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의 발이 짧다고 길게 늘어뜨리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짧게 짤라버린다면
그들은 고통으로 울부짖을 것이라 했다.
예수보다 369년 전에 태어나 살다 간,
중국의 장주라는 사람이 한 말을 후학들이
엮은 장자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자식 셋을 키우면서, 또 후배직원들을
대하면서 항상 기억하며 또 실천하려 노력
하는 귀절이다.
사람마다 잘하는 분야가 각각 다른 법이다.
공부나 업무를 잘 하는가 하면 운동이나
그림을, 술 먹고 노는 잡기에 특히 뛰어난
소질을 드러내기도 하고 유달리 둔하면서
게으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나의 입장을 기준으로만 본다면 천불이 난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도 다 그들의 타고난
복 인것을.....
추석 전 날, 큰집에 명절 음식 도와주러
다녀온 둘째 딸이 다녀오자마자 내 앞에
다가와 앉으며 지랑스럽게 늘어 놓는다.
"아빠, 저 오늘 이내 박살 내놓고 왔어요"
"왜?"
"자식이 되바라져서 신나게 깨버렸어요"
"잘했다"
이내라는 아이는 백씨의 무남독녀이다.
재수끝에 대학간 하늘 아래 무서울것
하나 없는 조카딸이다.
내 둘째 딸보다는 다섯 살 손 아래다.
큰집 들어설때부터 인사를 하는 둥
마는둥했고 딸이 전을 부치는데도 전혀
도와줄 생각없이 머리를 헤쳐풀고
돌아다니는게 눈에 거슬려 한소리 했더니
대꾸없이 자기방으로 들어가 버린걸 참지
못하고 불러내 두시간 넘게 박살 내어버린
모양이다.
거문고 하는 내 둘째 딸은 한 성질 한다.
국악예고 다닐때도 침 좀 뱉고 다녔다.
전통음악이란게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딸은 정도가 심했다.
쌩까고 다니는 후배들 보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었나 보다. 덕분에 아내가 수없이
학교에 불려 다닌 덕택에 간신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초, 소리선생집에 기숙하며
전국에서 모인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니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으로 깡만 키웠나보다.
국악예고 진학해도 성질이 남아 기숙사를
퇴사당하고 학교앞 원룸을 얻어놓고 졸업
할 때까지 내내 다녔다. 덕분에 내 지갑만
더욱 축났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기, 누군가는 그들
을 질풍노도의 시기라 하지 않았던가?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아이들, 남부러울 것
없는 아이들 속에서 많이 모자라다고 느끼는
부분을 악으로 깡으로 버틴 불쌍한 딸아이...
나나 아내는 결혼 초부터 부유하지 못했다.
물려 받은것 하나 없이 나의 월급과 아내의
변변치 못한 부업으로 큰딸은 미대에,
둘째딸은 국악을, 막내 과외수업비까지 충당
하려면 아이들이 원하는 모두를 다 들어줄
수 없었다.
아내나 나는 고등학교만 마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같은 직장에서 눈이 맞아 결혼
하고 자식 셋을 두었다.
공부가 하고싶어 아이 둘 낳고서야 한국방송
통신대학교를 늦깎이입학해서 근10년을 다닌
끝에 학사모를 써봤다.
나나 아내가 가난하다고 자식들에게 대물림
하기 싫었고 돈을 위한 학문보다 진정으로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게하고 싶은
욕심에서 자초한 일이었다.
자식들은 그런 부모 마음을 알기나 할까?
경상도 사투리를 마구 뱉어내는 지 엄마를
고등학교 시절 서울있던 둘째 딸은 엄청
싫었던가 보다.
서울에서 같이 걷기 남부끄럽다고 뒤떨어져
따라오라던 지 엄마가 앞서 걷는 딸이 손에
들고 가던 윗저고리를 떨어뜨리자 무심결에
"고운아! 니, 우와기 널찠따'"
딸은 그소리 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갔었다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내게 말했다.
엄마를 참 싫어했던 딸, 멀리 서울까지수시로
오르내리며 잔소리를 해대던 지엄마가 싫다며
원룸 키까지 바꿔버려 길바닥에서 몇시간씩
기다리게 하던 몹쓸 딸, 기다리다 찜질방에서
혼자 자고 내려와도 결코 내색없던 아내......
딸도 세월이 흘러 나이드니 서서히 변해갔다.
세월이 흘러가니 잘못한 걸 알겠노라며,
이내를 나무라면서도 지난 날 본인이 잘못했던
사례를 들면서, 유방암과 투병중이라 머리카락
이 다빠져 하나도 없는 니엄마에게 잘 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라면서,
나중에 후회할 짓은 하지 말라며 급기야 둘이서
부둥켜 안고 울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나
보다.
듣고 있자니 나의 콧등도 시큰거렸다.
"우리 고운이가 어른이 다 되었구나"
그말 밖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어제 새벽에 일어나 아들부대에 도착해서
아들을 차에 태워 창원으로 출발하려니
전화벨이 울린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창에 뜬다.
나의 어머니 전화 번호다.
"관아! 용수 데리러 갔다며?
운전 조심해서 단디 갔다 온나"
차라리 보고싶다 했으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말씀은 끝내 삼키며
자식을 걱정하시는 노모의 마음 씀씀이에
그냥 목이 메어와 간신히 답했다.
"지금 바로 큰집으로 같이 가겠습니다"
백씨와는 등을 졌다 하더라도 노모의 애타는
마음은 죽어도 져버릴 수 없었다.
나도 자식을 키우다보니,
못난 자식이 보고싶을 어머니가 못견디게
보고싶어 졌었다.