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 암송대회 10편
1. 임께서 부르시면
2. 그 면 나라를 아십니까
3. 작은 짐승
4. 차라리 한 구루 푸른 대로
5. 빙하
6. 흰 석고상
7. 어머니 기억
8. 춘향전 서시
9. 대바람 소리
10.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뜻은
1. 임께서 부르시면 / 신 석 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2. 그 면 나라를 아십니까 / 신 석 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3. 작은 짐승 / 신 석 정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1936
4. 차라리 한 구루 푸른 대로 / 신 석 정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몸이 젖어...
난(蘭)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 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葉脈)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난(蘭)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 놓아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5. 빙하 / 신 석 정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너머로
꿈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沙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 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 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 대어 몇 번이고 소곤거려도
가고 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가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되어
남은 피 한 천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6. 흰 석고상 / 신 석 정
-젊은 니힐리스트 홍에게서 들은 꿈 이야기
사뭇 푸른 하늘 아래
멀리 트인 푸른 벌판을
나는 누구를 찾아 이리 헤매이는 것일까?
끝없이 헤매이다 다다른
소나무 대 수풀 다옥한
작은 언덕 아래 작은 마을은
혈맥이 정지한 듯 고요한 마을이었다.
아무리 목 놓아 불러 보아도
마을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고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멀리 흐르는 푸른 강물소리......
그 언제 한물이 지내갔는가?
죽은 듯 고요한 이 마을은
엄청난 전란을 겪었는가?
죽은 듯 고요한 이 마을은
문득 어느 집 층층계를 무심코 오르다가
흰 장미처럼 발가벗은 여인이
햇볕이 드시게 흐르는 창 옆에
가로누워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하였다.
꼬옥 다문 입술이랑 감은 눈이랑
아무 말이 없다
고요하다
어디서 비롯하여 어디로 끝나는
눈 덮인 산맥보다 희고 고운 곡선이여....
가슴을 파헤치고 머리를 묻어도
볼에 볼을 문질러도 말이 없다
끝끝내 껴안은 채 흐느껴 목 메이게 울다가
차디찬 석고상에 소스라쳐 나는 꿈을 깨었다
시방 나는 안개 자욱한 거리를 헤매이며
다시 붙잡고 목 놓아 울어볼 사람을 찾노라
모두 움직이는 석고상인 것을......
모두 다 움직이는 석고상뿐인 것을......
오오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역력히 들려오는 그 강물 소리....
7. 어머니 기억 / 신 석 정
어느 少年의ㅡ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少年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셔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海風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왔었다.
쏴아 ... 먼 바닷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 고갤 넘던 내 소년시절의 일이었다.
8. 춘향전 서시 / 신 석 정
푸르름 머금은 천지가 눈부시어
호이 꾀꼬르르 서로 부르는 소리
꾀꼬리 애가 잦아 짝 부르는 소리
영주 방장 봉래산이 쩌르릉 흔들린다.
아침 날 늦은 안개 교룡산성 두르고
아아라한 지리산 꿈이런 둣 멀어라
철철철 요천수 녹음을 누비면서
은하 흘러가듯 휘휘 칭칭 감도누나
광한루 삽작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낙락장송에 뒤덮인 산천이 고울시고
방초도 꽃도곤 좋아 언덕엔 실바람인데
어디서 뚜욱 뚝 모란 지는 소리 들려라.
삼백예순 날을 오작교에 묻고 가는
견유 직녀의 설운 정을 모르리까?
새우던 그 밤에도 별을 깔렸으리
희뜩 나비 한 마리 소리 없이 스쳐간다.
춘정을 시새워하는 건 꾀꼬리만도 아니어
도도한 취흥에 이도령도 흥에 겨워
주안상 밀어놓고 시흥에 잠겼어라
고물고물 단청인데 풍경도 울어 에고.....
오월도 단오절은 일 년에 드문 가절
삼단 같은 검은 머리 두 귀를 눌러 빗고
향단이 앞세운 춘향의 추천 나들이에
버들도 간지러워 하늘하늘 흔들린다.
예서 비롯한 아기자기한 사랑이사
우리가슴에 예부터 지녀온 것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란
제나라 왕촉도의 허튼 주정이지
벼슬아치 토호들의 가렴주구 속에
시달린 백성들의 뜨거운 가슴인데
정절은 양반 놈의 독차지는 아니어
월매 딸 춘향이가 찾아낸 값진 권리
천인혈로 금준에 미주를 담지 말라
만성고로 옥반에 가효도 놓지 말라
다시는 촉루 지는 속에 민류를 지게 말라.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을 못 듣느냐?
옥문을 열고 나오는 무구한 백성들은
바로 빛나야 할 우리들의 내일이거늘
큰 칼 벗은 저 아리잠직한 춘향이를
우리들 오늘은 뜨거운 박수로 맞아 오자.
9. 대바람 소리 / 신 석 정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오고 가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악지론」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10.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뜻은 / 신 석 정
우리 모두를
고이 지녀온
마음을 잃은 지 오래로다.
한때
대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밀화부리 노래와 이웃하던
그 조촐한 마음 잃은 지 오래로다.
찔레꽃 짙은 향기에 젖어
오월 하늘을 비상하던
아아 거울같이 맑은
그 마음 잃은 지 오래로다.
아무리
검은 손이 우리 눈을 가리고
우리 마음을 가릴지언정
차마 어둠을 이웃할 수는 없거늘
오늘은
저문 강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그 안쓰러운 우리 마음을 찾아
어서 출발을 서두를 때이다.
하여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뜻은
잃어버린 마음을 그리워하는 까닭이로다.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