은 빨갛게 부풀어 오른 듯이
보였다. 스텔라와 자넷이 그런 케이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케이, 맥도날드 갈래?"
케이는 어디든지 가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래서 이 구차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맥도날드 안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케이의 작은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케이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싫었다. 꼭 자신의
구차한 모습을 그들이 알아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텔라와 자넷이 그런 케이의
표정을 보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데 가자."
스텔라가 말하자 자넷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넷이 차라리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하긴 자넷의 집에는 밤까지 아무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케이가 말이 없자 자넷이
케이의 작고 여린 손을 잡아 이끌었다.
다른 집들과 비슷하게 자넷의 집도 엉망이었다. 오래되어서 페인트가 벗겨진 벽은
속살의 상처를 내보인 채로 열기에 허물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열 때 삐꺽
소리가 마치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집안에서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케이는 술 냄새를 싫어했다. 그것은 바로 아빠의 냄새였다.
역한 인생 패배자의 냄새. 케이는 절대로 아빠처럼 그런 인생의 패배자는 되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다.
자넷이 냉장고를 뒤져서 콜라와 과자를 가져왔다. 스텔라가 콜라 병을 케이에게 주었고,
케이는 콜라를 병째로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케이가 콜라병을 자넷에게 넘겨주자
자넷도 그대로 병째로 마셨다.
"자넷, 스텔라! 생각해 봤어?"
스텔라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 네가 간다면 나도 갈 거야."
케이는 자넷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스텔라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딱 3년만 갔다 오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엔 직장을 잡고."
스텔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무조건 이라크에 보낸다는데...."
"이라크에 가더라도 나는 갈 거야."
케이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 아니 지긋지긋한 아빠에게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하겠다는 것이 케이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못하다고 해도 지금의 생활보다는 나을 것이다.
케이는 다 허물어져 가는 집으로 살금살금 들어가서는 이내 집 뒤로 돌았다.
집 뒤에 겨우 붙어있는 작은 게딱지같은 창고 방이 바로 케이가 그렇게 빠져
나가고 싶어 하는 집이다. 이것도 집 주인이 케이 아빠의 사정을 봐줘서 있는
것이었고, 언제든지 나가라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도 없는 방이니 주인은 그저 케이 네를 거기서 살게 해주는 것이다.
방문을 살짝 여니 곰팡이 냄새와 함께 역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아빠는 술에
취한 채 골아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빠의 삶이고 절대로 바뀐 적이 없는
케이의 생활이기도 했다. 케이는 아빠가 깨어날까 봐 살금살금 걸어서 귀퉁이에
합판으로 대충 막아서 놓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소리가
케이의 발걸음을 잡았다.
"이제 들어오니?"
케이는 아빠와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아빠는 케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리로 와서 앉아봐라. 할 얘기가 있다."
"그냥 하세요."
케이는 선 채로 이렇게 대답했다.
"꼭 군대에 가야만 하겠니?"
하마터면 케이의 입에서 큰소리가 나올 뻔했다. '그래요! 아빠가 없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가겠어요,' 하고 말이다.
"힘들 거다. 특히 너 같은 소녀에게는."
아빠의 목소리에 왜 물기가 묻어날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런 목소리.
아빠는 절대로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었다. 케이는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아오를 것
같아서 그냥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냄새 나는 침대에 누운 케이의 눈에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생 병에 들어 일어서지도 못했던 엄마. 케이는 눈물을 훔쳐
닦으며 잠을 청했다.
입대 시험 점수는 그런대로 잘 나왔다. 함께 가겠다는 스텔라와 자넷은 보이지도 않았다.
모병관이 다가와서는 케이에게 미소를 보였다. 모병관의 말은 케이가 시험을 잘 보았으니
원하는 병과에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케이는 이제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지겨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케이는 아직 18살이 되지 않았으니
부모님의 입대 동의 사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케이는 그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18살이 되려면 아직 2개월이 더 남았다. 그렇다고 2개월을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빨리 집에서 나가는 것이 케이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케이는 아빠에게 서류를 집어 던지다 시피 건넸다. 아빠는 술에 취해 몽롱한 시선으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사인 해 달라고 간단하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는 냉정한 표정을
얼굴에 흘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케이는 아빠가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다. 만약에 아빠가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면 사인을 가짜로 라도
해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류를 먼저 보았다. 다행히 아빠는 사인을 해 놓았다.
케이는 서류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자는 줄 알았던 아빠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졸업식은 해야 하지 않겠니?"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졸업장은 나왔다. 이미 수업은 끝났으니 말이다.
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분명히 독일로 간다는 옵션을 받았는데
이라크로 파병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본 훈련을 마치고 병과교육을 받는데
그런 소문이 돈 것이다. 벌써 이라크에서는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났고,
미군들은 이라크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떤 병사는 아예 탈영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케이는 불안한 소문을 듣더라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간신히
아빠에게서 탈출을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독일이건 이라크건
간에 여기서 끝을 봐야만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는다.
독일 11연대 기갑부대 전체가 이라크로 파병이 되었다. 그러니 독일행이
자연히 이라크행이 된 것이다. 케이는 병과교육을 마치고 바로 자대 11연대
기갑부대 보급 병으로 발령이 났다. 이제 할 수 없이 이라크 전선에 가야만 했다.
병과교육 졸업식. 많은 군인 가족들이 몰려와서 졸업식을 축하하고 있지만 케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케이에게는 속이 편했다.
"헤이, 박이병! 졸업한 소감이 어때?"
교관이 케이의 어깨를 툭 치면서 미소를 짓는다. 케이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경례를 붙이는데 그 옆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 순간에 술 냄새를 맡았을까? 아빠의 모습. 정말로 형편없는 술 중독자의
모습이다. 그래도 양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몸에서 자욱이 풍겨나는 술 냄새는 가릴 수가 없었다.
"박이병, 아빠와 함께 내가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교관이 도대체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할 게 있단 말인가? 케이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빠와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는 그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교관은 아빠에게 이상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그가 아빠와 굉장히
친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이제 전쟁터로 나가는 부모에게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케이는 노골적으로 아빠를 외면했다. 거친
피부와 잘 깎지 않아서 마치 쥐가 뜯어먹은 것 같은 수염, 번들번들 땟국이 흐르는
머리카락. 새빨갛게 변한 코. 그리고 절룩절룩 비정상으로 걷는 걸음걸이가 케이의
신경에 거슬렸다. 아빠는 몽롱한 눈빛으로 케이에게 다가왔고 케이는 등을 돌린 채로
있었다. 아빠는 잘 다녀오라는 단 한마디만 했다.
딱 한마디. 왜 그게 그렇게 서럽게 들렸는지 모른다. 아빠가 그 말을 하고 절뚝절뚝
걸어가는 뒷모습에 케이는 참았던 눈물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
병과교육장에서 바로 군용항공기로 이동된다고 했다. 케이는 더플 백을 손에 쥐고는
트럭에 오르려고 했다. 그때 교관이 케이에게 다가와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빠를
위해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말을 했다.
교관은 여태까지 케이를 박 이병이라고 불렀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케이는 트럭에 올랐다.
이제 케이만의 세상으로 날아가야만 했다.
무지막지한 열기와 사막의 바람이 케이를 괴롭혔다. 특히 방탄복에다
중무장은 정말로 조그만 소녀의 몸으로는 견디기 힘든 무게로 눌러댔다. 철모
아래로 내려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군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손으로
들고 있어도 무거운 방탄복은 케이의 힘으로 지탱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참고 이겨야만 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총탄이 쏟아질지 몰랐고, 갑자기 나타나는
적군들의 기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지급된 MRE(Meal ready to eat; 비상식량. 흔히 C-레이션이라고 했음)를 까먹다가도
총소리가 나면 그대로 팽개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사람이 두려웠다. 특히
사막지대를 가다가 나타나는 사람들은 거의가 적군이었다. 미군들은 적군에 시달리고
또 사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정말로 고통을 주는 것은 기후였다.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인을 모두 말려 죽이겠다는 듯이 낮에는 온몸을 온통 태울 것 같은 열기가 살갗을
마구 찔러댔고, 밤에는 손가락도 펴지지 않을 정도의 추위가 엄습했다. 정말로 왜 이
나라에 와서 이런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인종들이 다 모여 있는 미군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병사는 전쟁에 미쳐 있었다. 그저 총을 들고는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방아쇠를 당겼고, 어떤 병사는 자신이 마치 영웅인 양 멋진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많은 병사들이 전쟁에 겁을 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총소리가 나면 그대로 납작 엎드려서 덜덜 떨고만 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케이는 이런 여러 인종의 군대에서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케이의
가슴속에는 어떻게 하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흙으로 대부분 지어져 있는 앙상한 몰골의 이라크의 집들.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지었기에 오래된 집들은 부석부석 먼지를 내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흙으로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서져 내리는 것이다. 케이의 소대는 인적이 하나도 없는 인가를 하나하나
수색해 나갔다. 목이 말랐다. 타는 태양이 그대로 케이를 말려죽일 듯이 쏘아
내려왔다. 케이는 손을 뒤로해서 수통을 잡았다. 그 순간 아무도 없던 인가에서 갑자기
그림자가 하나 불쑥 나타났다. 어헉! 케이는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었다.
항상 어디서곤 나타날 수 있는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케이의 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케이는 황급히 총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탕탕탕탕!
총소리가 마치 먼 모래바람이 질러대는 장송곡과 같이 들렸다. 케이는 그대로 쓰러진
채로 몸을 웅크렸다.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초췌한 얼굴이
떠오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은 이 세상에
남긴 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암흑으로 사라질 것이다.
"일어나! 이 바보야!"
누군가가 케이를 발로 찼다. 케이는 꿈을 꾼 듯이 눈을 떴다. 아직도 태양이 눈에
보이는 것이 마치 신기루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죽은 것이 아니었나? 세상은 한번
꾸었다 사라지는 가벼운 꿈은 아니었을까? 케이는 자기를 발로 찬 병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총구에서 아직도 흘러나오는 연기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마약의 연기와
흡사한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음악의 운율과도 같이 느껴졌다. 케이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총구멍이 벌집처럼 나있을 것이다. 그러나 총구멍은 케이의 몸에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케이의 전방에 나타났던 적이었다. 그는 그대로 벌집이 되어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직도 솟구치는 핏줄기에서 왜 분수대가 연상될까
케이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을 마시더라도 절대로 으슥한 곳에서 마셔서는 안 된단 말이야!"
케이를 구한 병사는 화약 냄새가 나는 총을 오른손으로 들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케이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다가 허덕 숨을 멈추었다. 그 병사의 손도 자기와 똑같은
황색이었다. 그의 손에서 강인한 근육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에 대한 아주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난 킴이라고 해!"
케이는 킴의 계급을 보았다. 스텝 서전(Staff Sergeant, 하사)이었다. 케이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인생의 중압감을 느꼈다. 마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은 거대한 바위 같은 느낌.
그는 천천히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으려고 얼굴에 썼던 스카프를 벗었고. 그 얼굴을 본
케이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먼 이국의 전쟁터에서
같은 동족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반가운 줄 몰랐다. 킴에게서는 강인한 냄새가 났다.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승리의 냄새. 지금까지 케이가 느꼈던 남자의 냄새는
오직 아빠의 냄새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역한 패배자의 술 냄새. 아빠의 냄새에 비하면
킴의 냄새는 너무나 강인한 남성의 냄새였다.
"자, 다음에 보자. 박 이병."
그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케이는 갑자기
세상이 확 바뀐 느낌이 들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기분.
김 하사는 바로 같은 소대로 편입되어 온 스쾃 리더(분대장급)였다. 그는 벌써 상당한
전쟁 경험이 있던 것처럼 보였다. 케이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도 못했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왜 그 순간 자신이 벙어리가 되어있었나 하는 의문도 일었다. 케이는
낮 시간 내내 안절부절 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밤이 되자 김 하사의 천막으로 그를
찾았다. 김 하사는 총기를 소제하다가 케이를 맞았다. 그를 보는 케이의 가슴이 자신도
모르게 콩콩 뛰어댔다.
"어, 그래. 박 이병. 거기 앉아."
김 하사는 예의 그 강인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케이에게 자기 간이침대의
한쪽 끝을 가리켰다. 케이는 주춤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흘끗 김 하사의 모습을 살폈다.
모래바람에 약간 거칠어진 피부는 오히려 철갑처럼 느껴졌고, 총기를 소제하는 그의 걷어
올린 팔뚝에는 강력한 근육들이 마치 기계처럼 움직여댔다.
"너는 이번에 입대했지? 그래 군대 생활은 견딜만해?"
케이는 고개만 아주 조금 끄덕였다. 왜 그런지 그의 앞에서 자꾸만 자신이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 같이 어린 소녀에게는 힘들 텐데."
"고마워요."
케이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김 하사는 소제하던
자신의 총기를 옆으로 치우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가?"
"아까 낮에..."
"잊어 버려. 하지만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돼. 알았지?"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 하사가 MRE를 하나 잡아서 북 뜯는다. 보통 미국 병사들도
저렇게 뜯어내지 못하는 특수 비닐 포장이었다. 그는 봉지 안에 손을 넣어 안에 있는
과자를 꺼내 케이에게 건네고는 저도 하나를 입에 서슴없이 집어넣고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한국 사람이지요?"
"음. 그렇지. 너도 한국 사람이지?"
케이는 조금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한 번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한국인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한국 사람일 뿐이야."
케이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한국인의 특징이야. 너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알았지?"
"케이예요."
비로소 케이는 자신의 이름을 그에게 말해본다.
"그래. 나는 경호라고 해. 김경호!"
케이는 그 이름을 찬찬히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의 이름이 어떤 강한 의미가 되어서
케이의 가슴속에 뱅뱅 맴돌았다.
적군의 대대적인 기습이 감행되었고, 미군들은 그들에게 집중 포화를 가했다. 전쟁은
이미 승리했다고 몇 년 전에 발표가 났지만, 그것은 잘못된 발표였다. 전쟁은 그 발표가
난 순간서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누구의 승리도 패배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은 이라크에서 철군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월남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도
승리로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찰리 컴퍼니, 집합!"
또 어디론가 이동이 있거나 순찰이 있는 모양이었다. 케이는 알파 스쾃에서 분대를
인솔하고 떠나는 김경호를 눈으로 따른다. 아니 그녀가 막사에서 그를 만났던 이후로
케이의 눈은 항상 그를 찾아 헤맸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다. 여태까지 케이의 기억에 새긴 남자는 오직 패배자인 아빠뿐이었다. 하지만 아빠와는
달리 그는 강인했고, 용기가 있었고, 또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남자였다. 마침내 케이의
분대도 다른 분대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무지 사막이다. 마치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인 양, 이곳은 자연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버림받은 땅이었다. 먼지가 일면 그대로 코며 눈에 마구 들어오기에
눈 보호안경을 쓰고 스카프를 코 위까지 뒤집어썼다. 앞쪽에 인가가 보였다. 인가가 보인다는
것은 위험이 있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인가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바로 위험에 노출된 상황인
것처럼 모두 긴장하면서 길 양 옆으로 몸을 우선 숨겼다. 한 분대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낮은
포복으로 전진하고 다른 분대가 극도로 경계하면서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언제 적군의 재래
포탄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 항상 적군은 재래식 무기로 미군을 등 뒤에서 괴롭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격과 저항은 이념이나 종교가 살아있는 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듯싶었다.
인가로 가까이 들어서는데 갑자기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부비트랩이라는 것에 누가 걸렸을
것이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고 미군들은 혼비백산해서 그 자리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 순간을 시작으로 포탄이 마구 쏟아졌고, 케이의 옆에서도 폭탄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이 총알이 시뻘건 불꽃을 내며 날아온다. 머리만 내밀면 그대로 불꽃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미군들의 응사가 시작되고, 곧바로 지원 병력의 요청하는 무전신호가
요란하게 울렸다.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천지를 흔드는 굉음. 이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저주 받은 땅에서 일어나는 지옥불의 향연.
한 차례의 폭격이 지나가자 적군들의 대항은 한층 수그러졌다. 돌격 명령이 떨어졌고,
분대는 낮은 포복으로 건물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케이의 발밑에 뭔가 끼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케이에게 쇠꼬챙이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움직이지 마!"
케이는 온 세상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곳곳에 적군이 매설된 지뢰가 있었지만 이렇게
자신이 밟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분대원들은 삽시간에 멀리 떨어졌다. 만약에 지뢰가 터진다면 케이는 물론이고, 다른 병사들도
부상을 입게 되었다. 분대장이 다급히 지뢰 해체반을 소리쳐 부르지만 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서로의 대화도 불분명했다. 케이는 얼어붙은 상태에서 갑자기 아빠의 생각이 났다. 아빠의 상황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아빠를 배척해서 아빠가 사회로부터 고립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케이, 그대로 있어. 조금도 움직이면 안 돼!"
케이에게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조금 마음에 안심이 되었다.
김경호가 한 손에 대검을 들고서 케이에게 다가왔다. 그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케이는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순간에는 강인한 그도 긴장하는 모양이었다.
김경호는 케이를 안심시키려는지 말했다.
"케이, 노래를 불러봐! 아는 노래를 불러!"
김경호는 케이의 발밑을 극도로 조심하면서 대검으로 찔러나갔다. 케이는 노래를 부르려고
했지만 아무런 노래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김경호가 이렇게 노래를 시작하자 케이는 용기를 내서 그것을 따라 불렀다. 노래를 하자
약간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
노래를 부르면서 케이는 아빠와 그 창고 방을 생각한다. 왜 갑자기 집이 그리워질까?
그 구차한 집을. 아빠의 주름 깊게 패인 얼굴. 술 냄새. 그것들이 케이의 머리에 온통 물에 풀린
잉크처럼 번져나갔다.
"잠시만 있으면 돼! 알았지, 케이?"
그때 앞서간 분대원들과 적군들과의 교전이 다시 시작되고 폭탄이 쏟아져 내렸다. 케이는
견디지 못하고 김경호의 철모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그의 철모에서는 온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 폭탄이 떨어지고 케이는 몸을 조금 웅크렸다.
"안돼! 움직이지 마!"
클릭 소리가 들리고 김경호가 거세게 케이를 미는 느낌이 들고는 케이는 자신의 몸이 갑자기
붕 뜬다는 생각을 했다. 거대한 폭발음. 그것은 세상을 온통 잡아먹고는 모든 것을 침묵 속에 잠기게 만들어 버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마치 검은 칠을 해 놓은 것 같다. 케이는 자신이
암흑에 갇혔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암흑이 자기를 꽁꽁 묶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는 과연 어디인가? 지옥? 죽어서 지옥에 온 것일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아우성이다. 적군과 아군의 교전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부상자들의 절규 같은 것이다.
"박이병, 정신이 드나?"
말소리가 의미로 바뀌면서 케이는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만류했다.
"그대로 있게. 자네는 많이 다쳤어."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이 김경호였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 하사님은?"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대해 아무런 대답이 없다. 순간 케이는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온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저 흑흑 흐느껴 울었다. 잠시 후에 약간은 어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있네."
그 말이 너무도 고마워서 손을 내밀었다. 군의관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케이는 김경호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마치 노래라도 하는 것처럼 떠다녔다.
케이는 바그다드에 있는 미군병원에서 얼마 후에 본국으로 이송되었다. 케이는 왜 병원에서 자신의
머리 붕대를 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은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미국으로 이송하는
것을 보아서는 자신이 큰 부상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아무리
김경호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해도 그가 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도 큰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아무튼 케이는 머리에 감고 있는 붕대가 갑갑하기 짝이 없었고, 또 김경호를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미군 병원에 이송된 뒤로도 케이는 김경호를 찾았지만 김경호에 대한 소식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며칠 후에 병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말한다.
"박 이병, 누가 찾아왔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케이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여기에 찾아올 사람은 김경호뿐이 없었다. 갑자기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케이의 마음에는 강인한 목소리의 김경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냄새가 났다. 술 냄새? 누군가가 케이의 병상 옆에 앉는다.
케이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냄새도 역겨웠지만 그 울음이 너무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빠의 못나고 지겹도록 피곤한 패배자의 울음소리.
"왜 오셨어요?"
케이는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옆에만 앉아서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가세요. 나도 곧 다시 군대로 돌아갈 거예요."
케이의 마음이 답답해왔다. 아빠가 옆에 있다는 자체가 싫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박 이병, 자네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네. 그래서 아빠가 오신 거야."
"뭐라고요? 내가 왜요?"
"자네는 지뢰의 파편으로 두 눈을 다 잃었네. 명예제대를 하는 거야."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힌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실명이라니?
"노, 노! 노! 아냐! 아니라고!"
케이는 몸부림을 쳤다. 몸부림치는 케이를 위로하려고 아빠가 케이의 손을 잡았지만 케이는 그것을 거세게 뿌리쳤다.
"싫어! 안 돼!"
케이의 울부짖음과 몸부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병실을 울렸다. 아빠의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케이는 생활이 싫었다. 아빠가 해주는 밥도 먹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눈이 없으니 어디에 나갈 수도 없이 그녀는 술을 마셨다. 아빠가 옆에 있다는 것이 더욱 케이를
괴롭혔다.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음보다도 못한 것이다. 정부에서 나오는
적은 생활비와 혜택으로 근근이 연명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케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케이는 자신이 아빠를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술주정뱅이가 되어서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면서 골방에 갇혀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아빠처럼 자신도 이제 완전한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케이의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아빠와 같이 술 중독자로써 인생 패배자의 모습뿐이었다.
정부에서는 케이에게 재활훈련을 통한 새 삶의 방법을 권유했지만
케이는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아빠가 싫듯이 정부도 싫었다. 모든 것이
그들의 탓이었다. 아빠가 없었다면 케이가 군대에 갈 이유도 없었고,
또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실명할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아빠 탓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원망했다. 왜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지 않고 두 눈만 가져갔냐고
몸부림치며 통곡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원망을 하고 절규를 하다가 술을 마셨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죽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옆에 있으면 케이의 원망은 더욱 심해졌고, 아빠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며칠 동안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그래도 허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만약에 케이의 인생에 아빠가 없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을
마시려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집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케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밖에서 큰 소리로 케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덜컥 열리고는 한 사람도 아닌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케이, 아니 박 상병. 군인병원에서 왔네."
군인병원에서 왜 케이를 찾아왔을까? 누군가 한 명이 케이에게 무엇을 건넨다.
"훈장이네. 그리고 2계급 특진이야."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이야기일까? 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2계급 특진이 아니라 백 계급
특진이라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케이는 그저 자기에게 건네진 훈장을 아무 의미 없이 만지고만 있다.
"그리고 더 좋은 소식이 있네."
케이에게 더 좋은 소식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군의관이 하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찡 울렸다.
"자네에게 안구이식 수술을 하기로 했네."
안구이식수술? 그렇다면 다시 햇빛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기쁨으로 파르르
떨렸다. 군의관은 수술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입원하자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케이는 정신이 없었다.
만약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펄펄 날아서라도 갈 것이다. 너무나 흥분하고 기뻐서 케이는 자신의
두 손을 꼭 모아 잡았다.
수술 경과는 아주 좋았다. 케이는 붕대를 풀기 전에 벌써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군의관들이고 옆에 있던 간호병들도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너무나 기뻐했다. 케이는 차마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흐느껴 울 뿐이었다. 감사하단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비록 하나의 눈이었지만 그녀는 뚜렷하게 사물을 볼 수가 있었다.
케이가 퇴원하는 날. 병실에서 나오다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한 남자를 보고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온몸의 핏줄기가 모조리 머리로 쏠리는 느낌에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김경호? 그가 케이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던지고 있다.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의미만
느낄 뿐이다. 약간 정신을 차린 케이는 무작정 뛰어가서 그에게 안겼다.
"어어, 넘어지겠다."
한참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다가 케이는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술 냄새?
케이가 느꼈던 김경호의 냄새는 강인한 남성의 냄새였다. 그런데 왜 아빠와 같은
인생의 패배자에게 나는 술 냄새가 그에게서 날까 이상했다. 고개를 들어서 그의
얼굴을 보자, 그는 예전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강인한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뭔가에 주눅이 든 그런 두려운 표정이었다. 그의 강철 같은 팔뚝도 온 데
간 데 없이 그저 나약해 보이기만 했다.
"가지. 어디서 식사라도 함께 하자."
그의 말소리도 허약하게 들렸다. 마치 생기를 잃은 껍데기만 있다는 느낌이 든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케이는 고개를 저어보았다. 케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김경호는 케이의 앞으로 걸어갔는데, 걷는 그를 보면서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아빠의 걸음걸이처럼 절뚝절뚝 걷는 그의 두 다리는 모두 의족이었다.
케이가 김경호의 뒤에서 울음을 터뜨리자 김경호는 다시 그녀에게 절뚝절뚝
다가와서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쉬! 쉿! 아무 말 하지 마!"
케이는 그냥 그에게 안겨서 마냥 흐느껴댔다.
케이는 이제는 술을 끊고 열심히 일을 한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눈에서는 의지의 빛이 가득 차 있다. 처음에는 한 눈으로 사물에 초점을 맞추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작은 아파트에서 자신만을 기다리는 김경호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저녁에 일을 마치면 김경호에게 맛있는 저녁을 해주기 위해
분주하게 장을 보고서는 집에 들어왔다. 김경호도 예전의 그 강인한 빛을 찾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전쟁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의지의 힘이다. 김경호도 술을 끊고 집에서 나름대로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케이가 들어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그러나 김경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케이가 삐진 척을 하면서 김경호의 곁으로
다가가자 김경호는 갑자기 케이의 얼굴 앞에 바싹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뭐예요?"
"후후후, 풀어 봐!"
케이는 작은 포장지를 뜯고서 상자를 열다가 그만 가슴이 콱 막혀와서 눈물을 글썽였다.
"케이, 나와 결혼해 주겠어?"
케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그저 그의 품에 꼭 안겼다. 멀리서 찾았던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행운이었다. 하지만 행운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곁에 있는 행복을 찾는 것이 먼 데 있는 행운을 찾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
결혼식은 군의관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옛 친구인 스텔라와 자넷도 찾아왔다.
막 결혼식이 시작되려는데 김경호가 케이의 손을 잡고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케이는 그런 그의 표정이 불안했다. 무엇을 물어보기도 겁이 났다. 김경호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빠도 모셨어."
그 말에 케이는 전에 나쁜 기억이 떠오르며 당황한다. 아빠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인생 패배자의 모습으로 다리를 절뚝이며 결혼식에 들어와 기쁜 결혼식을 망칠 것이다.
다시는 케이의 인생을 아빠의 삶과 결부시키지 않겠다고 얼마나 결심했던가? 케이가
김경호와 함께 아파트로 나올 때까지도 아빠는 집에 나타나지 않았었고, 케이는 오히려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김경호에게 아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욱 창피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김경호가 아빠를 알고 또 아빠를 결혼식에 모셨단
말인가? 갑자기 아빠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왜요?"
케이가 소리치는데 김경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이렇게 되고 난 후에 이 세상을 원망했지. 심지어는 케이 너까지도 원망했어.
그때 내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 술에 절어 살면서 한탄만 하고 살았는데 내게
보내온 편지 한 통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어. 그 편지가 너를 만날 자신을 주었던 거지.
내가 한쪽 눈이 없는 너를 보는 순간, 모든 불행이 나만의 것이 아닌지 깨달았어.
그래서 살아야 하겠다는 용기가 생긴 거야. 그렇기에 술을 끊을 결심을 한 거지."
케이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그저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레나다 전쟁(Grenada War)에서 다친 분의 편지였어. 그는 그때 전쟁영웅이라고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지. 고립된 한 분대를 살리고는 자신은 다리를 잃었어. 명예제대를
하고 살다가 폐인이 되었지. 그래. 명예제대의 훈장은 빛나는 것이 아니었어.
검은 훈장인 셈이지. 그런데 폐인이 되어 살던 어느 날 그에게 한 여자가 찾아왔지.
그녀도 그레나다 전쟁에서 군인으로 있던 여자였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은 거야. 그 여자는 그에게 힘을 주었고, 그는 다시 그 여자를 통해 삶을 되찾았던
거지. 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아이를 낳다가 자신에게 새 삶을
준 그 여자가 병에 들게 되었어. 그리고 그 여자가 시름시름 몇 년을 앓다가 병으로
죽은 거야. 아내가 죽자 그는 다시 살 이유를 느끼지 못했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는 다시 폐인이 되었지. 딸 하나를 키우며 간신히 정부보조를 받고 술로 세상을 살았던 거야."
"그런 이야기는 왜?"
"그런데 그 분이 그 딸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거야."
김경호의 눈에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다. 케이는 그의 눈에 고이는 맑은 액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딸을 위해 눈을 하나 바치겠다는 것이었어."
"뭐라고요!"
케이는 마치 악이라도 쓰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 분은 이 말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지만 영원히 비밀로 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케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온 몸이 세상에 붕 떠서 빙빙 도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닌 꿈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결혼식이 시작되어도 케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 순간 군의관들과 군인들이 모두 일어나 막 식장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을
향해 경례를 붙였다. 그 사람은 결혼식장으로 절뚝이며 들어섰고, 김경호도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그 사람은 자기가 청하지도 않은 자리에 불청객으로
찾아왔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케이의 눈에 검은 훈장이 아른 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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